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N 리포트] 포화 바깥의 고요, 프린스턴은 건국의 얼굴을 다시 걸었다

2026-04-08     박준식 기자
American Art Galleries, Princeton University Art Museum, 2026. 사진=Joseph Hu / the Princeton University Art Museum

[KtN 박준식기자] 청록색 벽 앞에 금빛 액자 하나가 걸려 있다.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이 재개관과 함께 다시 내건 찰스 윌슨 필의 ‘프린스턴 전투의 조지 워싱턴’이다. 1783~84년 제작된 이 그림은 프린스턴이 가장 오래 붙들어 온 상징 가운데 하나다. 대학 이사회 의뢰로 만들어졌고, 나소 홀 중심부에 두 세기 넘게 걸려 있었다. 미국 독립 250주년을 맞은 해, 학교는 건국기의 얼굴을 다시 전시장 한가운데 세웠다. 화면만 보면 공화국의 품위와 건국의 자부심을 말하는 자리다.

전시장 공기는 지나치게 차분하다. 조명은 온화하고, 안내 문구는 절제돼 있다. 건국 영웅의 초상 앞에 사람들이 멈춰 서는 풍경만 놓고 보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나라 같다. 그러나 전시장 문 바깥의 미국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을 향한 군사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중동 전쟁은 국제 유가와 물가, 성장률 전망까지 흔들고 있다. 미술관 안의 고요와 미술관 밖의 포화가 같은 시간대에 놓여 있다.

프린스턴 전시장을 읽는 출발점도 바로 그 간극이다. 미술관 안에서는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기원을 말하고, 미술관 밖에서는 군사력과 제재로 세계 질서를 밀어붙인다. 안에서는 건국의 이상을 설명하고, 밖에서는 전쟁의 충격이 에너지 시장과 금융시장으로 번진다. 건국의 초상은 정적 속에 걸려 있지만, 초상화를 둘러싼 현실은 포화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프린스턴 전시가 미국의 위대함을 말하려 들수록, 현실의 미국은 전쟁 유발자의 민낯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시선을 붙드는 첫 요소는 그림보다 액자다. 화려한 금빛 틀은 본래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초상화를 둘렀다. 프린스턴 전투 때 미국 포탄이 나소 홀로 날아들어 국왕의 그림을 부쉈고, 살아남은 액자에 워싱턴의 얼굴이 들어왔다. 윗부분 왕관 장식은 잘려 나갔다. 액자에는 절단 흔적까지 남아 있다. 미국 건국사는 오래전부터 장면을 공화국의 출발로 설명해 왔다. 왕의 자리를 시민의 나라가 대신했다는 뜻이다.

2026년 봄 저 잘려 나간 왕관은 다른 뜻으로도 읽힌다. 왕관을 떼어낸 손길은 반군주제의 선언이었지만, 오늘의 미국 앞에 놓으면 장면은 한 줄로 끝나지 않는다. 전시장 안에서는 왕을 거부한 나라의 탄생을 말하고, 전시장 밖에서는 전쟁을 키우며 해협과 유가, 물류를 흔든다. 공화국의 기원을 기념하는 액자가 지금은 다른 사실까지 비춘다. 자유를 말하는 미국과 포화를 키우는 미국이 한 나라 안에 겹쳐 서 있다는 사실이다. 프린스턴 전시장은 간극을 해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한 전시장 한복판에서 간극을 더 선명하게 보이게 만든다.

초상화 양옆에 놓인 흉상 두 점은 분위기를 더 무겁게 만든다. 한쪽에는 윌리엄 러시가 만든 고전적 워싱턴이 서 있다. 반대편에는 모호크 작가 앨런 미켈슨의 ‘Hanödaga:yas’, 곧 ‘마을 파괴자’가 놓였다. 검게 그을린 받침대는 불타 버린 원주민 마을을 떠올리게 하고, 거울처럼 반사되는 표면은 관람객 얼굴을 워싱턴 형상 위에 겹쳐 놓는다. 국가 건설자의 얼굴과 마을 파괴자의 이름이 같은 공간 안에서 맞부딪힌다. 워싱턴이 많은 노예를 소유했고, 원주민 공동체를 향해 초토화 작전을 지시한 기록도 함께 떠오른다.

프린스턴은 건국 영웅을 치우지 않았다. 대신 건국 영웅 옆에 폭력의 기록을 세웠다. 미술관이 내놓은 해석은 미국식 자기비판의 전형에 가깝다. 영웅을 버리지는 않되 영웅의 어두운 얼굴을 함께 전시한다. 국가의 상징을 폐기하지는 않되 상징 아래 눌려 있던 역사를 끌어올린다. 대학 미술관으로서는 영리한 선택이다. 재개관의 상징성, 독립 250주년의 화제성, 오늘의 미국 정치까지 한 작품에 묶을 수 있다. 오래된 대표작 한 점의 뜻을 다시 짜는 것만으로도 강한 여론 효과를 낸다.

문제는 전시장 안의 비판이 전시장 밖 미국을 얼마나 바꾸느냐다. 노예제와 원주민 파괴를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의 미국은 지금도 군사력으로 세계를 흔들고 있다. 중동의 긴장이 이어지는 동안, 프린스턴 전시장은 건국의 얼굴을 차분히 설명한다. 미국은 안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해설하고, 밖에서는 전쟁과 압박으로 질서를 재편한다. 건국의 명분과 패권의 현실이 따로 움직이는 장면이다. 프린스턴 전시가 미국의 양면성을 드러낸다는 말이 맞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면성은 성찰의 증거이기 전에 괴리의 증거다.

청록색 벽 앞 워싱턴은 두 겹의 얼굴로 남는다. 왕을 밀어내고 공화국을 세운 건국자의 얼굴이 하나 있다. 노예제와 원주민 파괴, 오늘의 전쟁과 패권의 역사까지 포개진 얼굴이 다른 한쪽에 있다. 프린스턴 전시장은 두 얼굴 가운데 하나만 고르지 않았다. 다만 고요한 전시장 안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역설은 장면에서 생긴다. 밖에서는 포화가 이어지고, 안에서는 건국의 초상 앞에 사람들이 조용히 멈춰 선다. 미국은 지금 두 장면을 동시에 살고 있다. 프린스턴이 다시 건 것은 위대한 미국의 자화상이 아니다. 스스로는 자유를 말하면서 세계를 혼란으로 밀어 넣는 미국의 균열 난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