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트렌드①] 바늘을 지운 자리, 다이얼이 앞으로 나왔다…베다 ‘앵글스 기쉐’가 보여준 2026 시계의 새 표정
시간의 확인보다 ‘장면의 감상’에 집중한 파격적 설계… 디자인 실험의 정점을 찍다
[KtN 임우경기자]시간을 빨리 읽게 하는 시계는 아니다. 대신 손목 위에서 무엇을 먼저 보게 할 것인지, 그 시선의 순서를 완전히 바꿔 놓는다. 팔각 케이스와 이중 창(Guichet), 24시간 해·달 표시가 만난 베다(Veda)의 ‘앵글스 기쉐’는 시계의 본질인 시간 확인보다 물건의 표정을 세우는 일에 더 공을 들였다.
팔각 케이스 안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침도 분침도 아니다. 모서리를 또렷하게 세운 베젤 아래로 세로 결이 촘촘히 눌린 기요셰(Guilloché) 금속판이 깔려 있고, 그 위에 반원형 창 두 개가 겹치듯 놓였다. 위쪽 창에는 긴 호를 따라 숫자가 움직이고, 아래쪽 창에는 5분 단위 숫자가 짧게 돈다. 다이얼을 읽는 행위가 바늘 끝을 좇는 추적에서 닫힌 면 위에 난 틈을 해석하는 순서로 전이된 셈이다. 시간을 보여주는 방식보다 시간을 보게 만드는 방식에 집중한 설계다.
이번 신작은 베다의 대표 라인인 앵글스 컬렉션 안에서 처음으로 기쉐, 곧 창을 통해 시간을 읽는 구조를 전면에 내세운 모델이다. 기존 앵글스가 팔각 케이스의 비례와 단정한 다이얼 구성을 앞세웠다면, 이번 모델은 같은 케이스 안에 회전 디스크와 이중 창을 들여 인상을 완전히 전복시킨다. 전통적인 시계 문법으로는 표시 방식의 변경에 가깝지만, 실제 손목 위 존재감은 그보다 훨씬 강력하다. 시간을 가리키는 판에서 시간을 숨겨 놓은 판으로 다이얼의 성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리적 제원은 철저히 드레스워치의 규격을 따른다. 케이스 지름 37mm, 두께 6.3mm의 슬림한 실루엣을 갖췄다. 소재는 316L 스테인리스 스틸이며 실버와 금도금 두 버전으로 나뉜다. 케이스는 단순한 평면이 아닌 3단계 적층 구조로 입체감을 살렸고, 다이얼을 덮는 금속판의 세로 홈은 전용 가죽 스트랩의 무늬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케이스와 다이얼, 스트랩이 분절되지 않고 하나의 표면처럼 매끄럽게 수렴되는 구성이다. 가격은 약 2,249달러 선이며, 오는 2026년 4월 정식 출시를 예고했다.
시간 표시 방식은 더욱 생경하다. 상단 창은 일반적인 12시간 체계가 아닌 24시간 주기의 디스크를 채택해 낮과 밤의 흐름을 다이얼 안으로 투영한다. 해와 달을 형상화한 표시가 숫자 곁을 지나며 하루의 리듬을 시각화한다. 하단 분 표시 역시 바늘 대신 5분 단위 회전 디스크를 썼다. 내부에는 수동 ETA 7001 계열 무브먼트를 바탕으로 기어 트레인을 손본 장치가 들어갔으며, 시 디스크의 속도를 절반으로 늦춰 24시간 주기를 구현했다. 바늘을 걷어낸 다이얼의 낯선 얼굴은 이처럼 익숙한 기계 구조를 비틀어 얻어낸 결과물이다.
기계식 시계에서 바늘을 없애는 결정은 중대하다. 다이얼의 인상은 바늘의 존재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앵글스 기쉐는 그 바늘을 덜어냄으로써 표면의 질감과 금속의 결을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시계를 읽는 행위보다 바라보는 행위가 선행되는 구조다. 이런 측면에서 이 모델은 실용 시계의 연장선이라기보다 디자인 실험에 가깝다. 바늘 없는 다이얼이 주는 낯섦은 단순한 의장이 아니라 제품 전체를 관통하는 설계 원리다.
브랜드 운영 측면에서도 주력 모델의 뼈대는 유지하되 문법만 교체하는 영리한 전략을 택했다. 37mm 팔각 케이스와 얇은 비례, 층을 준 옆면 구조는 그대로 두고 시간을 읽는 방식만 갈아 끼웠다. 컬렉션의 정체성은 지키되 얼굴은 새로 만든 셈이다. 이는 제품의 첫인상이 디지털 화면을 통해 먼저 소비되는 오늘날 강력한 경쟁력이 된다. 팔각의 윤곽과 기요셰 다이얼, 중첩된 반원형 창이 만드는 이미지는 사진 한 장으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물론 직관적인 시계는 아니다. 24시간 디스크와 5분 단위 분 창은 익숙한 체계에 비해 한 번 더 ‘해석’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찰나에 시각을 파악해야 하는 비즈니스 현장이나 바쁜 일상에서는 불편함이 따를 수밖에 없다. 보기 좋은 화면과 읽기 쉬운 화면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 시계는 솔직하게 드러낸다.
결국 앵글스 기쉐는 모든 상황에 대응하는 도구가 아니라, 특정 장면과 옷차림을 위해 선택되는 오브제임을 명확히 한다. 수동 무브먼트의 채택 역시 매일 태엽을 감는 수고를 기계와의 교감으로 받아들이는 사용자에게는 매력이겠으나, 편의성을 우선하는 이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된다. 시계를 조형물로 받아들이는 소비자에게는 이 낯선 방식 자체가 구매 이유가 되지만, 기능의 분명함을 우선하는 이들에게는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2026년 시계 시장에서 앵글스 기쉐가 보여주는 방향은 선명하다. 시간을 재는 도구에서 시간을 연출하는 물건으로 기계식 시계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워치가 편의성을 독점한 시대에 기계식 시계는 기능의 확장이 아닌 감상의 순서를 변경함으로써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바늘을 지운 자리에는 공백이 아닌, 시간을 읽는 동작을 한 박자 늦추는 새로운 문법이 남았다. 보기에는 인상적이고 쓰기에는 까다롭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시계는 아니지만, 지금 시계 시장이 어떤 얼굴을 내세우려 하는지는 이 한 점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