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사이트①] 제1회 부여국제히스토리영화제, 백제 고도에서 넓어진 ‘역사’의 범위
정림사지 야외상영으로 지역성 살리고,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으로 장르 확장 시도
[KtN 박준식기자]부여 정림사지에 영화제 스크린이 들어섰다. 제1회 부여국제히스토리영화제가 2026년 5월 2일 충남 부여에서 막을 올리며, 백제 고도의 역사적 공간을 영화 상영장으로 확장했다. 5월 5일까지 나흘간 이어진 영화제는 정림사지 주무대와 야외무대, 정림사지 홍보관, 부여문화원, 금성시네마, 부여청년센터 등 부여읍 곳곳을 상영 거점으로 삼았다. 관객을 하나의 극장 안으로 불러 모으기보다, 도시 전체에 영화제 동선을 펼쳐 놓는 방식에 가까웠다.
부여국제히스토리영화제의 첫 장면은 장소에서 시작됐다. 부여는 백제 사비 도읍의 기억이 남아 있는 도시다. 정림사지는 백제역사유적지구를 구성하는 대표 유산 가운데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설명에는 정림사지,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 능산리 고분군, 나성 등이 사비 수도 부여와 관련된 유산으로 기록돼 있다. 영화제가 첫해부터 정림사지를 중심 무대로 삼은 선택은 부여가 가진 가장 분명한 자산을 영화제의 정체성으로 끌어온 결정이었다.
상영 프로그램은 개·폐막작, 공식장편경쟁, 히스토리, 프로그래머 PICK, 패밀리, BIHFF 스페셜, 무성영화 등으로 나뉘었다. 첫해 상영표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작품과 상대적으로 낯선 작품이 함께 들어갔다. 정림사지 주무대에는 <로봇 태권V>, <명량>,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 등이 배치됐다. 정림사지 야외무대에는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 <탄생>, <4월의 불꽃>, <더 버스>, <구원자> 등이 편성됐다.
대중 인지도가 높은 작품을 주무대에 놓고, 독립·장르영화를 야외무대와 지역 상영관에 배치한 방식은 첫해 지역 영화제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지역 주민과 일반 관객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익숙한 작품이 필요하다. 동시에 영화제가 단순한 지역 행사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평소 극장 체인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작품도 필요하다. 부여국제히스토리영화제의 첫 상영표는 완성된 정체성보다 앞으로의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초기 설계도에 가까웠다.
정림사지 야외무대는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선명한 장면을 만든 공간이었다. 일반 극장 상영은 작품 자체와 관람 환경에 집중하게 한다. 정림사지 야외상영은 여기에 장소의 시간까지 더한다. 관객은 스크린 앞에 앉지만, 동시에 백제 유적이 남아 있는 도시 한복판에 머문다. 지역 영화제가 이미 오래 쌓인 대형 영화제의 산업 규모와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기 어렵다면, 부여가 택할 수 있는 차별화 지점은 이런 장소 경험이다.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은 그 상영표 안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사형제 폐지 이후 극악 범죄자들을 격리한 가상의 자치구역 ‘연옥’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액션 영화다. 왕조의 흥망, 실존 전쟁, 역사 인물의 재현을 다루는 전통적 역사영화와는 결이 다르다. 작품은 격리된 공간 안에서 권력과 폭력, 통제와 생존의 규칙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장르적으로 밀어붙인다.
역사영화제에서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의 편성은 다소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역사라는 범주를 과거 재현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해석의 여지는 생긴다. 제도와 처벌, 권력의 발생, 공동체의 붕괴는 특정 시대에만 머무는 주제가 아니다.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은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삼지만, 인간 사회가 폭력과 통제를 어떻게 제도화하는가라는 질문을 액션 장르 안에서 다룬다. 부여국제히스토리영화제가 이 작품을 상영표 안에 넣은 선택은 ‘히스토리’라는 이름을 사극과 시대극으로만 좁히지 않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 확장은 영화제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부담이다. 역사영화제라는 이름은 관객에게 비교적 분명한 기대를 만든다. 그 기대와 다른 장르영화가 들어올 때는 섹션의 기획 의도와 작품 선정 기준이 더 또렷해야 한다.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이 역사영화제 안에서 설득력을 얻으려면 “왜 이 작품이 히스토리의 범주에 들어오는가”에 대한 설명도 함께 필요하다. 첫해 영화제가 장르의 폭을 넓힌 점은 의미가 있지만, 확장된 범주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영화제가 계속 다듬어야 할 지점이다.
브루스 칸은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에서 극 중 ‘유성’ 역을 맡았다. 격리구역 ‘연옥’에 들어간 인물이 절대 권력자 ‘염왕’에게 다가가는 구조에서, 유성은 영화의 액션과 세계관을 관통하는 축이다. 브루스 칸은 이현명 감독과 함께 공동 연출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배우가 액션을 수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의 장르적 방향에도 관여했다는 점에서,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은 한국 마샬아츠 액션의 현재를 살펴볼 수 있는 사례로 놓인다.
브루스 칸은 이번 영화제에서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으로 무왕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첫 영화제 상영 단계에서 얻은 수상은 작품의 장르적 개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다만 한 번의 수상이 곧바로 한국 마샬아츠 액션의 부활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르의 회복은 극장 개봉 규모, 실제 관객 반응, 해외 판매, 후속 제작 여부까지 이어져야 판단할 수 있다.
브루스 칸의 강점은 스타성보다 신체 능력과 액션 수행력에서 먼저 드러난다. 마샬아츠 액션에서 배우의 몸은 장면을 장식하는 요소에 그치지 않는다. 몸의 속도, 타격의 리듬, 공간을 통과하는 방식이 캐릭터의 서사가 된다.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이 네 개 구역으로 나뉜 범죄자 자치구역과 절대 권력자 ‘염왕’, 그에게 맞서는 ‘유성’의 구조를 내세운다면, 브루스 칸의 액션은 그 세계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직접적인 방식이다.
첫해 영화제의 무료상영은 관객 접근성을 높이는 장치였다.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사전 정보가 많지 않은 작품도 부담 없이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생 영화제에는 이름을 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료상영은 그 시간을 줄이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다만 무료상영이 계속 장점으로 남으려면 운영 구조가 뒤따라야 한다. 지자체 지원, 후원과 협찬, 유료 프로그램, 지역 상권 연계, 관객 데이터 축적이 함께 설계돼야 한다.
야외상영도 같은 성격을 갖는다. 정림사지 야외무대는 부여국제히스토리영화제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효과적인 공간이다. 사진으로 남기 좋고, 도시의 역사성을 관객이 체감하기 쉽다. 반면 영화 관람 환경으로는 변수가 많다. 스크린 밝기, 음향, 좌석 편의성, 기온, 우천 대응, 이동 동선은 관객 만족도를 좌우한다. 야외상영을 영화제의 대표 장면으로 가져가려면 대체 동선과 운영 매뉴얼도 함께 정교해져야 한다.
제1회 부여국제히스토리영화제는 역사 도시라는 자산을 물리적 배경 이상으로 활용하려 했다. 정림사지 야외상영, 부여읍 곳곳으로 분산된 상영 공간, 대중 역사영화와 독립·장르영화의 병치, <연옥: 살인마들의 자치구역> 같은 디스토피아 액션의 편성은 첫해 영화제가 남긴 주요 장면이다. 역사라는 키워드를 과거 재현에만 묶지 않고 장르영화까지 확장하려 한 시도는 첫 회 영화제의 의미 있는 선택으로 기록될 만하다.
부여국제히스토리영화제의 다음 평가는 첫해의 장면이 반복 가능한 구조로 이어지는지에 달려 있다. 수상 기록의 정리, 상영작별 관객 반응 축적, 야외상영 운영 보완, 지역 상권과의 연계, 프로그램 정체성의 정교화가 뒤따라야 한다. 백제 고도의 장소성은 신생 영화제가 의지할 수 있는 뚜렷한 자산이다. 그 자산이 영화제의 지속성으로 이어질지는 첫 회의 화제보다 다음 행사의 구성과 기록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