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리스크③] 관세와 유가가 덮친 할리우드…영화·OTT·공연의 ‘비용표’가 바뀐다
해외 제작망·극장 유통·스트리밍 전략·월드투어까지 전방위 압박…문화산업도 공급망 리스크 전면 부상
[KtN 최기형기자]2026년 미국 영화산업의 위기 신호는 극장 객석보다 제작 현장과 배급표에서 먼저 드러났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미국 LA비즈니스센터가 정리한 ‘CinemaCon 2026’ 자료는 극장산업의 핵심 리스크가 관객 회복 여부보다 콘텐츠 공급 안정성으로 옮겨갔다고 분석했다. 제작 편수 감소, 프랜차이즈 중심 라인업 집중, 상영 윈도우 재조정, 프리미엄 포맷과 부가 소비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영화 유통은 단일 기준이 아니라 작품별로 설계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내용이다. 관세와 유가 충격은 이 재편 위에 올라탄 추가 비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5년 5월 해외에서 제작된 영화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해외 제작 인센티브가 미국 영화산업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당시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법적 근거, 과세 기준, 스트리밍 적용 여부, 배급권과 제작비 가운데 무엇을 관세 대상으로 볼지 모두 불분명했다. 완성차나 철강처럼 물리적 상품에 관세를 붙이는 방식과 영화 한 편의 국제 제작·배급 구조는 다르다.
할리우드가 느낀 혼란은 산업 구조에서 비롯됐다. 대형 영화는 한 나라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캐나다와 영국의 세금 혜택, 동유럽과 호주의 로케이션, 아시아의 후반작업과 마케팅, 여러 국가의 시각효과 인력이 하나의 제작망에 묶인다. 관세 논의가 실제 부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스튜디오는 촬영지 선택, 보험 계약, 후반작업 장소, 배급 일정, 환율 변동을 다시 계산해야 한다. 해외 제작을 줄이면 미국 내 스튜디오와 장비, 인력 수요가 오를 수 있고, 해외 제작을 유지하면 관세와 정치 리스크를 떠안는다.
트럼프 관세가 제도적 비용이라면, 중동발 에너지 충격은 물리적 비용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2025년 기준 하루 약 2,000만 배럴의 원유와 석유제품이 지나던 통로였고, 이 물량의 약 80%는 아시아로 향했다. 카타르 LNG 수출의 약 93%, 아랍에미리트 LNG 수출의 약 96%도 이 해협을 거쳤다. 관세가 수입품 가격을 흔드는 동안 유가와 해상 운송 차질은 항공 운임, 해운 보험료, 촬영 장비 이동비, 현장 발전 비용을 밀어 올린다.
에너지 시장의 긴장은 이미 숫자로 나타났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26년 3월 보고서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브렌트유 선물이 한때 배럴당 120달러에 근접했고, 보고서 작성 시점에도 한 달 사이 20달러 오른 배럴당 92달러 안팎에서 움직였다고 밝혔다. 4월 보고서에서는 중동 에너지 인프라 공격과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유조선 이동 제한으로 3월 세계 석유 공급이 하루 1,010만 배럴 줄어 9,700만 배럴로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영화와 공연산업은 이 비용을 직접 만난다. 영화 촬영 현장의 발전차, 로케이션 이동, 조명·음향 장비 운송, 해외 스태프 항공권은 에너지 가격과 물류비에 노출돼 있다. K팝 월드투어, 뮤지컬, 페스티벌은 무대 장비를 배로 보내고, 아티스트와 스태프는 항공편으로 이동한다. 항공유와 디젤 가격이 오르면 한 도시를 추가할지, 무대 규모를 줄일지, 티켓 가격을 올릴지가 모두 달라진다. 월드투어의 손익분기점은 팬덤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극장산업은 공급 부족과 비용 상승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CinemaCon 2026 자료는 미국 극장시장이 회복 흐름을 보이면서도 팬데믹 이전 대비 박스오피스 규모가 낮고, 개봉 편수 감소와 대형 작품 중심 편성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고 정리했다. 극장산업의 과제는 관객을 다시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정적인 콘텐츠 공급 체계를 확보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제작비가 오를수록 스튜디오는 더 안전한 작품에 돈을 건다.
스튜디오 통합 논의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의 데이비드 엘리슨 최고경영자는 CinemaCon에서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 인수가 승인될 경우 두 스튜디오를 합쳐 매년 최소 30편의 영화를 극장에 개봉하고 45일의 극장 독점 상영 기간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로이터는 극장업계가 제작 편수 감소와 상영 윈도우 축소를 우려해왔고, 엘리슨의 약속이 극장주들을 향한 직접적인 설득이었다고 전했다.
극장 사업자들이 주목한 것은 작품 수와 상영 기간이었다. 통합 이후 제작 편수가 줄고 상영 일정이 대형 프랜차이즈에 집중되면 극장은 더 적은 작품으로 더 긴 기간을 버텨야 한다. 관객 수가 빠르게 늘지 않는 상황에서 극장은 프리미엄 좌석, 대형 스크린, 식음료 매출로 단위 관객당 수익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CinemaCon 자료가 지적한 프리미엄 포맷과 부가 소비 확대는 이 흐름과 맞닿아 있다.
스트리밍 기업의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넷플릭스는 그레타 거윅 감독의 ‘나니아: 마법사의 조카’를 2027년 2월 극장에서 먼저 공개하고 45일간 독점 상영한 뒤 4월 자사 플랫폼에 올리기로 했다. 로이터는 이 결정을 넷플릭스가 자체 영화에 45일 이상의 광범위한 극장 독점 상영을 적용하는 이례적 전환으로 전했다. 극장 개봉은 더 이상 스트리밍 공개를 지연시키는 장애물만이 아니라, 대형 IP의 문화적 존재감과 기대감을 키우는 마케팅 장치가 되고 있다.
극장과 스트리밍의 관계는 대체에서 병행으로 이동하고 있다. CinemaCon 2026 자료도 영화 유통이 단일 채널 중심에서 선택적 극장화와 플랫폼 활용 경쟁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정리했다. 갈등의 초점은 “개봉하느냐”에서 “얼마나 오래, 어떤 조건으로 극장에 먼저 걸 것이냐”로 바뀌었다. 상영 윈도우는 단순한 날짜가 아니라 극장 매출, 스트리밍 가입자 기대감, 프리미엄 포맷 수익, 2차 유통 전략을 함께 조정하는 협상 변수다.
관세와 유가는 이 협상의 비용을 높인다. 대형 IP는 프리미엄 포맷, 글로벌 마케팅, 굿즈 판매, 이벤트 상영을 통해 비용 상승을 흡수할 여지가 있다. 중간 규모 영화와 독립영화는 다르다. 제작비와 배급비가 조금만 올라가도 손익분기점이 밀린다. 극장 상영 기회가 줄고 스트리밍 플랫폼의 투자 심사가 보수적으로 변하면, 중간 규모 작품은 가장 먼저 압박을 받는다.
굿즈 산업도 관세와 유가의 교차점에 있다. 응원봉, 의류, 포토카드, 피규어, 앨범 패키지, 캐릭터 상품은 플라스틱, 섬유, 종이, 전자부품, 포장재를 사용한다. 생산지는 한 나라에 고정되지 않고 판매지는 팬덤이 있는 여러 시장으로 나뉜다. 관세는 국가 간 이동 비용을 높이고, 유가는 원자재와 물류비를 끌어올린다. 팬덤 소비가 강한 산업일수록 비용 상승분을 가격에 얼마나 전가할 수 있는지가 수익성을 가른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웹툰 기반 지식재산권도 같은 압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디지털 콘텐츠는 물류 부담이 작아 보이지만, 글로벌 마케팅, 오프라인 행사, 라이선스 상품, 전시, 팝업스토어, 콘서트형 이벤트로 확장되는 순간 실물 비용을 만난다. 플랫폼 공개만으로 끝나는 콘텐츠는 줄고, IP의 수익은 영상, 게임, 공연, 굿즈, 체험형 공간으로 분산된다. 관세와 에너지 비용은 이 확장 경로의 비용표를 다시 쓰게 만든다.
문화산업의 자본은 더 안전한 쪽으로 이동한다. 대형 스튜디오는 검증된 IP와 프랜차이즈, 감독 브랜드, 팬덤이 확인된 작품에 돈을 집중한다. CinemaCon 2026 자료는 디즈니의 프랜차이즈 집결 전략, 유니버설의 감독 브랜드와 IP 결합, 워너브러더스의 대형 프로젝트 중심 전략, 소니의 핵심 IP 집중 전략을 주요 흐름으로 정리했다. 관객의 취향 변화만이 아니라 비용 상승기에 투자 위험을 낮추려는 자본의 선택이기도 하다.
극장 경험의 프리미엄화도 같은 이유로 빨라진다. CinemaCon 2026 자료는 전체 박스오피스 수익 중 약 25~30%가 IMAX와 돌비 시네마 등 프리미엄 포맷에서 나오고, 나머지 70% 이상은 일반 상영관에서 창출되는 구조라고 정리했다. 프리미엄 포맷은 시장 전체를 대체하지 못하지만, 특정 대형 작품의 수익성을 끌어올리는 장치가 됐다. 비용이 오를수록 극장은 더 비싼 관람 경험을 설계하고, 관객은 극장에서 볼 이유가 분명한 작품만 고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문화산업은 오랫동안 국경을 넘는 제작과 유통을 성장의 조건으로 삼았다. 세금 혜택이 있는 곳에서 촬영하고, 비용이 낮은 곳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하고, 팬덤이 큰 도시에서 공연을 열었다. 그 전제는 낮은 물류비, 안정적인 에너지 가격, 예측 가능한 통상 환경, 자유로운 인력 이동이었다. 트럼프 관세와 호르무즈발 에너지 충격은 이 전제를 동시에 흔들었다.
할리우드와 스트리밍, 공연산업이 마주한 문제는 일시적 비용 상승만이 아니다. 제작과 유통의 기본 기준이 바뀌고 있다. 기업은 작품성, 스타 파워, 팬덤 규모만 보는 것이 아니라 촬영지 리스크, 관세 가능성, 유가, 보험료, 환율, 상영 윈도우, 플랫폼 공개 시점을 함께 계산해야 한다. 문화상품은 창작물인 동시에 공급망 위에 놓인 상품이다.
관세가 규칙을 흔들고 전쟁이 통로를 막았을 때, 문화산업은 가장 늦게 타격을 받는 산업이 아니었다. 영화 한 편의 제작비, 극장 한 곳의 운영비, 월드투어 한 도시의 손익분기점은 에너지와 물류, 관세와 소비심리에 묶여 있었다. 비용 상승기의 문화산업은 더 많은 콘텐츠를 만드는 경쟁이 아니라 어떤 콘텐츠에 비용을 걸 수 있는지를 가르는 선별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