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테크①] 리히터 1300만달러 추정가 내건 크리스티 홍콩 경매…거래장 넘어 전시·브랜드 무대로

2026-03-31     임민정 기자
Gerhard Richter "Abstraktes Bild" Leads Christie's Hong Kong Sales. 사진=Christie’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민정기자]홍콩 센트럴의 더 헨더슨 전시장 안쪽에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1991년작 ‘Abstraktes Bild’가 걸렸다. 크리스티가 3월 27일 연 20·21세기 미술 이브닝 세일의 대표 출품작이다. 추정가는 1000만~1300만달러. 크리스티는 리히터를 앞세우고 산유, 월터 스파이스, 장미셸 바스키아, 쿠사마 야요이, 피카소를 한 세일에 묶었다. 새 아시아태평양 본부 이전 뒤 처음 치른 대형 봄 경매에서 홍콩은 다시 블루칩 미술 거래의 집결지로 움직였다.

이번 세일의 중심은 작품 한 점이었다. 리히터의 ‘Abstraktes Bild’는 이번에 처음 경매에 나왔다. 1991년은 리히터가 런던 테이트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 해다. 크리스티는 이 시기 제작된 붉은 색면 추상에 최고 1300만달러를 매겼다. 여러 겹의 물감을 밀어 올리고 걷어내는 스퀴지 기법이 화면 전체에 남아 있고, 붉은 계열이 전면을 덮는다. 시장에서는 작품의 색감과 제작 시기, 첫 출품 이력에 시선이 모였다. 고가 미술 시장에서 희소성은 늘 가장 먼저 가격을 끌어올리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홍콩 경매 시장이 이 작품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기 둔화 국면에도 초고가 블루칩 작품은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공급이 제한돼 있고, 거래 이력이 드문 작품일수록 상위 컬렉터 자금이 몰린다. 리히터의 이번 출품은 작품 한 점의 거래를 넘어 지금 시장에 최고가 작품을 받아낼 수요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시험대에 가까웠다.

크리스티는 리히터 한 점에만 기대지 않았다. 산유의 ‘Cheval agenouillé sur un tapis’를 함께 내세워 아시아 컬렉터 수요를 겨냥했다. 이 작품 역시 이번에 처음 경매에 나왔고 추정가는 360만~620만달러다. 서커스를 소재로 한 산유 작품은 수가 많지 않다. 동양적 선묘와 서구 회화의 색채를 함께 품은 산유 작품은 홍콩 경매에서 꾸준히 강한 수요를 보여 왔다. 리히터가 서구 현대미술의 상징 자본이라면, 산유는 아시아 시장의 정체성과 가격 경쟁력을 동시에 보여 주는 카드에 가깝다.

월터 스파이스의 ‘Blick Von Der Höhe’도 이번 세일에서 눈길을 끈 작품이다. 크리스티는 이 작품 추정가를 620만~870만달러로 잡고 작가 최고가 경신 가능성을 내걸었다. 여기에 바스키아의 1981년작 무제, 쿠사마 야요이의 1993년작 ‘Pumpkin’, 피카소와 샤갈, 미로, 자오우키 작품까지 더했다. 특정 작가 한 명에 기대기보다 동서양 근현대 미술의 대표 이름을 고르게 섞어 놓은 편성이다. 최근 홍콩 경매는 이런 방식으로 움직인다. 서구 현대미술과 아시아 근대미술, 전후 미술을 한 세일 안에 묶어 컬렉터 층을 넓히고, 특정 작가 부진이 세일 전체 분위기를 흔들지 않도록 포트폴리오를 짠다.

장소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크리스티는 이번 봄 경매를 더 헨더슨에서 열었다.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가 설계한 이 건물은 홍콩 금융 중심지 한복판에 들어섰다. 크리스티는 아시아태평양 본부를 이곳으로 옮긴 뒤 대형 세일과 전시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경매사가 거래 공간만 확보하는 데서 나아가 건물 자체를 브랜드 자산으로 활용하는 흐름이 더 선명해졌다는 뜻이다. 작품을 보러 온 관람객은 경매 카탈로그만이 아니라 공간의 분위기, 동선, 서비스, 현장 연출까지 함께 경험한다.

프리뷰 운영 방식도 같은 흐름 위에 놓여 있다. 크리스티는 3월 24일부터 27일까지 이번 세일 출품작을 무료로 공개했다. 일반 관람객이 전시장에 들어와 리히터와 산유, 바스키아 작품을 가까이서 보고 사진을 남기는 동안, 컬렉터와 어드바이저들은 작품 상태와 소장 이력을 확인했다. 한 공간 안에서 관람과 거래 준비가 동시에 진행된 셈이다. 경매장이 더 이상 폐쇄적인 입찰장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은 이런 장면에서 확인된다.

홍콩 아트위크와 맞물린 일정도 효과를 키웠다. 미술관, 갤러리, 아트페어를 찾으러 홍콩에 들어온 인파가 자연스럽게 경매 프리뷰로 이어진다. 경매사는 별도 고객만 상대하는 대신 도시 전체 유동 인구를 자기 행사로 끌어들인다. 작품을 사지 않는 관람객도 현장 사진과 영상, 후기를 온라인에 올리면서 경매 홍보에 참여하게 된다. 고가 미술 거래가 일부 자산가의 닫힌 시장에서 도시 단위 문화 이벤트로 외연을 넓히는 방식이다.

이 지점에서 경매사는 갤러리와 미술관, 럭셔리 브랜드의 기능을 함께 가져간다. 출품작은 판매 대상이지만 동시에 전시물이 되고, 프리뷰는 관람 행사이면서 브랜드 경험의 장이 된다. 에르메스나 샤넬이 플래그십 스토어를 통해 세계관을 보여 주듯, 크리스티도 더 헨더슨이라는 공간을 통해 미술 시장의 권위와 취향을 함께 연출한다. 거래가 이뤄지기 전부터 이미 이미지 경쟁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번 홍콩 세일은 2026년 미술 시장의 한 장면을 비교적 또렷하게 보여 준다. 첫째, 초고가 시장은 여전히 소수 블루칩 작품 중심으로 움직인다. 둘째, 홍콩은 아시아에서 그 작품들을 받아내는 핵심 무대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셋째, 경매사는 작품 판매만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전시, 건축, 도시 행사, 브랜드 경험을 한꺼번에 묶어 시장의 시선을 붙든다.

더 헨더슨에서 열린 이번 세일은 작품 가격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을 남겼다. 리히터의 붉은 추상은 전시장 벽에 걸린 한 점의 그림이었지만, 그 앞에 모인 사람들의 움직임은 지금 미술 시장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 줬다. 홍콩 경매장은 여전히 거래장이다. 다만 2026년의 거래장은 예전처럼 망치 소리만 울리는 공간이 아니다. 전시와 브랜드 행사, 도시 소비가 한데 겹치는 복합 무대로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