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베트남 리포트 ①] 한-베 경제협력 중심축, 제조업 넘어 첨단산업·문화로 확장
교역 1,500억 달러 목표 속 AI·반도체·콘텐츠 협력 확대…베트남 정부, 문화산업을 국가 핵심 동력으로 격상
[KtN 전성진기자]이재명 대통령은 2026년 4월 22일 베트남 하노이 국가주석궁에서 또 럼 베트남 당서기장 겸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 정상은 교역·투자, 에너지·원전, 인프라, 과학기술, 문화·인적교류를 미래지향적 전략 분야로 올리고, 분야별 협력 강화를 위한 12건의 협력 문건을 체결했다. 2030년까지 교역액 1,500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목표도 다시 확인됐다. 제조업과 공급망을 중심으로 쌓여온 한·베 경제협력의 외연이 AI·반도체·바이오, 디지털 인프라, 문화창조산업으로 넓어지는 장면이었다.
교역 확대는 정상회담의 첫 번째 경제 의제였다. 식품, 의약품, 화장품, 의료기기 안전성 협력 MOU가 체결됐고, 열처리 가금육 검역협상도 타결됐다. 정부는 이를 베트남의 43억 달러 규모 수입의약품 시장과 110억 달러 규모 육류시장 진출 확대를 위한 기반으로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활동 중인 한국 기업의 예측 가능한 운영 여건을 언급하며 부가세 문제 등 기업 애로사항 해소에 대한 베트남 측의 협조를 요청했다.
정상회담 의제는 제조업 투자와 교역 확대에 머물지 않았다. 베트남 신규 원전 건설과 전력 인프라 사업, 핵심광물 공급망 센터, 고속철도·신도시·신공항 등 대규모 인프라 사업, 금융 분야 디지털 전환이 함께 논의됐다. 과학기술·디지털 분야에서는 한·베 과학기술혁신 협력 마스터플랜 프레임워크를 바탕으로 AI, 반도체, 바이오 분야 공동연구와 연구 인재 양성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문화와 인적교류도 부속 의제에 그치지 않았다. 양국 정상은 현재 500만 명에 달하는 상호 인적교류가 확대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로 했고, 공동 제작 영화 등 문화 콘텐츠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문화창조산업 분야 협력을 더 강화한다는 내용도 정상회담 결과에 포함됐다. K-콘텐츠는 문화교류의 상징을 넘어 관광, 소비재, 디지털 플랫폼, IP 사업과 맞닿은 경제협력 의제로 올라섰다.
4월 23일 하노이 국가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베트남 비즈니스 파트너십 행사는 정상외교의 경제 의제가 기업 현장으로 옮겨간 자리였다. 산업통상부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는 이 행사에 AI·반도체, 바이오·의료, 콘텐츠·소비재, 에너지·환경 분야 한국 기업 100여 개사와 베트남 바이어 200여 개사가 참여했다고 밝혔다. 현장에서 체결된 수출계약은 24건, 8,200만 달러 규모였다. 산업통상부는 2015년부터 개최해 온 한·베트남 비즈니스 파트너십 행사 가운데 역대 최대 실적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날 열린 한·베트남 비즈니스 포럼에서는 원전, 첨단산업, 인프라 등 분야에서 73건의 기업·기관 간 MOU가 교환됐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원자력 현지화 협력과 전력 인프라 협력이 다뤄졌고, 첨단산업 분야에서는 이차전지 핵심소재와 자동차 기술인력 양성 협력이 포함됐다. 발표 세션에서는 베트남 부품산업 육성, AI·전력 인프라, 과학기술 협력, 첨단산업 인력양성 방안이 논의됐다. 콘텐츠와 소비재는 이 같은 첨단산업·디지털 인프라 확대 흐름 안에서 함께 배치됐다.
K-콘텐츠의 현장 접점은 하노이 서호 롯데몰에서 마련됐다. 4월 23일부터 26일까지 열린 K-문화관광대전은 베트남에서 확산되는 K-컬처를 콘텐츠, 푸드, 뷰티, 헤리티지, 트래블 분야에서 체험하도록 한국관광공사 등이 구성한 행사였다. 행사 장소인 하노이 서호 롯데몰은 베트남 최대 규모의 쇼핑·엔터테인먼트 복합공간으로 소개됐고, 2023년 9월 개장 이후 누적 방문객은 2,500만 명을 넘어섰다.
실내 팝업존에는 드라마를 콘셉트로 한 K-콘텐츠·K-푸드 공간, 전통 K-푸드, K-뷰티, K-헤리티지, K-트래블 공간이 이어졌다. 야외에는 K-웹툰과 K-게임 팝업존이 마련됐다. 베트남 소비자가 드라마, 음식, 화장품, 문화상품, 관광 정보, 웹툰, 게임을 한 공간에서 접하는 구조였다. 한국 콘텐츠가 방송 채널과 공연장을 넘어 쇼핑몰, 팝업스토어, 커머스, 관광 홍보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베트남 내부의 산업정책 변화도 한국 콘텐츠 기업의 진출 환경을 바꾸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베트남비즈니스센터의 「2026년 베트남 콘텐츠산업 법제·통상 환경 재편 동향」에 따르면 베트남은 2025년 11월 ‘2030년까지 베트남 문화산업 발전전략 및 2045년 비전’을 승인한 데 이어 2026년 1월 정치국 결의 80-NQ/TW를 통해 문화산업을 국가 핵심 축으로 격상했다. 재정 이행 기반으로는 총 256.25조 동 규모의 국가문화발전목표프로그램이 제시됐고, 1단계인 2025~2030년 예산은 122.25조 동으로 정리됐다.
베트남 정부가 승인한 문화산업 발전전략에는 2030년까지 문화산업의 GDP 기여도 7%, 고용 기여도 6%, 연평균 성장률 10%를 달성한다는 목표가 담겼다. 2045년 비전에는 GDP 기여도 9%, 고용 기여도 8%, 디지털 문화산업 제품 비중 80% 이상, 수출 연평균 9% 성장 목표가 포함됐다. 문화산업이 부처별 진흥정책을 넘어 국가 성장전략의 한 축으로 올라서면서 한국 콘텐츠 기업의 사업 기회도 공동제작, 기술협력, IP 라이선싱, 현지 플랫폼 제휴로 넓어지고 있다.
베트남이 지정한 10대 우선 산업에는 영화, 미술·사진·전시, 공연예술, 소프트웨어·엔터테인먼트·게임, 광고, 수공예, 문화관광, 창의디자인, 텔레비전·방송, 출판이 포함됐다. 이 가운데 영화, 게임, 공연, 광고, 방송은 한국 콘텐츠 기업이 해외 시장에서 경험을 쌓아온 분야와 겹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보고서는 한국 콘텐츠 기업 관점에서 이들 분야의 공동제작, 자문, 기술이전, IP 라이선싱 진입 여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공공조달 성격의 사업에서는 현지법인 또는 현지 파트너 공동 컨소시엄이 요구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제시했다.
시장 확대와 함께 진입 조건도 까다로워지고 있다. 베트남은 2024년 말부터 인터넷, 게임, 광고, 저작권, AI 관련 규제를 잇달아 정비했다. OTT·SNS·게임 영역에서는 월 10만 방문 기준, 실명·신분증 인증, 24시간 이내 불법 콘텐츠 삭제, 게임 퍼블리셔의 현지법인 설립 의무, 미성년 이용시간 자동제한이 주요 쟁점으로 제시됐다. 온라인 광고 영역에서는 5초 스킵 UX 의무화 등 광고 형식 규제가 새로 부상했다.
이재명 정부의 베트남 정책이 K-콘텐츠에 주는 변화는 시장의 크기보다 연결 방식에 있다. 과거 베트남 진출이 드라마 방영권, 음원 유통, 게임 퍼블리싱, 공연 개최처럼 분야별 사업으로 나뉘었다면, 지금은 콘텐츠가 소비재, 관광, 디지털 인프라, AI·데이터, 인력양성 의제와 같은 틀 안에 놓이고 있다. 한국 기업에는 베트남 바이어와의 단기 수출계약뿐 아니라 현지 플랫폼, 유통망, 쇼핑몰, 관광기관, 방송사, 게임 퍼블리셔와의 복합 협력이 필요해졌다.
베트남은 한국의 제조업 생산거점이라는 기존 역할을 유지하면서도 아세안 소비시장과 문화산업 파트너로 이동하고 있다. 정부 간 정상외교는 교역 목표와 협력 문건으로 시장의 문을 넓혔지만, 콘텐츠 기업의 실제 성과는 현지 파트너 선정, IP 권리 관리, 플랫폼 규제 대응, 소비재·관광 연계 설계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 베트남의 문화산업 육성 정책과 디지털 규제 정비가 동시에 진행되는 만큼, 한국 기업의 베트남 전략도 단순 수출이 아니라 규제 준수, 현지 파트너십, IP 사업화, K-라이프스타일 확장을 함께 계산하는 방식으로 재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