[문화&정치②] K-콘텐츠는 어떻게 협상의 언어가 되었나
BTS와 드라마, 재외동포까지… 감정의 회로를 설계한 싱가포르 방문
[KtN 임우경기자]싱가포르 국빈 만찬장에서 타르만 샨무가라트남 대통령은 한국어로 “위하여”라고 외쳤다. 건배사는 짧았지만, 그 장면이 남긴 인상은 길었다. 그는 방탄소년단의 공연 소식과 한국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자연스럽게 언급했다. 특정 작품의 제목을 거론하며 세대의 삶과 장인정신을 이야기했다. 만찬장은 잠시 문화의 이야기판으로 바뀌었다.
외교 현장에서 대중문화가 오르내리는 일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번 방문에서 눈에 띈 점은 문화가 ‘분위기 조성용’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콘텐츠는 협상 테이블을 에워싼 공기의 성질을 바꾸는 장치로 작동했다. 국가 간 이해가 엇갈리는 사안이 많을수록, 서로가 공유하는 감정의 접점은 더 중요해진다. 싱가포르가 꺼낸 K-콘텐츠의 언어는 그 접점을 넓히는 방식이었다.
대중문화는 이제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한 사회가 무엇을 보고 듣고 공감하는지를 드러내는 창이다. 싱가포르 지도자가 한국 드라마의 서사를 짚고,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난 장인정신을 언급한 것은 한국 사회를 표피가 아닌 맥락으로 읽고 있다는 신호다. 그 신호는 상대를 존중한다는 뜻이자,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재명 대통령의 답사 역시 문화와 성장의 이야기를 겹쳐 놓았다. 제한된 자원 속에서 기술과 창의로 돌파구를 찾았다는 공통의 경험을 상기시켰다. 그 위에 인공지능과 디지털 전환, 에너지 안보 협력이라는 의제를 올렸다. 문화로 문을 열고, 기술과 경제로 방을 채우는 구조다. 문화적 공감이 앞서면 실무적 합의가 뒤따르기 수월해진다.
이번 방문 일정에는 또 하나의 축이 있었다. 싱가포르 재외동포들과의 만남이다. 3·1절을 맞아 열린 간담회에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민간 외교관”이라는 표현으로 동포 사회의 역할을 짚었다. 한인회가 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 창립됐다는 역사적 맥락도 언급했다. 재외동포는 문화의 소비자이자 생산자다. 현지 사회에 한국을 설명하고, 한국에 현지의 변화를 전하는 가교다.
재외동포 간담회는 통상 의례적 행사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가 이미지가 해외에서 유지되는 힘은 공식 외교 채널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동포 사회가 체감하는 정책의 신뢰도, 현지 사회와의 접점에서 쌓이는 평판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이번 방문에서 문화적 상징과 동포 간담회가 함께 배치된 것은, 외교의 무게중심을 정부 간 관계에만 두지 않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김혜경 여사의 일정 또한 문화정치의 또 다른 장면이었다. 싱가포르 대통령 부인 제인 유미코 이토기 여사와의 차담은 예술을 매개로 한 대화였다. 장소는 비영리 예술 자선단체이자 예술가 주거지인 ‘테멩공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였다. 지난해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양국 작가들의 전시와 강연이 열렸던 곳이다.
두 여사는 문화예술 진흥과 지원, 예술이 사회적 포용에 기여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토기 여사가 재소자 예술 프로젝트 ‘노란 리본’을 지원해온 배경을 설명하고, 김 여사가 예술의 치유 기능을 언급한 대목은 단순한 덕담을 넘어선 교감이었다. 문화는 국가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드는 동시에, 사회적 가치에 대한 공통 인식을 확인하는 통로다.
대중문화와 예술, 동포 사회와 관광 현장까지 이어진 일정은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문화가 감정의 회로를 만들고, 그 회로 위에 경제와 안보 의제가 올라간다. 싱가포르가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을 언급하는 순간, 한국은 단순한 교역 상대국이 아니라 이미 일상 속에 자리한 문화적 이웃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지점에서 협력은 낯선 제안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확장으로 인식된다.
정상회담 결과로 발표된 한-싱가포르 FTA 개선협상 개시 합의와 5건의 MOU는 숫자와 문서로 정리된다. 그러나 그 문서가 실질로 이어지려면 사회적 수용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양국 국민이 상대를 친숙하게 느낄수록, 협력의 폭은 넓어진다. 문화는 그 친숙함을 만드는 토양이다.
싱가포르는 인구와 국토 면적에서 한국과 비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문화와 도시 브랜드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국제 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한국은 대중문화의 확산을 통해 새로운 외교 자산을 확보했다. 이번 방문은 두 나라가 각자의 강점을 맞물리게 한 장면이었다. 싱가포르는 한국 콘텐츠를 통해 공감의 언어를 확보했고, 한국은 그 언어를 바탕으로 미래 산업 협력의 틀을 제시했다.
문화정치는 감성에 기대는 외교가 아니다. 감정을 매개로 신뢰를 쌓고, 그 신뢰를 실질 협력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번 싱가포르 방문에서 K-콘텐츠는 협상의 장식이 아니라 문을 여는 열쇠였다. 재외동포는 그 문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예술은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는 창구였다.
결국 외교는 사람의 일이다. 사람은 이익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억과 공감, 존중의 경험이 함께 작동한다. 싱가포르에서 울려 퍼진 한국어 건배사와 드라마 이야기, 예술을 둘러싼 대화는 그 작동 방식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문화가 협상의 언어가 되는 순간, 외교는 한층 넓은 공간을 확보한다. 이번 방문은 그 공간을 차분히, 그러나 분명하게 확장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