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문화②] 국빈 오찬 한복판에 선 기업인들
정상외교 중심에 삼성·현대차·포스코…뉴델리 오찬장이 보여준 새 외교 장면
[KtN 박준식기자]4월 20일 뉴델리 모디 총리 주최 오찬장은 이번 인도 국빈방문의 결을 단번에 보여준 자리였다. 국빈 방문의 오찬은 대개 정상과 정부 인사들이 중심이 되는 의전 행사로 읽힌다. 이날은 달랐다. 양국 정상이 마주 앉은 식탁에 삼성전자, 현대차, LG, 포스코 등 한국 대표 기업인들이 함께 들어왔다. 인도 측에서도 주요 기업인들이 자리를 채웠다. 회담장 밖에서 따로 열리는 경제 행사에 기업을 모은 수준이 아니었다. 외교 의전의 중심부로 기업을 끌어들인 장면이었다. 이번 방문에서 경제 협력이 어디에 놓였는지, 정부가 인도와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려 했는지 이 한 컷이 가장 또렷하게 보여줬다.
대통령실 설명에 따르면 당초 양국 기업이 참여하는 한-인도 경제인 대화는 비즈니스 포럼 직전에 별도 행사로 열릴 예정이었다. 일정은 바뀌었다. 모디 총리 제안에 따라 양국 정상이 경제인들과 함께 오찬을 하며 격려하는 형식으로 재편됐다. 대통령실은 이를 두고 정부 인사들 간 외교 행사인 국빈 오찬에 기업인들을 초대한 매우 이례적인 행사라고 설명했다. 형식의 변화는 단순하지 않았다. 회담은 회담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따로 떼어 놓던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 정부와 기업, 외교와 산업을 같은 장면 안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번 인도 방문이 보여준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오찬장의 인원 구성만 봐도 메시지는 분명했다. 대통령실 브리핑에 따르면 이번 인도 국빈방문에는 54개 기업과 단체에서 200여 명이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했다. 한국 측에선 정부 공식 수행원 외에 삼성전자, 현대차, LG, 포스코 회장 등 11명의 기업인이 오찬에 참석했다. 인도 측에서도 정부 인사들과 JSW그룹 사잔 진달 회장 등 15명의 기업인이 함께했다. 규모만 놓고 봐도 단순한 친교 자리가 아니었다. 정상외교의 중심 무대에 양국 경제를 움직이는 인물들을 전면 배치한 구성이었다. 기업을 의전의 주변부에 두지 않고, 국빈 일정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이 장면이 더 도드라지는 이유는 오찬 전후 일정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공식환영식과 간디 추모공원 헌화, 소인수 회담과 확대 회담, MOU 교환식, 공동언론발표가 먼저 이어졌다. 그 뒤 모디 총리 주최 오찬이 열렸고, 다시 한-인도 비즈니스 포럼이 이어졌다. 정부 간 문서와 협의체가 회담장에서 정리되고, 곧바로 기업인들이 등장해 산업 현장의 언어로 그 내용을 채우는 흐름이었다. 외교 일정과 기업 행사가 서로 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정부가 제시한 협력 방향과 기업이 실제로 움직일 산업 의제가 같은 날, 같은 도시, 거의 같은 동선 안에서 맞물렸다. 이번 방문이 경제를 부속 일정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 여기서도 드러났다.
오찬장에서 논의된 분야도 예전보다 훨씬 넓었다. 자동차와 전기전자 협력 확대를 넘어 조선과 철강 등 기반 산업, 인도의 AI·IT 역량과 한국의 제조 역량 결합, 소비재와 문화 같은 신산업 분야 협력 필요성이 함께 거론됐다. 그 자체로 인도 협력의 지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기업이 인도를 단지 판매시장이나 생산기지로만 보는 단계를 넘어 연구개발과 소재, 기반 산업, 디지털과 콘텐츠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다는 흐름이 읽힌다. 인도 역시 제조업 확대와 산업 고도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기술과 생산 역량을 가진 파트너로 보는 시선이 강해졌다. 오찬장에 오른 업종과 의제가 바로 그 만나는 지점을 드러냈다.
기업인 발언도 그런 방향을 뚜렷하게 보여줬다. 삼성은 현지 기업이 되겠다는 자세로 진출했다며 앞으로 첨단 제품 생산과 혁신 연구개발을 인도 현지에서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차는 신흥시장 종합 R&D 센터를 2028년 말 인도 완공 목표로 짓고 있다고 소개했고, 이번 달 푸네 제3공장 준공식에 모디 총리를 초청했다. 포스코는 인도 JSW그룹과 연 600만톤 규모의 고기능성 강재 생산을 위한 일관제철소 합작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HD현대는 중형 조선소 건설 투자 검토를 소개했고, 효성은 세계 1위 스판덱스 공장 가동과 함께 전력망 구축, 산업용·가정용 펌프 공장 계획을 말했다. 크래프톤은 인도 게임 제작 생태계를 지원하고 있다며 콘텐츠 시장 확장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사업 단계는 서로 다르지만, 인도 협력의 결이 자동차와 가전 중심에서 훨씬 넓은 분야로 퍼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인도 측 반응도 인상적이었다. 대통령실 브리핑에 따르면 모디 총리는 현대차와 LG, 삼성, 포스코, 효성을 언급하며 인도인들이 잘 아는 기업이라고 말했다. 이어 HD현대의 조선, 삼성의 디스플레이, 네이버의 디지털, 크래프톤의 게임, GS의 청정에너지까지 따로 짚었다. 조선업, AI와 반도체, 청정에너지를 앞으로 10년간 중요한 분야로 보고 있다는 말도 내놨다. 오찬장은 정부의 환영 인사를 주고받는 자리를 넘어, 인도가 한국 기업을 어떤 산업 파트너로 보는지 공개적으로 보여준 자리이기도 했다. 한국이 강점을 가진 제조와 기술, 인도가 키우려는 산업 분야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 모디 총리 발언이 직접 설명한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 역시 오찬장의 성격을 드러냈다. 대통령은 모디 총리에게 국빈 초청과 오찬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 양국 간 오랜 역사적 인연과 경제 협력이 철강과 조선 같은 기반 산업뿐 아니라 소비재와 문화 콘텐츠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노력이 실제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뒷받침하겠다는 점도 강조했다. 회담장에서 나온 제도와 합의가 오찬장에서는 기업 활동과 연결되는 언어로 바뀌었다. 정부가 외교의 길을 열고 기업이 뒤따르는 구도라기보다, 정부와 기업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확인하는 그림에 가까웠다.
국빈 방문에서 의전은 메시지다. 누구를 어느 자리에 앉히는지, 어떤 일정을 앞뒤로 붙이는지, 어떤 사진을 남기는지 자체가 외교의 언어가 된다. 이번 오찬은 그런 점에서 유독 상징성이 강했다. 경제인이 배석한 오찬은 단순한 행사 추가가 아니라 정상외교의 화면을 다시 짠 장면이었다. 과거의 경제사절단이 회담 성과를 따라붙는 손님 역할에 머물렀다면, 이번 오찬에선 기업이 앞줄로 걸어 나왔다. 국빈 일정 한복판에서 정상이 기업인 발언을 듣고, 기업인이 미래 산업을 얘기하고, 총리가 특정 기업과 분야를 직접 언급한 구조는 그 자체로 우선순위를 말해 준다. 인도와의 관계를 경제와 산업 빼고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배치는 사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경제인들과 함께한 기념촬영, 오찬장에 나란히 앉은 양국 정상과 기업인들, 비즈니스 포럼 현장의 구도는 이번 방문에서 기업이 얼마나 전면에 섰는지 보여줬다. 공식환영식과 공동언론발표가 국가 대 국가의 장면이었다면, 오찬과 포럼은 국가와 기업이 함께 움직이는 장면이었다. 외교 일정 안에 기업인이 들어온 순간, 순방의 해석도 달라졌다. 정부 간 합의와 기업 활동이 서로 다른 층위가 아니라 같은 프레임 안에서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오찬만으로 실질 성과를 단정할 수는 없다. 기업 발언 가운데는 확정 투자도 있고, 추진 계획도 있으며, 검토 단계도 있다. 회담장에서 나온 산업협력위원회와 CEPA 개선협상, 디지털 브릿지 프레임워크도 후속 협의와 이행이 따라야 힘을 얻는다. 기업인을 국빈 오찬에 앉혔다고 해서 규제가 즉시 풀리거나 사업이 곧바로 속도를 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 방문에서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인도를 상대할지, 어디에 힘을 싣고 누구를 앞세울지는 분명히 드러났다. 경제협력을 별도 부속 행사로 두지 않고, 외교 의전의 한복판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이번 뉴델리 오찬은 그래서 한 끼 식사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회담장에서 합의한 문서가 곧바로 기업의 언어와 산업의 언어로 이어졌고, 정상외교의 상징적 공간에 기업인들이 직접 들어왔다. 인도 방문이 단순한 우호 확인이나 의전 행사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도 이 자리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정부와 기업, 외교와 산업이 한 테이블에 놓인 장면. 이번 인도 국빈방문을 압축하는 한 문장이 필요하다면, 아마 이 오찬장에서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