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테크②] 리히터·산유·쿠사마에 쏠린 자금…크리스티 홍콩 세일이 드러낸 블루칩 미술의 공식

2026-04-01     임민정 기자
Gerhard Richter "Abstraktes Bild" Leads Christie's Hong Kong Sales. 사진=Christie’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민정기자]홍콩 더 헨더슨에서 열린 크리스티 20·21세기 봄 경매에는 고가 작품이 줄줄이 나왔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1991년작 ‘Abstraktes Bild’ 추정가는 1000만~1300만달러, 산유의 ‘Cheval agenouillé sur un tapis’는 360만~620만달러, 월터 스파이스의 ‘Blick Von Der Höhe’는 620만~870만달러로 책정됐다. 쿠사마 야요이의 ‘Pumpkin’과 장미셸 바스키아 작품도 수백만달러대 추정가를 달고 세일에 올랐다. 이번 홍콩 경매는 미술품이 어디까지나 감상 대상이면서도, 시장에서는 점점 더 선별된 대체자산처럼 거래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줬다.

이번 세일에서 먼저 확인된 것은 자금의 방향이다. 수요는 넓게 퍼지지 않았다. 거래 이력이 드문 리히터, 아시아 시장에서 강한 산유, 작가 최고가 경신 기대가 붙은 월터 스파이스처럼 상위 작가의 대표작에 시선이 집중됐다. 경기 불확실성이 이어질수록 자금은 낯선 이름보다 이미 검증된 작가에게 몰린다. 미술 시장에서도 같은 흐름이 반복된다. 작품의 미술사적 위치, 소장 이력, 희소성이 가격 방어력을 좌우한다는 판단이 강해질수록 블루칩 작가 쏠림은 더 뚜렷해진다.

리히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1991년은 작가가 런던 테이트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 시기와 겹친다. 이번 출품작은 붉은 색면이 강하게 드러나는 추상화이고, 경매 첫 출품이라는 이력도 붙었다. 시장에서는 작품성만이 아니라 공급의 희소성을 함께 본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제작 시기와 색감, 거래 이력에 따라 가격이 크게 갈리는 이유다. 고가 미술 시장에서 가격은 미적 평가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얼마나 드물게 나오느냐, 다시 시장에 언제 나올 수 있느냐가 함께 반영된다.

홍콩이 이런 거래를 받아내는 구조도 여전했다. 미술품 거래에 부가가치세와 관세 부담이 없는 점은 초고가 거래에서 직접 비용을 줄이는 요소다. 보관과 운송, 프라이빗 세일과 경매를 한곳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인프라도 강점이다. 중국 본토와 동남아시아 자금이 모이는 지리적 위치, 오랜 기간 축적된 고객망도 무시하기 어렵다. 싱가포르와 서울이 미술시장 기반을 키우고 있지만, 수백억원대 거래를 연속해서 소화하는 무대는 아직 홍콩이 가장 익숙하다.

이번 세일은 블루칩 미술의 강세만 보여 준 것은 아니다. 시장의 양극화도 함께 드러냈다. 상위 작가 작품에는 자금이 몰리지만, 중간 가격대 작품과 신진 작가 시장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구매자들은 여러 점을 넓게 사기보다 확실한 한 점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흐름이 길어질수록 시장은 더 좁아진다. 외형상 거래 규모는 유지돼도, 실제 유동성은 소수 작가와 소수 작품군에 집중된다.

이 점에서 미술품을 곧바로 안전자산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모든 미술품이 경기 방어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거래가 꾸준하고 수요층이 두꺼운 일부 작가의 대표작만 상대적으로 강한 가격 방어력을 보인다. 반대로 거래 이력이 적거나 수요층이 얇은 작품은 시장 변동성에 더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이번 홍콩 세일은 미술품 전체의 안정성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선별된 블루칩 작품에 자금이 계속 몰리는 구조를 보여 준 장면에 가깝다.

크리스티가 더 헨더슨에서 내놓은 작품 목록은 2026년 미술시장의 공식을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낸다. 첫째, 시장은 넓어지기보다 위로 압축되고 있다. 둘째, 가격은 취향만이 아니라 희소성과 거래 이력, 유동성 기대를 반영해 형성된다. 셋째, 홍콩은 여전히 그 가격이 형성되는 핵심 무대다. 그림값처럼 보이는 숫자 뒤에는 이미 자산시장 언어가 깊게 들어와 있다.

이번 세일을 통해 확인된 사실은 단순하다. 미술품은 여전히 작품이다. 다만 시장은 모든 작품을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리히터와 산유, 쿠사마, 바스키아처럼 이름이 굳어진 작가의 대표작은 점점 더 취향의 대상이 아니라 자금이 몰리는 고가 자산처럼 거래된다. 2026년 홍콩 경매장은 그 흐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