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AI가 대신 못 하는 것, 리히터의 붉은 추상이 남긴 값

2026-03-31     임민정 기자
Gerhard Richter "Abstraktes Bild" Leads Christie's Hong Kong Sales. 사진=Christie’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민정기자]홍콩 더 헨더슨 전시장 벽에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붉은 추상이 걸렸다. 크리스티가 3월 말 연 20·21세기 봄 경매의 대표 출품작이다. 사람들은 가격표만 보고 지나가지 않았다. 화면 가까이 다가가 물감이 밀린 자국을 보고, 몇 걸음 물러서 붉은 층이 어떻게 겹쳐 있는지 다시 살폈다. 사진과 영상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작품인데도, 사람들은 굳이 현장에 와서 실제 캔버스를 확인했다. 2026년 미술 시장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장면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기술은 이미 시장 깊숙이 들어와 있다. 작가별 거래 기록은 더 촘촘해졌고, 진위 판정과 상태 분석도 훨씬 정밀해졌다. 경매사와 컬렉터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손에 쥐고 움직인다. 그런데도 마지막에는 늘 사람이 남는다. 리히터의 1991년작 한 점에 얼마를 써낼지, 지금 사야 할지, 이 작품을 자기 컬렉션의 중심에 둘 수 있을지는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사람의 판단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고가 미술 시장에서 비싼 것은 작품만이 아니다. 그 작품을 읽는 안목에도 값이 붙는다. 리히터의 이번 출품작이 왜 주목받는지 설명하려면 작가 이름만으로는 부족하다. 1991년이라는 제작 시기, 붉은 색면의 희소성, 첫 경매 출품이라는 이력, 리히터 시장의 위치가 함께 붙어야 한다. 가격표는 숫자 한 줄이지만, 그 숫자를 납득시키는 과정은 결국 사람의 언어로 이뤄진다. 기술이 자료를 정리할 수는 있어도, 그 자료를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묶는 일까지 대신하지는 못한다.

실물을 보는 경험도 다시 비싸지고 있다. 화면 속 이미지가 넘칠수록 실제 작품 앞에 서는 일은 더 드문 경험이 된다. 리히터의 추상은 사진으로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마주하면 색의 깊이와 표면의 마찰, 화면 크기에서 오는 압박감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더 헨더슨에서 열린 무료 프리뷰에 사람들이 몰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디지털 이미지가 아무리 선명해져도 실제 캔버스가 주는 물성은 대체되지 않는다. 디지털이 넓어질수록 실물의 값이 같이 올라가는 셈이다.

이번 홍콩 세일은 감정이 어떻게 가격으로 옮겨가는지도 보여 줬다. 컬렉터가 리히터나 산유, 바스키아를 사는 이유를 수익률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름이 굳어진 작가의 대표작을 갖는 만족감, 자기 취향을 시장 안에서 확인하는 감각, 이미 미술사 안에 자리를 잡은 작품을 자기 공간으로 들여놓는 기분이 함께 움직인다. 미술 시장은 원래 숫자와 감정이 겹치는 자리였지만, 최근에는 그 결합이 더 또렷해졌다. 가격이 높을수록 사람들은 더 냉정하게 계산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 장면도 적지 않다. 마지막 결정은 종종 가장 개인적인 확신에서 나온다.

크리스티의 방식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번 홍콩 경매는 작품만 내놓지 않았다. 더 헨더슨이라는 새 공간, 무료 프리뷰, 대중 관람과 VIP 응대가 겹치는 동선, 작품마다 붙은 긴 설명이 함께 움직였다. 경매사는 더 이상 낙찰만 기다리는 회사가 아니다.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느끼고, 가격을 받아들이는 과정 전체를 설계한다. 고가 시장일수록 숫자만으로는 부족하고, 숫자를 둘러싼 분위기와 설명, 공간의 경험까지 함께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6년 미술 시장의 역설은 분명하다. AI와 데이터가 시장을 더 정교하게 만들수록, 마지막에 남는 것은 더 인간적인 요소들이다. 안목, 감정, 실물 경험, 설명의 힘 같은 것들이다. 기술은 가격을 계산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가격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까지 맡지는 못한다.

리히터의 붉은 추상 앞에 사람들이 멈춰 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그림은 비싼 작품이어서만이 아니라, 화면 위에 남은 인간의 흔적을 한눈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 2026년의 아트마켓은 점점 더 기술을 닮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서 끝내 값을 정하는 것은 계산이 아니라 사람 쪽에 남아 있다. 홍콩 경매장은 그 단순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드러낸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