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②] 베트남 땅속에 묻혔던 피카소 기록, 쯔엉 가문을 거쳐 다시 나왔다
파리 작업실에서 시작된 인연, 베트남의 혼란기를 지나 살아남은 스크랩북의 내력 평화와 교육, 세 가지 양식의 중요성까지…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이 붙든 예술의 기준
[KtN 박준식기자]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의 이야기는 작품 가격이나 시장 평가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출발점은 가족사였다. 이름 한가운데 들어간 피카소는 장식이 아니었다. 집안이 오래 지켜 온 기록의 무게였고, 화가로 살아온 삶의 방향이었다.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은 스크랩북을 소장품으로만 말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시작된 인연, 베트남으로 옮겨진 자료, 감춰 두어야 했던 시간, 다시 꺼내 든 뒤의 삶까지 한 줄로 이었다. 스크랩북의 내력은 곧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이 피카소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설명의 뿌리는 프랑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안의 대부는 파리에서 피카소 가까이 지낸 인물이었다. 남프랑스와 북프랑스를 오가며 작업하던 시기의 피카소 곁을 지켰고, 작업실 일을 도우며 생활 주변을 드나들었다는 기억이 집안에 남아 있다. 먼발치에서 경탄하던 숭배자의 자리가 아니었다. 작업실의 공기와 일상의 움직임이 함께 흐르던 자리였다.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이 들려준 피카소는 미술관 벽에 걸린 거장보다, 곁사람들이 숨결을 느끼며 지켜본 화가에 가까웠다.
대부와 피카소의 인연은 그림과 자료의 형태로 이어졌다. 작업실 안팎에서 오간 이미지와 기록이 쌓였고, 마음에 남은 작업은 따로 간직됐다고 한다. 사진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림과 스케치는 생활의 순간을 붙드는 방식이기도 했다. 스크랩북은 처음부터 시장에 내놓을 상품으로 묶인 책이 아니었다. 가까운 관계 속에서 오가던 기록이었고, 한 시대의 작업과 시간이 겹쳐 남은 책이었다. 작품 한 점의 값보다 중요한 것은 축적의 방식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리한 도록이 아니라, 곁에 두고 넘기며 시간을 쌓은 기록물이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자료는 베트남으로 옮겨졌다. 베트남의 혼란기는 스크랩북의 운명을 바꿨다. 서구 문화와 예술을 자유롭게 드러내 놓기 어려운 시절이 이어졌고, 집안은 피카소 관련 자료를 안전하게 보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잡지와 물건, 옷의 장식까지 통제와 검열의 대상이 되던 시기였다. 피카소라는 이름은 자랑스럽게 내놓을 유산이면서 동시에 숨겨야 살아남는 흔적이기도 했다. 집안이 택한 방식은 드러내 놓지 않는 보존이었다. 꺼내어 자랑하는 대신 땅속에 묻어 지키는 길이었다.
스크랩북과 자료는 오랜 시간 흙 아래 머물렀다. 불태울 수는 없었고, 버릴 수도 없었다. 언젠가 다시 꺼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하나로 기록을 묻어 둔 셈이다. 전쟁과 정치적 긴장, 생활의 불안이 겹친 시간이었다. 종이와 그림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오래 눌려 있었다. 스크랩북의 값어치는 여기서 더 커진다. 오래된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귀한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숨어 있어야 했던 책이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일 자체가 곧 보존의 역사였다. 피카소의 작업을 담은 기록은 그렇게 베트남 땅속에서 긴 침묵을 견뎠다.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계기도 가족사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새 집을 짓는 과정에서 자료를 다시 발견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묻힌 기록이 집안의 기억을 따라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오래 눌려 있던 자료가 다시 손에 들어온 순간,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은 발견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고 말한다. 인터뷰 곳곳에 행복과 축복이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집안이 지켜 낸 시간과 피카소라는 이름이 한순간에 현재로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스크랩북을 향한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분명하다. 책은 수집품이기 전에 살아남은 가족사였다.
스크랩북은 현재의 예술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은 요즘 작가들이 한 가지 양식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거듭 말했다. 진정한 화가가 되려면 적어도 세 가지 방향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현대미술, 구상, 추상으로 읽히는 설명이 이어졌고, 추상 역시 의미를 품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었다.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려는지 분명해야 하며, 그림에는 설명 가능한 내용과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이 보는 피카소는 바로 그런 작가였다. 한 가지 형식에 갇히지 않았고, 여러 시기와 여러 재료를 건너가면서도 작업의 중심을 놓치지 않았다는 의미다.
스크랩북의 구성은 그런 생각과 정확히 맞물린다. 1903~1904년 ‘늙은 기타 리스트’, 1904년 ‘거리의 노인’과 ‘과부 여성’, 1940년 ‘세 여자와 황소’, 1946년 ‘평화의 비둘기’, 1953년 ‘팔로마의 초상’, 1956년 ‘기타’와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 ‘꽃병을 든 정물화’가 한 흐름 안에 들어 있다. 인물과 상징, 가족과 정물, 종이 위 연필과 종이 위 유화, 캔버스 위 유화가 나란히 놓였다.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이 말한 세 가지 양식의 필요는 막연한 훈계가 아니다. 피카소가 한 생애 동안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지 곁에서 보여 주는 자료를 오래 붙든 끝에 나온 생각이다. 한 사람의 작업을 이루는 것은 한 가지 정답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이동과 축적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인터뷰에서 자주 돌아온 또 하나의 단어는 평화였다.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바람,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소망이 여러 차례 나왔다. 예술이 베트남과 한국,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과도 맞닿는 대목이다.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에게 피카소는 미술 시장의 상징만이 아니었다. 전쟁과 갈등을 넘어 사람들 사이를 잇는 언어에 가까웠다. 작품을 들여다보는 이유 역시 희소성과 소유의 만족에만 머물지 않았다. 새와 비둘기, 평화를 연상시키는 형상에 오래 시선을 두는 이유도 같은 자리에서 읽힌다. 거장의 이름을 화려한 명성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사람을 잇고 전쟁의 반대편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교육에 대한 생각도 분명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발견해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바깥으로 나가 배우고, 삶을 직접 겪고, 경험을 그림 속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학생과 역사, 미래를 함께 말하는 대목도 눈에 남는다. 어린 세대가 활동과 기억을 오래 간직해야 하고, 예술은 그런 기억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스크랩북이 오래된 과거의 유물에 머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시대의 기록인 동시에 다음 세대가 꺼내 읽을 수 있는 교재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이 스크랩북을 화실 가까이에 두고 말하는 까닭도 같은 자리에서 이해된다. 지나간 시간을 보관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지금 배우고 그리는 사람들에게 다시 쓰이게 하는 일이다.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의 삶에서 피카소는 박제된 우상이 아니다. 파리 작업실과 베트남의 혼란기, 묻혀 있던 기록과 다시 꺼낸 책, 평화를 향한 바람과 젊은 작가들에게 건네는 조언까지 모두 현재형으로 이어지는 이름이다.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이 지켜 온 대상도 유명한 성씨가 아니다. 피카소를 만든 시간의 흔적이다. 종이와 연필, 유화와 스케치, 인물과 상징, 가족과 새가 한 권 안에 겹쳐 있는 긴 시간을 오래 보존해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셈이다. 소장자의 자리보다 화가의 자리가 더 먼저 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름 속의 피카소는 과시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에 가깝다.
파리에서 시작된 인연은 베트남을 거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집안의 대부가 곁에서 지켜본 화가의 시간, 땅속에 묻혀 버텨야 했던 기록, 다시 발견된 뒤 새로운 세대 앞에 놓인 스크랩북은 한 편의 가족 연대기이자 생존의 기록이다. 데이비드 피카소 쯔엉이 스크랩북을 지켜 온 이유, 젊은 작가들에게 여러 양식과 더 넓은 경험을 말하는 이유, 평화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한곳으로 모인다. 예술은 한 점의 그림으로 끝나지 않고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바꿔 놓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피카소 스크랩북은 그런 믿음을 품은 채 지금도 살아 있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