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트렌드⑤] '이야기의 한국'과 '기술의 폴란드'가 만날 때... 유럽 시장 공략의 '마스터키'
웹툰 IP와 고효율 VFX의 전략적 결합... 영유아 애니메이션부터 게임 시네마틱까지 협업 모델 다각화, "단순 외주 넘어 파트너십으로 진화해야"
[KtN 홍은희기자]지난해 11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K-콘텐츠 엑스포에는 한국 기업 32개사와 유럽 기업 70개사가 참가했다. 계약과 양해각서 규모는 3000만 달러에 달했다. 수출 상담에만 머문 행사는 아니었다. 공동제작과 후반작업, 유럽 유통을 함께 놓고 논의가 오갔다. 한국과 폴란드 콘텐츠 업계가 어느 지점에서 맞물릴 수 있는지 확인한 자리이기도 했다.
양국이 맞붙는 지점은 뚜렷하다. 한국은 웹툰과 드라마, 게임을 거치며 강한 이야기와 캐릭터 IP를 쌓아왔다. 폴란드는 오랜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과 3D, VFX, 공동제작 실무를 갖췄다. 유럽 안에서 작업할 수 있는 네트워크와 제도도 이미 마련돼 있다. 한국이 가진 원작과 기획력, 폴란드가 쌓아온 제작 경험이 만나면 유럽 시장을 겨냥한 새 조합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야는 웹툰이다. 한국 웹툰은 이미 국내외에서 영상화 가능성을 검증받았다. 폴란드에서는 3D와 VFX, 후반작업 역량을 활용해 장편 애니메이션이나 시리즈로 옮길 수 있다. 제작비를 낮추는 문제만이 아니다. 유럽 공동제작 방식에 익숙한 폴란드 제작사를 통하면 현지 유통과 배급, 마케팅까지 함께 엮어볼 수 있다. 한국 원작을 유럽 시장용 영상으로 가공하는 경로가 생기는 셈이다.
게임 분야에서는 움직임이 더 빠르다. 국내 게임사들은 이미 폴란드 게임사 지분을 확보하거나 판권을 들여오며 현지 시장과 접점을 넓혀왔다. 애니메이션과의 접점도 여기서 나온다. 게임 안에 들어가는 컷신과 시네마틱 영상, 트레일러, 세계관 확장용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폴란드 제작사들이 강점을 보이는 분야다. 게임 IP를 애니메이션으로 넓히거나,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을 다시 게임 영상으로 돌리는 식의 작업도 가능하다. 한국과 폴란드의 협업이 단순 제작 하청에 머물지 않는 이유다.
영유아 콘텐츠도 빼놓기 어렵다. 폴란드는 오래전부터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볼렉과 롤렉’, ‘렉시오’, ‘미슈 우샤텍’ 같은 캐릭터는 폴란드 애니메이션의 긴 흐름 안에 놓여 있다. 한국 역시 영유아 콘텐츠 제작 경험이 적지 않다. 양국이 손잡으면 유럽 방송 편성과 스트리밍 시장을 겨냥한 어린이용 시리즈를 만들 여지가 크다. 그림체와 리듬, 캐릭터 설계를 유럽 시장에 맞게 다듬는 작업에서도 폴란드 제작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
공동제작은 작품 한 편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유통과 후속 사업까지 함께 봐야 한다. 폴란드는 국제 공동제작과 판권 판매에 익숙한 시장이다. 한국 제작사가 폴란드 파트너와 손잡으면 제작 단계뿐 아니라 유럽 안쪽에서 작품을 어떻게 배급하고 어떤 시장에 먼저 내놓을지까지 함께 짤 수 있다. 한국 원작을 들고 가서 현지 제작사를 고용하는 방식보다, 처음부터 공동개발 구조를 짜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는 얘기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 애니메이션 시장은 내수 규모가 크지 않다. 공공 기금 비중도 높다. 장기 프로젝트를 끌고 가는 경험은 일부 회사에 집중돼 있다. 한국 제작사 입장에서는 언어와 행정, 계약 구조, 일정 관리까지 새로 익혀야 할 부분이 많다. 유럽 공동제작 방식이 익숙하지 않은 회사라면 시행착오도 피하기 어렵다. 폴란드 제작사를 값이 싼 외주처로만 보면 협업이 길게 가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외주 계약보다 공동 기획에 가까운 방식이다. 한국은 기획과 원작, 프로젝트 운영 경험을 갖고 있다. 폴란드는 제작과 후반작업, 공동제작 실무와 유럽 네트워크를 쌓아왔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맡기는 방식보다, 단계별로 역할을 나누는 방식이 더 맞는다. 한국이 원작과 전체 기획을 맡고, 폴란드가 시각화와 유럽 공동제작 실무를 맡는 구조도 가능하다. 어린이용 시리즈와 웹툰 원작, 게임 기반 영상처럼 분야별로 다른 조합을 짜는 길도 열려 있다.
제도도 협업 가능성을 넓힌다. 폴란드는 제작비 30% 환급 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애니메이션 몫도 따로 배정해 두고 있다. 현지 파트너와 함께 들어가면 제작비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유럽 안에서 제작 거점도 마련할 수 있다. 지원 제도가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제작사가 유럽 안에서 제작과 배급의 발판을 찾는다면 검토할 만한 조건임은 분명하다.
폴란드 애니메이션 산업은 오랜 손기술과 작화 감각, 스톱모션과 인형극의 전통 위에 3D와 VFX를 쌓아 올렸다. 한국 콘텐츠 산업은 웹툰과 게임, 드라마를 거치며 원작과 기획의 힘을 키웠다. 두 나라가 만나는 자리는 이미 보이기 시작했다. 남은 일은 수출 상담을 넘어 작품 하나를 함께 만드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유럽 시장을 겨냥한 한국 콘텐츠가 어디에서 제작의 발판을 마련할 것인지 묻는다면, 폴란드는 충분히 검토할 만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