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인사이트①] 베니스의 상인, 신구·박근형의 고전 귀환이 묻는 법과 인간성
7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개막…셰익스피어 법정에 세대 다른 배우들이 선다
[KtN 김동희기자]5월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 NOL 서경스퀘어에 셰익스피어의 법정이 먼저 열렸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 기자간담회에는 오경택 연출을 비롯해 신구, 박근형, 이승주, 카이, 최수영, 원진아, 이상윤, 김슬기, 김아영, 최정헌, 박명훈, 한세라 등이 참석했다. 7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개막을 앞둔 자리에서 고전의 이름, 원로 배우의 무게, 대중문화 영역과 맞닿은 배우들의 참여가 한 작품 안에 놓였다.
‘베니스의 상인’은 한 건의 계약에서 출발한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의 구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린다. 기한 안에 빚을 갚지 못하면 자신의 살 1파운드를 내어준다는 조건이다. 금전 거래로 시작된 약속은 채무 관계를 넘어 생명과 법적 권리가 맞부딪치는 재판으로 이어진다.
베니스의 채무 서사와 벨몬트의 구혼 서사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움직인다. 바사니오는 포셔의 시험을 통과해 사랑을 얻고, 안토니오는 바사니오를 위해 위험한 계약을 받아들인다. 두 이야기는 법정에서 만난다. 사랑과 우정, 계약과 복수, 법과 자비가 한 공간에 놓이는 순간부터 ‘베니스의 상인’은 희극의 외형을 넘어선다.
셰익스피어 고전이 다시 무대에 오르는 이유는 익숙한 제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미 알려진 작품은 관객의 진입 장벽을 낮추지만, 익숙함은 동시에 부담이 된다. 줄거리와 결말을 알고 있는 관객 앞에서 제작진이 새롭게 보여줘야 하는 것은 사건의 순서가 아니라 해석의 방향이다. 샤일록을 탐욕과 복수의 인물로 세울 것인지, 배제된 사람이 법의 언어에 매달리는 인물로 볼 것인지에 따라 공연의 결은 달라진다.
박근형은 샤일록 역을 전 회차 단독 원캐스트로 맡는다. 샤일록은 ‘베니스의 상인’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계약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권리의 언어는 잔혹한 요구와 맞닿아 있다. 복수를 향한 감정의 배경에는 베니스 사회 안에서 받아온 멸시와 배제가 놓인다. 샤일록을 단순한 악역으로 세우면 작품은 명료해진다. 그러나 지나친 명료함은 작품이 품은 불편한 질문을 지운다.
신구는 베니스의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공작 역으로 출연한다. 공작은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계약이 재판으로 넘어간 뒤 법정의 공적 질서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신구와 박근형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이어 다시 한 무대에 선다. 앞선 무대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함께 견뎠던 두 배우는 이번 작품에서 판결의 시간 앞에 놓인다. 법정의 권위와 법의 문장에 기대어 권리를 요구하는 샤일록의 존재가 무대의 긴장을 만든다.
안토니오는 작품 제목이 가리키는 베니스의 상인이지만, 사건을 밀어붙이는 인물이라기보다 자신이 받아들인 계약의 결과를 온몸으로 감당하는 인물에 가깝다. 친구 바사니오를 위한 선택은 우정과 희생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재판 장면에 이르면 생명을 담보로 한 법적 책임이 된다. 안토니오 역에는 이승주와 카이가 캐스팅됐다. 같은 배역을 두 배우가 나눠 맡으면서 우정과 체념, 책임과 두려움의 비중도 회차마다 달라질 수 있다.
포셔 역은 최수영과 원진아가 맡는다. 포셔는 벨몬트의 구혼 시험에서 출발하지만, 작품 후반 법정 장면에서 흐름을 바꾸는 인물이다. 힘은 감정의 호소가 아니라 법의 문장을 다루는 능력에서 나온다. 포셔가 말하는 자비가 구원의 언어인지, 승자의 위치에서 내려지는 관용인지도 무대가 풀어야 할 문제다. ‘베니스의 상인’이 현재 관객에게 여전히 논쟁적인 작품으로 남는 이유도 법정 장면에 있다.
바사니오 역에는 이상윤이 원캐스트로 출연한다. 바사니오는 베니스와 벨몬트를 잇는 인물이다. 안토니오의 위험한 계약은 바사니오의 필요에서 비롯되고, 포셔와의 관계는 벨몬트의 서사를 움직인다. 사랑을 얻기 위한 선택이 친구의 생명을 건 계약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희극적 표면 아래 놓인 불안이다. 바사니오는 낭만적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법정 비극의 출발점을 만든 인물이다.
제시카 역에는 김슬기와 김아영이 이름을 올렸다. 제시카는 샤일록의 딸로, 로렌조와 함께 다른 삶을 꿈꾸는 인물이다. 로렌조 역은 최정헌이 맡는다. 랜슬럿 역에는 박명훈과 조달환, 네리사 역에는 한세라가 출연한다. NOL 티켓 예매 페이지에는 살레리오 역 박민관, 솔라니오 역 조한준, 투발 역 이원승, 모로코 왕자 역 이지수, 아라공 왕자 역 이종영, 앙상블 박승재·엄현수·김윤지·이준일·주홍 등도 출연진으로 표기돼 있다.
캐스팅의 폭은 최근 공연시장의 흐름을 함께 보여준다. 신구와 박근형은 무대의 신뢰를 세우는 이름이다. 이승주, 카이, 최수영, 원진아, 이상윤 등은 연극뿐 아니라 뮤지컬, 드라마, 영화, 대중문화 영역과도 맞닿아 있다. 고전 텍스트의 권위만으로 객석을 움직이기 어려운 시대에 작품의 이름, 배우의 세대, 팬덤의 이동, 공연장의 규모가 동시에 작동하는 방식이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라는 공간도 공연의 성격을 드러낸다. 기자간담회가 열린 대학로는 한국 연극의 상징적 장소이고, 실제 공연장이 될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대형 무대의 규모를 갖춘 공간이다. 소극장 밀도에 익숙한 연극 관객에게 대형 공연장은 다른 감각을 요구한다. 배우의 발화, 법정 장면의 긴장, 희극적 리듬, 무대 미술과 음악의 운용 방식이 넓어진 공간 안에서 다시 조정돼야 한다. 고전의 대형화는 주목도를 높이는 동시에 완성도에 대한 부담도 키운다.
‘베니스의 상인’이 다시 불려 나온 배경에는 고전에 대한 향수만 있지 않다. 법적 권리와 도덕적 판단이 충돌하는 사회, 계약의 문장이 인간의 처지를 압도하는 장면, 타자를 향한 혐오와 배제가 반복되는 현실은 작품의 질문을 낡지 않게 만든다. 샤일록의 요구는 잔혹하지만, 샤일록을 둘러싼 세계 역시 순진하지 않다. 포셔의 판결은 통쾌하지만, 판결 뒤에 남는 뒷맛도 단순하지 않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은 7월 8일부터 8월 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NOL 티켓 자료 기준 러닝타임은 인터미션 20분을 포함해 140분이다. 객석을 움직이는 힘은 배우의 이름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공연 뒤에 남는 평가는 다른 곳에서 결정된다. 샤일록과 안토니오, 포셔가 마주하는 법정이 2026년 한국 관객에게 얼마나 현재의 질문으로 다가가는가. 법정 문이 열리는 순간, 고전의 귀환은 흥행보다 먼저 해석의 시험대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