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트렌드①] AI 전력 수요 급증에 데이터센터 배터리 시장 재편… 리튬 일변도에서 장주기 저장장치로 확장
IDTechEx “2036년 상업·산업용 BESS 시장 210억달러 전망” 데이터센터는 안전성·장시간 전력공급 능력 중시 흐름전지 등 비리튬 기술은 대안으로 부상했지만 상용화는 아직 진행형
[KtN 김 규운기자]생성형 인공지능 확산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배터리 시장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서버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 에너지 밀도를 우선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화재 위험을 낮추고 장시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저장장치를 찾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가 대형 전력 수요처로 떠오르면서 배터리는 단순한 비상전원 설비를 넘어 전력 품질과 운영 안정성을 좌우하는 핵심 장치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DTechEx는 최근 보고서에서 데이터센터를 포함한 상업·산업용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 시장이 2036년 210억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보고서는 AI 데이터센터 확대, 통신 인프라, 전기차 충전, 산업 전기화가 함께 시장 성장을 끌 것으로 봤다. 다만 이 수치는 데이터센터 단일 시장이 아니라 상업·산업용 저장장치 전체를 포괄한 전망치다.
데이터센터 배터리 시장에서는 그동안 리튬이온 배터리가 사실상 표준으로 통했다. 에너지 밀도가 높고 상용화 경험이 축적돼 제한된 공간 안에 많은 전력을 담아야 하는 환경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AI 서버 비중이 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규모 학습과 추론 작업이 반복되면 전력 부하 변동 폭이 커지고, 짧은 시간 안에 급격한 충방전이 이어진다. 이런 운용 조건에서는 배터리 열화와 발열 관리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된다.
이 때문에 데이터센터 업계에서는 이제 배터리 선택 기준을 다시 세우는 분위기다. 예전에는 같은 면적 안에 얼마나 많은 전력을 담을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면, 최근에는 화재 위험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 정전이나 부하 급변 상황에서 얼마나 오래 전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가 늘수록 배터리는 백업 설비를 넘어 전력망과 설비 사이에서 전력 품질을 조정하는 역할까지 요구받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장주기 에너지저장장치가 대안으로 거론된다. 장주기 저장장치는 통상 8시간 이상, 길게는 수일 동안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뜻한다. 아직 데이터센터 주력 설비가 리튬이온에서 곧바로 장주기 저장장치로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AI 전력 수요가 늘면서 기술 검토와 실증은 빨라지고 있다. 로이터는 최근 AI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가 장주기 에너지저장장치 배치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전했다.
후보 기술 가운데 하나가 레독스 흐름전지다. 흐름전지는 전해액을 외부 탱크에 저장하고 이를 순환시키며 반응시키는 구조여서 장시간 방전에 유리하고, 비가연성 수계 전해질을 쓰는 방식은 화재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복 충방전이 많은 환경에서 열화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도 장점으로 거론된다. 다만 높은 초기 비용과 아직 넓지 않은 공급망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미국 테라플로우 에너지는 이런 흐름전지 기반 장주기 무정전전원장치 기술을 개발 중인 업체로 거론된다. 회사 측 설명에 따르면 이 시스템은 평상시에도 전력이 배터리 시스템을 거쳐 흐르는 인라인 방식으로 설계돼 전력 품질을 조정하고 정전 시 전환 지연을 줄이는 구조를 내세운다. 다만 이는 아직 개별 기업의 개발·실증 단계 기술 사례로 보는 편이 맞고,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고 단정할 단계는 아니다.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의 관계도 바뀌고 있다. 대형 데이터센터는 그동안 지역 전력망에 부담을 주는 대표 시설로 꼽혔다. 그러나 대용량 배터리를 함께 갖춘 데이터센터는 수요가 낮을 때 전력을 저장하고, 수요가 몰릴 때 저장 전력을 쓰는 방식으로 계통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데이터센터가 단순 소비 설비를 넘어 지역 전력망의 유연성을 높이는 자원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보고 있다.
배터리 시장 경쟁도 더 복잡해지고 있다.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앞세운 중국 업체들은 여전히 가격 경쟁력이 강하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서는 공급망 재편과 자국 내 제조 확대를 겨냥한 정책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이른바 OBBBA 이후 에너지저장장치와 배터리 공급망 규정 변화가 업계 변수로 떠올랐다. 데이터센터 배터리 시장도 기술 경쟁만이 아니라 공급망과 정책 경쟁의 영향을 함께 받을 가능성이 크다.
국내 업계에도 과제가 있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 역량에서는 경쟁력을 갖췄지만,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비발화성, 장시간 운전, 전력 품질 조정 능력에 맞춘 제품과 시스템은 아직 키워야 할 영역으로 꼽힌다. AI 인프라 투자가 늘어날수록 데이터센터용 저장장치와 전력관리 기술을 별도 시장으로 보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데이터센터 배터리 시장은 고밀도 경쟁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다. AI 시대 데이터센터는 더 많은 전력을 더 오래, 더 안전하게 다뤄야 한다. 리튬이온 배터리 중심 구조는 당분간 유지되겠지만, 장주기 저장장치와 흐름전지 같은 대안 기술을 함께 검토하는 움직임은 더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 배터리 시장의 승부처도 저장 용량만이 아니라 안전성, 수명, 전력망 대응 능력으로 옮겨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