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리포트] 전통예술, 글로벌 수요가 먼저 움직였다...평택시문화재단의 봄 시즌 3부작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아카데미 석권이 바꾼 공연장 지형도 … 지역 재단은 한량무에서 철물이굿까지 '한국의 무형(無形)'으로 시즌을 채웠다 남·서부 거점별 특화 전략 주효… 시민 예술단 ‘PAO’ 통해 지역 인재 육성 선순환 구조 구축
[KtN 임우경기자] 지난 4월 10일 밤, 평택 남부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객석에서 기립박수가 터졌다. 국립국악원이 올린 〈한국의 흥과 신명〉 무대였다. 남성 군무 '한량무'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무대를 가득 채우는 순간, 관객 일부는 장단에 맞춰 손뼉을 쳤다. 어린이와 어르신 옆에는 외국인 관람객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공연장 안의 이 장면은 2026년 봄의 문화 지형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전통문화의 글로벌 수요 —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바꾼 것
올봄 지역 공연장에서 전통예술 관객이 눈에 띄게 달라진 배경에는 수치가 있다. 2025년 6월 공개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누적 시청 4억 8,160만 회를 기록하며 넷플릭스 역사상 영화 부문 단일 작품 최다 시청 1위에 올랐고, 주제곡 '골든'은 빌보드 핫100 정상을 차지했다. 무당, 저승사자 등은 물론 조선시대 민화 '작호도'에서 영감을 얻은 호랑이와 까치 등 한국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의 영향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기념품이 불티나게 팔렸고, 남산 서울타워·북촌 한옥마을 등에도 해외 관광객이 대거 몰렸다.
이른바 '케데헌 효과'로 2025년 하반기 남산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전년 대비 큰 폭으로 늘었다. 남산서울타워 유료전망대 입장객은 전년 동기 대비 50% 이상 증가했다. 서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평택시문화재단이 4월 10일 공연에서 "외국인 관람객도 다수 찾아 한국 전통예술에 대한 높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힌 것은, 이 파급이 지방 공연장 수준까지 내려왔음을 시사한다.
2026년 문화 트렌드를 분석한 연구들은 한국의 뉴트로(Newtro) 문화처럼 옛것을 단순히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적 감각과 결합해 새롭게 재창조하는 경향이 패션·음악·공간·문화 행사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OTT가 만들어낸 글로벌 수요가, 지역 공연장의 프로그래밍 문법을 실질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첫 무대 — 국립국악원의 기량으로 관객의 기준선을 올리다
평택시문화재단(대표이사 이상균)이 올봄 기획한 전통예술 시리즈의 출발은 국립국악원 초청공연이었다. 한국 전통예술의 정수를 계승·발전시켜 온 국립국악원을 직접 초청해 꾸린 무대로, 정통 궁중음악 '수제천'을 앞세우고 남성 군무 '한량무', 연희극 '판굿', 정재 합설 '향아무락', '경·서도민요연곡'을 이었다.
프로그램 구성의 진폭이 크다. 궁중 아악에서 민속 연희까지를 한 무대에 배치해, 전통예술에 낯선 관객과 익숙한 관객을 동시에 붙드는 방식이다. 특히 '한량무'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진 레퍼토리라는 점을 재단 스스로 홍보 포인트로 활용했다. OTT가 만들어준 관심을 공연장 좌석으로 전환하는 전략이다.
판굿과 한량무 대목에서 공연장의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고, 공연이 끝난 뒤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관람객들은 "아이들과 함께 수준 높은 전통예술을 접할 수 있어 의미 있었다", "외국인과 함께 관람하며 한국 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반응을 남겼다.
초청공연 방식의 한계도 분명하다. 기획의 주도권이 국립국악원에 있고 지역 밀착도는 낮다. 그러나 재단은 이 무대를 단독 이벤트가 아닌 시리즈의 '입구'로 설계했다. 국립기관의 공신력이 관객 기준선을 높이면, 이후 자체 제작 공연이 더 높은 신뢰를 얻는 구조다.
두 번째 무대 — 지역 음악인 57명을 공개 모집해 무대로 올리다
재단은 4월 13일, 연속으로 두 건의 보도자료를 추가 배포했다. 그 첫 번째가 5월 13일 평택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열리는 'PAO: 오월의 하모니' 연주단원 공개 모집이다.
2026년 문화예술계 트렌드 분석은 대형 공연장과 메가 이벤트 수요는 여전히 높지만 동시에 소규모 맞춤형 문화 체험 선호도 함께 증가하고 있으며, 지방소멸 위기 속에서 지역 고유의 문화 자산을 활용한 '하이퍼로컬' 방식이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는다고 본다. PAO 프로젝트는 이 흐름 위에 서 있다.
모집 인원은 현악기 34명, 관악기 8명, 금관악기 9명, 타악기 2명, 세션 4명 등 총 57명이다. 지원 자격은 평택시에 연고가 있는 음악대학 졸업(예정)자 및 관련 전공자로 제한된다. 최선용 예술감독 지휘 아래 5월 11일·12일 3회 리허설을 거쳐, 5월 13일 오후 7시 30분 본 공연을 올린다.
올해 개관한 평택아트센터 대공연장의 첫 시즌을 지역 연주자와 함께 채운다는 의도가 담겼다.
재단 관계자는 "지역 연주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무대를 채우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신생 공연장이 단기간에 운영 레퍼런스를 쌓고, 지역 음악 전공자에게 실전 공연 환경을 제공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하는 방식이다.
다만 수석단원 45만원, 일반단원 35만원의 참여비가 연주자에게 부과되는 구조는, '지역 예술인 지원'이라는 명분과 비용 전가 사이의 긴장을 내포한다. 접수는 4월 9일부터 17일까지 네이버폼을 통해 진행된다.
세 번째 무대 — 지역의 이산(離散) 역사를 굿판으로 올리다
5월 23일 평택시 서부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리는 명창 박정욱의 〈황해도 철물이굿〉은 이번 시리즈 가운데 기획의 밀도가 가장 높다. 재단의 자체 제작공연 시리즈 '名作(명작)'의 두 번째 무대다.
출발점은 평택의 지역사다.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를 비롯한 이북5도 출신 실향민들이 평택 신창동, 안중읍 성해리, 포승읍 흥원리 등 곳곳에 황해도촌을 이루며 정착했다. 그 기억이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고, 정착 2·3세대를 통해 지금도 명맥이 이어지는 지역의 정체성을, 황해도 무형유산인 철물이굿으로 무대에 끌어올리는 기획이다.
한류는 K팝과 K드라마를 넘어 한국 문화 전반으로 확장 중이며, 생활 한복의 대중화와 전통문화에 대한 MZ세대의 관심 확산이 이 흐름을 뒷받침한다.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디즈니+ 〈운명전쟁49〉, SBS 〈신들린 연애〉 등 무속 소재 콘텐츠가 국내외에서 잇따라 주목받는 상황도 이 공연의 외부 환경이다.
공연을 이끄는 박정욱 명창은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평안도 배뱅이굿' 예능 보유자이자 국가무형유산 서도소리 이수자, 황해도 철물이굿보존회 회장이다. 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통령상,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국제뮤직페스티벌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이전에도 평택 내 이북 출신 정착민 가정을 직접 찾아 전통문화의 명맥을 이어온 인물이다. 황해도 출신 만신 이선비 선생에게 철물이굿을 전수받은 그는 이번 공연에서 황해도 굿판을 총지휘하는 경관만신으로 무대 전반을 이끈다.
공연 구성은 신청울림·일월성신맞이·상산맞이·칠성거리·대감놀이·장군거리·비수창검거리·회심곡·조상거리·뒷전의 10개 굿거리가 인터미션 없이 100분간 이어진다. 의상·음악·미디어아트를 결합해 전통 의례를 공연예술로 재구성했다. 평택 최고령 보호수인 학고개 은행나무에 공연을 고하는 전통 인사 의식을 사전 퍼포먼스로 덧붙여 지역 상징과의 연결도 강화했다. 전석 2만원, 평택시민·경로 할인 적용. 예매는 4월 16일 오후 2시 NOL 티켓에서 가능하다.
세 공연의 구조 — 수입·육성·창작의 연속 편성
국립국악원 초청에서 시작해 지역 오케스트라 공개 모집을 거쳐 자체 제작 무속 공연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단순한 일정 나열이 아니다. 초청은 신뢰성 확보, PAO는 지역 생태계 개입, 철물이굿은 지역 정체성 발굴이라는 서로 다른 기능을 맡는다.
문화예술 트렌드 연구는 초개인화의 확산으로 대형 공연장 집중 현상과 소규모 문화공간의 생존 위기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으며, 지역 고유의 문화 자산을 활용하는 방향이 중요한 정책 과제가 됐다고 분석한다. 재단이 세 편의 공연을 같은 주간에 연속 발표한 것은, 이 양극화 지형에서 복수의 관객층을 동시에 공략하는 전략으로 읽힌다.
그러나 세 공연이 각각 남부문화예술회관, 평택아트센터, 서부문화예술회관으로 분산된다는 점은 관객 입장에서 인지 부담을 준다. 재단의 시설 운영 구조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시리즈로 묶이는 기획력이 단일 홍보채널로 통합되지 않는다면 연속성의 효과는 반감된다. PAO 참여비 구조와 자체 제작 예산 수준도 향후 공개적으로 검증받아야 할 지점이다.
남은 변수 — 글로벌 수요가 지역까지 내려오려면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5 외신·소셜데이터로 보는 글로벌 한류 트렌드 분석 보고서'는 저승사자·도깨비 같은 전통문화 소재와 한식이 K팝과 자연스럽게 결합한 점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핵심 흥행 요인으로 꼽혔다고 밝혔다. 전통이 글로벌 콘텐츠의 원료가 되는 시대에, 그 원료를 생산하는 현장 — 공연장, 보존회, 지역 예술인 — 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더 이상 문화계 내부의 자위적 주장이 아니다.
평택시문화재단의 봄 시즌이 5월 23일 철물이굿 공연으로 마무리된 뒤 어떤 관객 데이터를 얻는지, 그리고 Name作 시리즈가 타 지역 순회나 아카이빙 등 후속 경로로 이어지는지가 다음 판단의 기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