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iaparelli②] ‘가짜 리본’이 바꾼 1927년 파리, 스키아파렐리 니트가 연 현대 워드로브

트롱프뢰유 보타이 스웨터에서 분리형 의상까지, 엘사 스키아파렐리 초기 작업을 보다

2026-03-30     임우경 기자
The V&A Announces "Schiaparelli: Fashion Becomes Art,” the First UK Exhibition Devoted to the Historic Maison. 사진=V&A Announces "Schiaparelli,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우경기자]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A) 세인즈버리 갤러리에서 스키아파렐리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옷이 있다. 검은 니트 스웨터 한 벌이다. 목선 아래 흰 리본이 묶인 듯 보이지만 실제 장식은 없다. 뜨개 조직만으로 리본의 형상을 만든 1927년 트롱프뢰유 보타이 니트다.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이름을 파리에 알린 초기 대표작이자, 이번 전시가 스키아파렐리의 출발점으로 내세운 옷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니트 위에 문양을 넣는 방식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파리에서는 달랐다. 스키아파렐리는 입체 장식을 덧붙이는 대신 뜨개 조직 자체로 착시를 만들었다. 옷 위에 실제 리본을 다는 대신 리본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작은 아이디어였지만 효과는 컸다. 평면의 니트가 시각적 장난의 표면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일상복도 위트와 지성을 드러내는 옷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스웨터 한 벌에 들어 있었다.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정규 복식 교육을 밟은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언어학자의 딸로 태어나 시와 철학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랐고, 패션 역시 시각적 언어처럼 다뤘다. 초기 니트 작업에도 그런 감각이 선명하다. 옷의 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표면의 인식을 흔드는 방식, 멀리서 본 모습과 가까이서 본 모습을 다르게 만드는 방식이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리본 니트가 나오게 된 과정에도 그런 성향이 드러난다. 엘사는 어느 니트 스웨터의 조직감에서 착안해 파리에 있던 아르메니아계 니트 기술자와 함께 새 작업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웨터 위에 목걸이나 리본이 달린 것처럼 보이는 형상을 뜨개질로 짜 넣겠다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낯선 주문이었다. 결과물은 곧바로 화제가 됐다. 멀리서 보면 입체 장식처럼 보이고, 가까이 가면 평면의 직조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이 스웨터는 스키아파렐리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The V&A Announces "Schiaparelli: Fashion Becomes Art,” the First UK Exhibition Devoted to the Historic Maison. 사진=V&A Announces "Schiaparelli,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V&A에 나온 초기 니트 작업들은 이 실험이 리본 한 가지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도 보여준다. 전시장 유리장 안에는 선과 문양을 활용한 니트들이 함께 놓였다. 몸을 따라 흐르는 기하학 패턴, 표면 위에 형상을 얹은 듯한 착시, 의복 바깥으로 드러난 선의 감각이 이어진다. 스키아파렐리는 니트를 보온용 일상복으로 다루지 않았다. 평면 위에 그림을 그리듯, 몸을 둘러싼 표면에 농담과 장치를 심는 매체로 다뤘다.

초기 작업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형식 실험에만 있지 않다. 니트는 당시 여성복에서 실용성과 활동성을 함께 확보할 수 있는 재료였다. 1차 세계대전 뒤 여성의 사회 활동이 넓어지면서 코르셋과 무거운 드레스는 빠르게 낡은 복식이 돼 갔다. 스키아파렐리는 신축성 있는 니트를 앞세워 움직임이 자유로운 옷을 만들었고, 그 위에 장식과 착시를 얹었다. 편하게 입을 수 있으면서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옷, 실용복과 실험복의 경계를 넘나드는 옷이 이 시기 작업의 특징이다.

전시에는 스웨터와 스커트, 바지, 스포츠웨어를 함께 보여주는 자료도 포함됐다. 여기서 읽히는 것은 ‘분리형 의상’의 감각이다. 상하의를 한 벌 세트로 고정해 입는 방식에서 벗어나 필요한 조합을 스스로 만드는 현대 워드로브의 감각이 스키아파렐리 초기 작업에 이미 들어 있다. 니트 수영복과 테니스복, 단품 스웨터들은 기능을 우선하면서도 시각적 인상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날의 스포츠웨어나 믹스 앤 매치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초기 니트는 스키아파렐리가 어떤 디자이너였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녀는 몸의 선을 따라 옷을 정교하게 맞추는 데 그치지 않았다. 단추와 지퍼, 자수와 프린트처럼 사소해 보이는 요소를 발상의 장치로 바꿨다. 진짜 장식을 덜어내고 가짜 장식을 직조하는 방식은 이후 작업으로도 이어졌다. 가짜 칼라, 가짜 주머니, 가짜 단추처럼 보이는 표면 장식은 옷이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보이느냐를 먼저 묻는다. 패션이 기능과 재료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키아파렐리는 초기에 이미 알고 있었던 셈이다.

The V&A Announces "Schiaparelli: Fashion Becomes Art,” the First UK Exhibition Devoted to the Historic Maison. 사진=V&A Announces "Schiaparelli,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그 점에서 이 니트들은 오늘날 그래픽 패션의 원형처럼 읽히기도 한다. 옷의 형태 자체보다 표면의 이미지와 기호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착용자는 그 이미지를 통해 태도와 취향을 드러낸다. 스키아파렐리가 1920년대 후반 니트 위에 올린 리본과 선, 문양은 오늘날 프린트와 로고, 그래픽이 차지하는 자리를 먼저 예고한 측면이 있다. V&A 전시는 그 계보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초기 니트 작업만 보아도 이후 패션사와 닿는 접점은 어렵지 않게 읽힌다.

전시 후반부의 다니엘 로즈베리 작업과 나란히 놓고 보면 더 분명해지는 부분도 있다. 로즈베리는 엘사의 상징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선과 표면, 해부학적 장식, 시각적 착시를 오늘의 쿠튀르 언어로 키운다. 최근 스키아파렐리 드레스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신체 형상의 장식과 금빛 자수는 1927년 니트가 가졌던 표면의 장난과 완전히 끊어져 있지 않다. 재료와 스케일은 달라졌지만, 옷을 하나의 이미지 장치로 다루는 태도는 이어진다.

이번 전시에서 초기 니트 구역이 갖는 무게도 그 지점에 있다. 스키아파렐리의 역사는 거대한 조형 드레스나 레드카펫 룩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리본 하나를 짜 넣은 검은 스웨터에서 출발한다. 장식을 덧붙이지 않고도 장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발상, 일상복을 가볍게 비트는 감각, 실용복 안에 시각적 장난을 숨겨 넣는 방식이 이후 메종 전체의 기질을 이미 드러내고 있다. 1927년의 니트는 작은 옷이지만, 스키아파렐리라는 이름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분명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