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l Sander②]거울·장갑·예약…질 샌더 ‘서가’, 읽기보다 연출이 앞섰다
반사 중심 공간·시간 제한 운영…일반 독서 환경과 거리 책은 전면에 놓였지만 열람 조건은 전시 형식에 가까워
[KtN 임우경기자]질 샌더가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 선보이는 ‘Reference Library’는 책을 중심에 둔 설치다. 전시장에는 크롬 렉턴이 놓이고, 각 렉턴 위에는 조명이 비친다. 뒷벽은 거울로 마감된다. 책 한 권씩을 분리해 세우는 방식이다. 질 샌더는 이 구성을 느린 독서와 집중, 물성을 위한 자리로 설명했다. 그러나 공개된 공간 설명과 운영 방식만 놓고 보면, 이 전시는 책을 읽는 자리보다 책을 둘러싼 장면을 만드는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일반적인 열람 공간과 가장 먼저 갈리는 지점은 배열 방식이다. 도서관이나 서가는 비슷한 주제나 형식의 책을 한데 모으고, 독자가 여러 권 사이를 오가며 오래 머물 수 있게 짜인다. 책장을 넘기고, 다른 책을 꺼내 비교하고, 한 자리에서 계속 읽는 흐름이 기본이다. 반면 질 샌더의 전시는 책을 개별 오브제로 분리해 조명 아래 세운다. 여러 권이 연결된 독서의 흐름보다 한 권 한 권이 시선의 대상이 되는 방식이다. 서가라기보다 진열에 가깝다.
공간 재료도 독서 환경과는 성격이 다르다. 크롬은 빛을 반사하고, 거울은 시선을 되돌린다. 금속과 반사면은 패션 쇼룸이나 설치 작업에서는 강한 효과를 내지만, 텍스트를 오래 따라가는 자리에서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독서는 보통 안정된 시선과 균일한 조도, 오래 머물 수 있는 리듬을 필요로 한다. 반사와 대비가 강한 환경에서는 책의 문장보다 공간의 표면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쉽다. 이번 전시는 책을 읽기 위한 환경을 만드는 대신, 책이 놓인 모습을 또렷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거울 벽면은 특히 상징이 분명하다. 거울은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하고 장면의 밀도를 높인다. 동시에 관람객의 모습을 공간 안으로 끌어들인다. 책을 읽는 행위는 본래 텍스트 안으로 시선을 밀어 넣는 경험에 가깝다. 그런데 거울이 있는 공간에서는 시선이 다시 바깥으로 나온다. 책을 읽는 사람은 텍스트 앞의 독자가 아니라 장면 속 인물로 놓이기 쉽다. 이번 전시가 말하는 ‘집중’과 실제 공간 언어 사이에 간격이 생기는 대목도 여기다. 텍스트에 잠기는 자리보다, 텍스트를 대하는 몸짓이 드러나는 자리에 더 가깝다.
조명 방식도 비슷하다. 독서등 아래 한 권씩 놓인 책은 분명 눈에 잘 들어온다. 그러나 그 효과는 열람보다 전시에 가깝다. 한 권의 책을 자세히 보기 위한 조명인 동시에, 그 책을 오브제로 보이게 하는 조명이기 때문이다. 여러 권을 나란히 두고 넘겨 보는 독서의 흐름보다는 한 권 앞에서 멈추고 바라보는 관람의 흐름이 먼저 만들어진다. 책장을 따라 움직이는 서가의 리듬보다, 스폿라이트 아래 놓인 대상의 리듬이 앞에 선다.
운영 방식도 같은 방향으로 짜였다. 이번 전시는 사전 등록제로 운영되고 시간당 60개 슬롯이 열린다. 입장은 정해진 시간 안에서 이뤄진다. 이 방식은 접근을 통제하고 공간의 밀도를 관리하는 데는 효과적이다. 다만 라이브러리라는 말이 주는 감각과는 다르다. 서가는 원래 들어가고, 머물고, 꺼내 보고, 다시 돌아오는 자율성을 전제로 한다. 등록제와 시간 제한은 그 자율성을 줄이고, 체험의 순서를 정해 놓는다. 관람객은 머무는 사람보다 배정된 시간 안에 통과하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흰 장갑도 전시의 성격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질 샌더는 장갑을 제공하고, 관람객은 이를 착용한 뒤 책을 만지게 된다. 겉으로 보면 귀한 책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방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종이 자료를 다룰 때 장갑이 언제나 적절한 것은 아니다. 손끝 감각이 둔해지면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워지고, 얇은 종이에 힘이 잘못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흰 장갑은 단순한 보호 장치라기보다, 책을 대하는 행위를 하나의 의식으로 바꾸는 장치에 가깝다. 책을 읽는 손보다 책을 다루는 몸짓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장갑과 예약, 반사면과 조명이 한데 놓이면 전시의 구조는 더 분명해진다. 책은 중심에 놓였지만, 열람 조건은 독서실보다 전시장에 가깝다. 관람객은 책 앞에 오래 앉아 읽기보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방식으로 책을 마주하게 된다. 전시의 경험은 텍스트를 따라가는 흐름보다 공간 안에서 책을 대하는 순서와 태도를 따라가게 된다. 읽기의 경험이 넓어지기보다, 읽기의 장면이 정교하게 설계되는 셈이다.
큐레이션 정보의 공개 수준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질 샌더는 참여자 명단을 공개했다. 건축가, 디자이너, 예술가, 음악가, 영화감독 등 여러 분야 인사가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개별 도서 목록과 선정 이유, 60권을 묶는 기준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어떤 책이 놓이는지보다 누가 한 권을 골랐는지가 먼저 알려졌다. 이 경우 관람객이 서가에서 만나게 될 내용은 뒤로 밀리고, 참여자 명단이 전시의 앞면을 차지하게 된다. 서가의 밀도보다 명단의 무게가 먼저 읽히는 구조다.
이 전시를 단순히 형식적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패션 브랜드들은 오래전부터 제품 설명보다 공간과 분위기, 형식과 태도를 앞세워 왔다. 쇼룸은 판매 공간이면서 동시에 브랜드의 성격을 보여주는 무대가 됐다. 질 샌더 역시 그 흐름 안에 있다. 이번 전시도 책을 읽히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책을 통해 브랜드의 표정을 보여주는 자리로 기획됐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럴수록 책은 내용과 형식을 함께 요구받는다. 어떤 책인지, 왜 그 책인지, 어떻게 읽히는지가 함께 나와야 한다.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은 다른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참여자 이름은 또렷하고 공간 설명은 선명하다. 운영 방식도 구체적이다. 반면 책 목록과 선정 이유, 열람의 실제 조건은 뒤에 남아 있다. 책은 전시의 중심 소재이지만, 공개된 정보만 놓고 보면 책보다 책을 둘러싼 형식이 먼저 움직인다. 서가가 어떤 생각으로 묶였는지보다, 서가가 어떤 모습으로 연출되는지가 먼저 알려진다.
질 샌더가 밀라노 쇼룸에 세운 것은 60권의 책이다. 그러나 그 60권이 만드는 경험은 아직 독서보다 전시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반사되는 벽, 금속 구조, 시간 제한, 흰 장갑, 공개되지 않은 목록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책을 앞세운 자리이지만, 책을 읽는 환경과는 거리가 있다. 이번 설치는 서가를 만들었지만, 그 서가는 우선 전시 공간의 질서를 따른다. 읽는 시간보다 바라보는 시간이 먼저 배치된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