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치④] AI와 SMR, 투자와 FTA… 문화로 연 외교가 자본과 규칙으로 굳어질 때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남긴 ‘실질의 설계도’

2026-03-03     임우경 기자

 

[KtN 임우경기자]국빈 만찬장의 음악과 건배사가 관계의 온도를 높였다면, 정상회담장은 그 온도를 숫자와 문장으로 고정하는 공간이었다. 3월 2일 오전, 이재명 대통령과 로렌스 웡 총리는 싱가포르에서 다시 마주 앉았다. 지난해 서울 회담 이후 넉 달 만이다. 두 정상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더 깊게 다지겠다고 밝혔다. 환대와 상징의 언어가 먼저 오갔고, 이어 협력의 항목이 조목조목 정리됐다.

이번 회담의 뼈대는 세 갈래다. 안보 협력, 경제 연대, 미래 첨단기술 협력이다. 표현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범위는 넓다. 국방과 방산 기술 공동연구 확대, 초국가범죄 대응 공조 강화, 한-싱가포르 FTA 개선협상 개시 합의, 인공지능과 디지털, 과학기술, 환경위성, 소형모듈원전(SMR) 등 5건의 MOU 체결까지 이어졌다.

정상회담 결과를 숫자로만 나열하면 성과의 밀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핵심은 협력이 ‘관계의 선언’에서 ‘규칙과 자본의 틀’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FTA 개선협상 개시는 그 상징적 장면이다. 2006년 발효된 한-싱가포르 FTA는 양국 교역의 기반이었지만, 디지털 경제와 공급망 재편, 경제안보 논의가 본격화된 이후에는 손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번 합의는 그 필요를 공식 의제로 올린 것이다.

FTA는 관세 인하만을 다루지 않는다. 데이터 이동과 디지털 무역, 지식재산 보호, 공급망 안정 같은 문제를 포괄한다. 협정이 바뀌면 기업의 의사결정이 달라진다. 투자와 생산, 연구개발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번 개선협상 개시 합의는 단순한 협력 의지가 아니라, 제도적 틀을 다시 짜겠다는 뜻이다. 문화적 신뢰가 토대가 되지 않았다면 쉽게 나오기 어려운 결정이다.

투자 분야에서도 구체적 장치가 마련됐다. 한국 산업은행과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의 자산운용 그룹 세비오라 간 투자 파트너십 MOU가 체결됐다. 이는 한국의 유망 중소기업과 신산업 분야에 대한 투자 협력을 확대하는 통로가 될 전망이다. 싱가포르는 동남아 금융 허브다. 이 자본이 한국 기업과 연결될 경우, 양국 협력은 교역을 넘어 공동 성장의 단계로 옮겨갈 수 있다.

 

인공지능 협력은 이번 회담에서 가장 앞자리에 놓였다. 양국은 ‘AI 협력 프레임워크’ 체결을 추진하기로 했다. 피지컬 AI 기반 산업 혁신, 실생활 적용 확대, 공동연구와 투자 강화가 논의됐다. 공공안전 분야 인공지능 및 디지털 기술 협력 MOU, 지식재산 강화 협력 MOU도 함께 체결됐다. 치안과 행정 서비스에 AI를 접목하고, 기술 보호 체계를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AI는 선언만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 연구 인력 교류와 공동 프로젝트, 투자 생태계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싱가포르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정책에서 빠르게 움직여온 나라다. 한국 역시 산업과 기술 기반이 탄탄하다. 두 나라가 공동 연구와 투자에 나설 경우, 아세안 시장을 겨냥한 기술 협력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문화적 친숙함이 기업과 연구자의 교류를 촉진하는 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과학기술 협력 MOU와 환경위성 공동활용 MOU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양자 컴퓨팅과 우주·위성 기술 협력을 강화하고, 대기질 연구용 환경위성 자료를 공유하기로 했다. 이는 기후 변화와 에너지 안보라는 장기 과제와 맞닿아 있다. SMR 협력 MOU는 에너지 전환의 실질적 대안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싱가포르가 향후 원전 도입을 검토할 경우, 한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다.

 

안보 협력도 빠지지 않았다. 양국은 첨단기술에 기반한 국방 역량 강화를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방산 분야 협력을 모색하고, 온라인 스캠 등 초국가범죄 대응 공조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디지털 범죄는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경제와 기술이 연결될수록 보안 협력의 중요성도 커진다.

이번 정상회담은 문화로 문을 연 외교가 자본과 규칙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난초 명명식과 만찬의 상징은 관계의 온기를 높였다. 그 위에 FTA 개선과 투자 MOU, AI 협력 프레임워크가 얹혔다. 감정과 제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외교에서 ‘실질’은 숫자와 계약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 숫자와 계약을 움직이는 힘은 신뢰다. 싱가포르에서의 국빈 일정은 그 신뢰를 문화로 다지고, 제도로 고정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문화는 장식이 아니라, 규칙을 작동시키는 윤활유였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 합의들이 실제 성과로 이어지는지 여부다. FTA 개선협상이 어떤 범위를 담아낼지, 투자 파트너십이 어떤 기업에 자금을 공급할지, AI 협력 프레임워크가 어떤 공동 프로젝트로 구체화될지가 관건이다. 선언은 출발점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번 방문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문화로 관계를 열고, 자본과 규칙으로 관계를 묶는 방식이다. 싱가포르에서 체결된 문서들은 단순한 합의문이 아니라, 양국이 함께 설계한 미래의 틀이다. 문화와 정치가 만나는 지점에서, 외교는 보다 입체적인 얼굴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