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asso in Daegu①] 거장의 숨결, 달구벌의 봄을 깨우다…대구서 열린 180일의 피카소 전시
봉무동 바라크나눔갤러리에서 8월 31일까지 이어지는 ‘피카소 인 대구’ 특별전 최상희 꾸바아트센터 총괄이사 “서울에 몰린 전시 기회, 지역으로 넓혀야”
[KtN 박준식기자]2026년 3월, 대구 동구 봉무동에 피카소 전시가 들어섰다. 태왕아너스타워 2층 바라크나눔갤러리에서 3월 6일 막을 올린 ‘피카소 인 대구: 피카소와 세계 마스터피스’는 8월 31일까지 이어진다. 유화와 판화, 드로잉, 1959년 스케치북까지 한자리에 모은 이번 전시는 서울 중심으로 굳어진 국내 전시 흐름에서 한발 비켜 서 있다. 대형 미술관과 예술의전당이 아닌, 대구 동구의 신생 공간에서 피카소 특별전이 180일 일정으로 열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역 문화계에는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에서 피카소 같은 거장의 전시는 오랫동안 수도권의 몫에 가까웠다. 서울의 대형 미술관이나 굵직한 기획전 무대가 아니면 접하기 어려웠고, 지방 관람객은 시간을 내 기차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거리와 시간, 비용이 전시 관람의 조건이 되는 구조가 오래 이어졌다. 대구 봉무동에서 시작된 이번 전시는 그런 흐름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신생 갤러리가 세계 미술사의 거장을 전면에 내세워 장기 일정으로 전시를 운영한다는 점에서다. 지역에서도 충분히 수준 높은 전시를 열 수 있고, 세계적 작가의 작품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제 공간으로 옮긴 셈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유화와 판화, 드로잉이 먼저 시선을 끈다. 오래 발길을 붙드는 대목은 1959년 스케치북 공개다. 완성된 회화 뒤에 놓여 있던 밑그림의 시간, 한 장의 종이 위에서 형태가 달라지고 구도가 바뀌는 과정을 한 권 안에서 따라갈 수 있다는 점에서 전시의 결이 또렷해진다. 익숙한 이름으로만 남아 있던 피카소를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다시 만나는 자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작품을 보는 전시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작품이 태어나는 장면까지 들여다보게 하는 구성이 전시장 전체의 밀도를 끌어올린다.
전시 실무를 총괄한 최상희 꾸바아트센터 총괄이사는 이번 기획의 출발점을 수도권에 집중된 전시 구조에서 찾았다. 최 총괄이사는 “그동안 대형 전시는 수도권에 많이 몰려 있었다”며 “지방에 계신 분들도 세계적인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대구 전시를 시작으로 주변 지역에 계신 분들도 작품을 감상하고 미술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최 총괄이사의 시선은 전시 한 편을 성사시키는 데 머물지 않는다. 지역에서도 세계적 전시를 일상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이번 프로젝트 바탕에 놓여 있다. 미술은 멀고 어렵다는 선입견을 덜어내고, 가족 단위 관람객과 청소년, 지역 시민이 생활권 안에서 자연스럽게 작품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최 총괄이사는 “미술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완성했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 이해의 폭도 더 넓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피카소라는 이름의 무게를 앞세우기보다 작품 앞에 오래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먼저라는 설명이다.
전시장 중심에 놓인 피카소 스케치북은 피카소가 1955년 11월 20일부터 1956년 1월 3일까지 작업한 원본 스케치북을 바탕으로 제작된 파시밀리 포트폴리오다. 전 세계 1000부 한정으로 제작됐고, 프랑스산 특수 종이에 콜로타이프 공법을 적용해 원본의 연필선과 질감, 색의 농담을 최대한 살렸다. 유실된 한 페이지를 대신해 1959년 파리에서 인쇄된 컬러 석판화가 삽입된 점도 눈길을 끈다. 텍스트 페이지와 컬러 일러스트 페이지가 한 권 안에 묶여 있어 피카소의 작업 흔적을 압축해 보여준다. 완성된 작품 한 점 앞에서 감탄하는 경험과는 전혀 다른 층위의 관람이 여기서 시작된다.
스케치북이 주는 감동은 진품 유화와 방향이 다르다. 유화가 결과라면 스케치북은 결과에 이르는 시간에 가깝다. 여인의 얼굴 각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선의 방향과 비례가 바뀌며, 화면 안의 중심이 옮겨가는 과정이 한 장 한 장 남아 있다. 최 총괄이사는 전시장 설명 과정에서 완성된 그림이 나오기 전에 스케치북에 시험 삼아 그린 작업이라고 소개했다. 한 장의 종이 앞뒤에 서로 다른 그림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액자에 걸린 완성작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손의 망설임과 선택, 밀고 당기는 수정의 흔적이 종이 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관람객은 거장의 완성된 얼굴보다 먼저, 작업실 안에서 움직였던 손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전시 구성은 피카소를 한 가지 이미지로 고정하지 않는다. 유화는 묵직한 밀도로 화면을 붙잡고, 판화는 선과 면의 압축된 긴장을 드러내며, 드로잉은 빠른 호흡과 즉각적인 감각을 전달한다. 여기에 스케치북이 더해지면서 전시장은 결과와 과정이 한 공간 안에서 맞물리는 구조를 갖게 된다. 이미 미술사에서 굳어진 이름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한 작가가 어떻게 형상을 세우고 지우고 다시 옮겨 갔는지를 좇는 시간이 된다. 익숙한 거장의 명성보다 작업의 움직임이 먼저 보인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관람객의 눈을 다른 자리로 데려간다.
봉무동 바라크나눔갤러리가 신생 공간이라는 점도 전시를 더 주목하게 만든다. 규모가 크지 않은 새 공간이 피카소 특별전으로 출발선을 끊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역 문화계에는 묵직한 자극이다. 지역 문화 공간이 소규모 행사나 생활 전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 미술사의 거장을 앞세운 장기 프로젝트까지 감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구가 산업도시 이미지로 먼저 불려 왔다면, 이번 전시는 봉무동 한복판에 다른 얼굴을 덧붙인다. 공장과 도로, 물류와 상업시설로 채워진 도시의 결 위에 미술 전시의 시간을 올려놓는 일이다. 피카소 전시가 대구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전시 한 편의 성사를 넘어 지역 문화 지형의 폭을 넓히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최 총괄이사는 전시 공간 운영과 함께 예술을 둘러싼 확장 계획도 함께 그리고 있다. 대구 전시를 마친 뒤 하노이와 두바이 등으로 흐름을 잇는 구상도 내놓았다. 작품 감상을 넘어 미술품 가치 평가와 자산 관리, 유통의 신뢰를 어떻게 넓혀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병행하고 있다. 다만 이번 기사에서 먼저 눈여겨볼 대목은 대구라는 출발점이다. 해외 확장 계획보다 앞서 지역에서 세계적 전시를 안착시키는 일, 서울이 아닌 도시에서도 관람 수요와 전시 운영이 선순환을 이룰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우선이다. 봉무동 전시장은 그 실험이 시작된 자리다.
전시 현장에는 나눔이라는 이름도 함께 걸려 있다. 바라크나눔갤러리는 전시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내걸고 출발했다. 거장의 이름을 내건 전시가 상업적 행사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역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지 가늠해 보겠다는 운영 방향이다. 지역 문화 공간의 역할을 단지 작품을 거는 데서 끝내지 않고, 지역과 다시 관계를 맺는 방식까지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선이 머문다. 전시장이 문화 소비의 장소에 그치지 않고 지역 안에서 또 다른 순환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역시 이번 일정이 지켜볼 대목이다.
180일 동안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작품 수나 이름값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유화와 판화, 드로잉, 스케치북이 한자리에 놓이면서 피카소라는 이름의 무게보다 먼저 작업의 시간과 흔적이 드러난다. 서울 밖에서 열린 피카소 전시가 지역 관람 문화의 폭을 어디까지 넓힐 수 있을지, 신생 공간이 거장전을 어떻게 자기 방식으로 운영할지, 8월 31일까지 이어질 일정이 그 장면을 차례로 보여줄 전망이다. 대구 봉무동에서 시작된 이번 전시는 거장의 명성을 옮겨놓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지역에서 세계적 전시를 열고, 시민이 생활 가까이에서 예술을 만나는 풍경을 만드는 일까지 함께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