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트렌드③] 리모컨 켜면 승부 끝난다…미국 스트리밍 시장 새 권력은 TV 첫 화면

2026-04-07     전성진 기자
APEC 현장, 콘텐츠가 외교의 언어로 등장.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전성진기자]미국 안방에서 벌어지는 스트리밍 경쟁은 더 이상 앱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승부는 리모컨을 켜는 순간 시작된다. TV 화면 맨 앞줄에 어느 서비스가 뜨는지, 무료 채널이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 추천 목록 맨 위에 어떤 프로그램이 걸리는지가 시청 시간을 갈라놓는다. 넷플릭스와 디즈니+, 맥스, 파라마운트+가 치열하게 경쟁해도 이용자 손가락이 닿기 전 단계의 문턱을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미국 스트리밍 시장에서 TV 운영체제, 이른바 TV OS 사업자가 새 권력으로 떠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때 스트리밍 시장의 힘은 콘텐츠 회사에 있었다. 어떤 스튜디오가 강한 프랜차이즈를 갖고 있는지, 어느 플랫폼이 새 시리즈와 영화를 더 빨리 쏟아내는지가 중심 화두였다. 지금 시장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용자가 무엇을 볼지 고르기 전, 어느 화면에서 어떤 순서로 콘텐츠를 보여줄 것인가. 이 첫 관문을 장악한 사업자가 로쿠와 아마존 파이어 TV, 구글 안드로이드 TV, 삼성과 LG의 스마트TV 플랫폼이다. 이들은 단순한 기기 운영회사가 아니다. 미국 미디어 시장에서는 사실상 편성권과 유통권, 광고 노출권을 함께 쥔 문지기에 가깝다.

미국 시청자의 콘텐츠 소비가 거실 TV 중심으로 굳어지면서 이들의 힘은 더 세졌다. 모바일 화면에서는 이용자가 직접 앱을 찾아 들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TV 화면은 다르다. 홈 화면 배열과 추천 목록, 기본 탑재 앱, 음성 검색, 자동 재생 예고편이 시청 흐름을 먼저 잡는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작품을 잘 만드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어느 위치에 앱을 올릴 수 있는지, 기본 탑재가 가능한지, 검색 결과와 추천 목록에서 얼마나 앞줄을 차지하는지가 실제 시청량과 광고 매출에 직결된다. 미국 스트리밍 시장이 콘텐츠 경쟁에서 플랫폼 경쟁으로 넘어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장면을 두고 하는 말이다.

TV OS의 힘은 화면 배열에만 있지 않다. 추천 알고리즘과 검색 경로를 쥔다는 점이 더 크다. 이용자는 리모컨으로 몇 번 넘기다 보이는 콘텐츠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어떤 프로그램이 먼저 노출되는지, 무료로 볼 수 있는 채널이 앞에 서는지, 유료 구독 서비스가 눈에 띄는 위치를 차지하는지가 시청 시간을 바꾼다. 콘텐츠 회사들은 예고편과 포스터, 프로모션 배너를 만들지만, 마지막 문은 TV OS 사업자가 연다. 같은 작품이라도 어느 홈 화면에 어떻게 걸리느냐에 따라 도달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미국 미디어 업계가 TV OS를 새 유통 권력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 있다. 예전 케이블 시대에는 채널 번호와 편성표가 중요했다. 스트리밍 시대로 넘어오면서 앱과 구독료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앱 바깥에서 다시 권력이 움직이고 있다. 로쿠와 파이어 TV, 안드로이드 TV, 스마트TV 플랫폼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콘텐츠 발견의 질서를 짜는 주체가 됐다. 어느 서비스를 처음 열게 만들지, 어느 프로그램을 검색 결과 위에 띄울지, 이용자에게 무료 채널을 먼저 권할지 유료 서비스를 먼저 밀어줄지를 결정할 수 있다. 미국 시장에서 말하는 ‘디스커버리 권력’은 바로 이 발견의 질서를 쥔 힘이다.

여기에 무료 광고 기반 스트리밍, FAST가 붙으면서 판은 더 커졌다. 플루토TV와 투비, 삼성 TV 플러스, 로쿠 채널은 이미 미국 시장에서 익숙한 이름이 됐다. 이들 서비스가 강한 이유는 공짜라서만이 아니다. TV 홈 화면과 자연스럽게 붙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별도 앱을 깔지 않아도 되고, 검색을 길게 할 필요도 없다. TV를 켜면 바로 보이고, 곧바로 재생된다. 이용자 입장에서는 진입 장벽이 낮고, 사업자 입장에서는 광고를 붙이기 좋은 구조다. 유료 구독 서비스처럼 결제 문턱이 없으니 이용자 유입이 쉽고, 오래된 콘텐츠 라이브러리도 다시 현금 흐름으로 돌릴 수 있다.

FAST는 미국 시장에서 네 가지 얼굴을 동시에 갖는다. 첫째, 광고 매출을 직접 만드는 독립 플랫폼이다. 둘째, 한 번 쓰고 지나간 콘텐츠를 다시 길게 돌리는 수익화 채널이다. 셋째, 무료 시청을 앞세워 이용자를 생태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진입 창구다. 넷째, TV OS와 결합해 콘텐츠 노출과 소비 경로를 직접 통제하는 유통 인프라다. 이 네 가지 기능이 한 화면 안에서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미국 스트리밍 시장의 중심은 월정액 구독 경쟁에서 광고와 노출, 데이터 경쟁으로 옮겨가고 있다.

삼성 TV 플러스의 성장도 같은 흐름 안에서 읽힌다. 삼성은 TV를 파는 회사이면서 동시에 첫 화면을 가진 사업자다. 미국 시장에서 이 점은 생각보다 크게 작용한다. 하드웨어를 통해 거실에 먼저 들어가고, 운영체제를 통해 화면을 쥐고, 무료 채널로 이용자를 붙잡은 뒤 광고와 데이터로 수익을 넓힌다. 예전에는 콘텐츠 회사가 플랫폼을 찾아다녔다면, 지금은 하드웨어와 운영체제를 가진 사업자가 콘텐츠를 불러들이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삼성 TV 플러스가 단순한 부가 서비스가 아니라 주요 유통 채널로 거론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로쿠와 아마존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같은 힘을 보여준다. 로쿠는 운영체제와 광고 플랫폼, 로쿠 채널을 한데 묶으며 미국 거실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아마존은 파이어 TV를 앞세워 화면을 장악한 뒤 프라임 비디오와 광고 사업, 전자상거래까지 연결한다. 같은 스트리밍 시장 안에 있으면서도 이들의 수익 구조는 콘텐츠 회사와 다르다. 작품 흥행에만 기대지 않는다. 광고를 붙이고, 화면 노출을 팔고, 데이터를 모으고, 다른 서비스와 묶어 전체 생태계 수익을 키운다. 미국 미디어 업계가 콘텐츠 회사 못지않게 이들 플랫폼 회사를 경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콘텐츠 회사들이 느끼는 압박도 커졌다. 넷플릭스와 디즈니+, 맥스, 파라마운트+, 피콕 같은 서비스는 결국 TV 화면 위에서 서로를 밀어내야 한다. 이용자가 직접 찾아 들어오기만 기다릴 수 없는 시장이 됐다. 홈 화면 노출, 추천 배너, 검색 상단 고정, 무료 채널과의 연계, 광고 요금제 배치가 모두 사업 전략이 됐다.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이용자에게 닿는 길목을 놓치면 시청 시간은 줄어든다. 반대로 대작이 아니어도 홈 화면과 무료 채널, 추천 알고리즘을 잘 타면 긴 수명을 얻을 수 있다. 미국 스트리밍 시장에서 작품성과 유통력이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여기서 다시 확인된다.

이 변화는 파라마운트-WBD 결합 논의와도 이어진다. 두 회사가 스튜디오와 방송, 뉴스, 스포츠, 스트리밍, 광고 사업을 한데 묶으려는 이유는 단순히 콘텐츠를 많이 가지려는 데 있지 않다. 이용자와 만나는 접점을 넓히고, 작품을 여러 화면에서 돌리고, 광고를 붙일 자리를 늘리고, 무료 채널과 유료 플랫폼을 함께 굴리려는 계산이 더 크다. 미국 시장에서 통합이 반복되는 까닭은 결국 한 회사 안에 더 많은 작품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화면과 더 많은 돈줄을 묶기 위해서다.

한국 콘텐츠 업계가 이 장면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도 분명하다. 지금까지 미국 시장 진출은 넷플릭스나 디즈니+, 아마존 같은 대형 플랫폼과의 계약이 중심이었다. 물론 그 길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이제는 작품을 어느 플랫폼에 납품하느냐만으로 설명이 끝나지 않는다. 작품이 어느 TV 홈 화면에 걸리는지, FAST 채널로 다시 유통될 수 있는지, 광고 기반으로 얼마나 오래 수익을 낼 수 있는지, 운영체제를 가진 사업자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함께 중요해졌다. 콘텐츠 수출만 바라보던 전략으로는 미국 시장의 새 질서를 따라가기 어렵다.

미국 미디어 시장의 권력은 지금 조용히 옮겨가고 있다. 영화 스튜디오와 방송 네트워크, 스트리밍 앱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용자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은 TV 첫 화면이다. 그 첫 화면을 쥔 사업자가 추천과 검색, 무료 채널, 광고까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시장의 무게중심도 바뀌고 있다.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인가 못지않게, 어떤 화면에서 먼저 보여줄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 시장이다. 리모컨을 쥔 손이 향하는 첫 칸. 미국 스트리밍 시장의 새 권력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