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문화③] CEPA·공급망·AI, 문서로 남은 성과
산업협력위 신설부터 디지털 브릿지까지…인도 방문이 남긴 제도와 협력 틀
[KtN 박준식기자]이번 인도 국빈방문에서 확인된 성과는 눈에 띄는 단일 계약보다 합의문과 협의체, 후속 협상 일정에 더 많이 담겼다. 정상회담과 공동언론발표, 정책실장 브리핑에 나온 결과를 묶어 보면 산업협력위원회 신설, 에너지 자원 안보 협력 공동성명 채택, 한-인도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 CEPA 개선협상 재개·가속, 디지털 브릿지 프레임워크 체결, 금융 당국 간 협력 MOU, 전자결제시스템 연계 MOU가 핵심 축으로 잡힌다. 뉴델리에서 나온 경제 성과를 숫자 하나로 요약하긴 어렵지만, 양국 관계를 움직일 제도와 채널이 한꺼번에 정리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번 방문에서 특히 눈에 띈 대목도 여기에 있다. 정부는 인도와의 경제 관계를 단순한 교역 확대 수준에 두지 않았다. 무역과 투자에 더해 공급망과 에너지, 디지털과 금융, 생활 편의와 문화까지 협력 범위를 한꺼번에 넓혔다. 인도는 한국의 10위 교역 상대국이고, 지난해 양국 교역 규모는 256억 달러였다. 적지 않은 규모지만 대통령실 설명대로 아세안과 비교하면 아직 격차가 남아 있다. 이번 순방은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한 제도 정비와 협력 틀 마련에 힘을 실은 일정으로 읽힌다.
가장 앞에 놓인 합의는 CEPA 개선협상 재개·가속이다. 한-인도 CEPA는 이미 체결된 협정이지만, 이번 방문에서는 협정을 손질하는 문제가 다시 회담 전면에 올랐다. 양국은 공동선언문을 통해 조기 타결을 목표로 CEPA 개선협상을 재개하고 속도를 높이기로 했다. 장관급 공동선언문도 별도로 발표했다. 양측은 차기 제12차 개선협상 개최 시기와 타결 목표 시점에 합의했고, 5월 예정된 실무협상에서 세부 분과 협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번 CEPA 논의가 주목받는 이유는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상품·서비스·원산지 같은 전통 통상 분야를 넘어 공급망 협력, 민관 협력 촉진, 디지털 규범 같은 의제까지 함께 올랐다. 인도와의 경제 관계를 옛 교역 틀에만 묶지 않겠다는 뜻이 읽힌다.
CEPA 재가속은 국내 기업이 인도에서 겪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도 시장을 두고 자주 나오는 얘기는 규제의 복잡성과 예측 가능성 부족이다. 이번 방문에서 대통령실은 중소기업들의 인도 진출 애로가 회담 의제에 올랐다고 설명했다. 모디 총리는 한국 기업들의 문제 제기에 공감하며 인도 총리실이 컨트롤타워가 돼 한국 전담 데스크를 설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 대통령실에도 인도 경제 협력 전담반을 만들어 달라고 제안했다는 설명도 나왔다. 아직은 제안과 구상 단계다. 다만 CEPA 개선협상, 실무협의체, 전담 창구 논의가 한 흐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번 합의가 단순한 문구 정리에 그치지 않고 실제 시장 접근성과 투자 환경 개선을 겨냥하고 있다는 얘기다.
산업협력위원회 신설은 이번 방문에서 가장 구조적인 성과로 꼽힌다. 양국은 이를 한-인도 간 최초의 경제 협력 분야 장관급 협의체라고 설명했다. 무역과 투자뿐 아니라 핵심광물, 원전, 청정에너지 등 협력 수요가 큰 분야를 중심으로 논의를 체계화하겠다는 뜻도 함께 밝혔다. 그동안 한-인도 경제 관계는 기업 단위 투자와 개별 사업 중심으로 읽히는 경우가 많았다. 장관급 협의체가 만들어지면 산업 협력 현안을 정부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다룰 창구가 생긴다. 기업 애로를 건건이 푸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정책과 공급망, 투자환경을 한 묶음으로 협의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되는 셈이다. 속도는 더딜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이런 채널이 남기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에너지 자원 안보 협력 공동성명도 이번 방문에서 무게가 실린 부분이다. 양국은 나프타와 석유제품 등 핵심 원자재의 안정적 수급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최근 중동 정세와 자원 공급 불안을 감안하면 에너지와 원자재는 외교와 산업이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는 분야다. 제조업 비중이 큰 한국으로선 원자재 수급 불안이 산업 전반으로 이어지기 쉽고, 공급망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자원 외교의 비중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번 공동성명은 인도를 소비시장만이 아니라 에너지·자원 안보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협력 상대로 보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교역 확대에 머물렀던 관계를 공급망 안정이라는 더 넓은 틀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디지털 브릿지 프레임워크는 이번 방문에서 가장 미래 산업 성격이 강한 합의다. 대통령실은 이를 통해 인공지능과 반도체, 데이터 거버넌스 등 분야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협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인도는 대규모 IT 인력과 소프트웨어 역량을 갖춘 나라로 평가받고, 한국은 반도체와 제조 기반, 디지털 인프라에서 강점을 지닌다. 이번 프레임워크는 이런 상호 보완성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조선과 철강 같은 전통 제조업 협력 의제와 함께 AI·반도체·데이터 거버넌스가 정상회담 문서에 오른 점도 눈에 띈다. 인도와의 관계를 과거형 제조 협력에만 두지 않고, 미래 산업으로까지 넓히려는 흐름이 드러난다.
금융 당국 간 협력 MOU도 빠뜨리기 어렵다. 공동언론발표문에는 이를 통해 인도 금융시장에 한국 금융기업들의 진출 기반을 마련하고, 금융기관 상호 진출에 필요한 적격성 심사 정보 공유와 핀테크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제조업과 공급망만으로는 기업 진출이 깊어지기 어렵다. 기업이 더 넓게 들어가려면 금융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특히 인도처럼 시장 규모가 크고 규제 체계가 복잡한 곳에서는 금융 협력 문서가 실제 진출 기반과 연결된다. 이번 MOU는 산업과 통상에 더해 금융 제도와 서비스 영역까지 협력 범위를 넓히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전자결제시스템 연계 MOU는 규모로 보면 크지 않아 보여도 실제 체감도는 높을 수 있다. 양국은 상대국 방문 시 자국의 QR 결제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출장과 관광, 유학생과 교민 생활을 생각하면 이런 조치는 곧바로 피부에 와 닿는다. 경제협력과 문화 교류가 커질수록 결제와 통신, 체류 편의 같은 생활 인프라가 중요해진다. 이번 인도 방문에서 전자결제 연계가 별도 문서로 정리된 것은 양국 관계를 산업과 통상에만 묶지 않고 생활 접점까지 넓히려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문화창조산업 MOU도 같은 선상에서 봐야 한다. 뭄바이 코리아센터 조성과 한국어·한국학 프로그램 확대는 문화 기사에서 다룰 내용이기도 하지만, 이번 순방 전체로 보면 제도 성과의 일부다. K-팝과 드라마, 한국어 학습 수요가 이미 커진 상황에서 정부는 이를 일회성 행사로 두지 않고 거점과 프로그램으로 연결하려 했다. 문화가 시장을 넓히고, 시장이 다시 사람의 이동과 교육, 소비를 늘리는 흐름을 제도적으로 받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산업협력위원회와 디지털 브릿지, 전자결제와 문화창조산업 MOU가 한 회담 안에 함께 놓인 점도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선 구분도 필요하다. 산업협력위원회 신설과 에너지 자원 안보 협력 공동성명 채택, 디지털 브릿지 프레임워크 체결, 금융·전자결제·문화창조산업 MOU는 이번 방문에서 문서로 남은 합의다. 반면 CEPA는 재개와 가속에 합의한 단계이고, 실제 타결은 앞으로 협상에 달려 있다. 2030년 교역 500억 달러는 목표다. 한국 기업 애로 해소와 인도 규제 완화, 전담 데스크 설치, 후속 실무협의체 운영도 앞으로 지켜볼 대목이다. 무엇이 이미 정리됐고, 무엇이 협상과 이행을 남겨 두고 있는지 나눠 봐야 이번 방문의 성격도 더 정확하게 읽힌다.
그렇다고 이번 순방의 문서 성과를 가볍게 볼 수는 없다. 정상외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악수와 발표, 기업인 발언 같은 장면이다. 관계를 오래 움직이는 건 대개 합의문과 협의체, 후속 협상 일정이다. 이번 인도 방문에서는 그 점이 특히 두드러졌다. 회담장에서 제도와 프레임워크를 만들고, 오찬장과 비즈니스 포럼에서 산업 협력 방향을 확인하고, 문화와 생활 편의 조치로 사람의 접점까지 넓히는 구조가 한 번에 제시됐다. 인도와의 관계를 무역 확대 한 줄로 정리하지 않고, 공급망과 에너지, 디지털과 금융, 문화와 생활 편의까지 넓게 설계하려는 접근이 문서에 남았다.
이번 방문에서 정리된 합의들을 하나로 묶어 보면 방향은 분명하다. 인도를 단순한 교역 상대 하나로만 다루지 않겠다는 뜻이다. 시장으로만 보던 시선을 공급망 파트너, 기술 협력 상대, 생활 교류 공간으로 넓히려는 흐름이 이번 합의들에 담겼다. 8년 만의 인도 국빈방문에서 나온 여러 문서가 당장 수출액이나 투자액으로 환산되지는 않을 수 있다. 다만 앞으로 한-인도 관계를 어디서 움직이고 어떻게 넓힐지, 그 방향을 제도와 협의 틀의 형태로 남겼다는 점은 분명하다. 뉴델리에서 나온 서명과 합의는 이번 방문의 성과를 가장 차분하고도 오래 남는 방식으로 기록한 결과물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