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조선 미래비전, 울산 도크에서 다시 짠 제조업 경쟁력
이재명 대통령 HD현대중공업 현장 시찰…AI 조선소·친환경 선박·핵심기술 국산화·지역 상생으로 중국 물량 공세 대응
[KtN 박준식기자]13일 오후 울산 동구 HD현대중공업 도크. 이재명 대통령은 초대형 컨테이너선과 LNG 운반선이 건조되는 현장을 둘러보며 한국 조선업의 현재와 다음 경쟁력을 함께 확인했다. 1972년 설립된 HD현대중공업은 국내 최초 대형 조선소이자 세계 최대 규모 조선소로, 현재 14개 도크에서 초대형 컨테이너선과 LNG 운반선, LPG 운반선, 암모니아 운반선 등을 건조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정기선 HD현대 회장의 안내로 도크를 시찰하며 선박 건조 과정, 최근 수주 실적, 글로벌 시장 동향을 물었다. 현장에서는 카타르 등이 발주한 LNG 운반선 건조 상황, 노르웨이가 발주한 LNG 운반선 내부, 한국형 LNG 화물창 기술개발 현황이 차례로 소개됐다. 정 회장은 스마트 조선소 구축을 통한 생산 체질 혁신과 디지털 기반 경쟁력 강화를 설명했다.
울산 방문은 조선업 현장 격려에 그치지 않았다. 중국이 물량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세계 조선시장에서 점유율을 키우는 상황에서, 한국 조선업의 승부처를 고부가 선박, 친환경 기술, AI 조선소, 핵심 기자재 국산화, 지역 산업생태계로 옮기려는 이재명 정부의 산업정책 행보로 읽힌다. 기존 주력 제조업을 과거의 산업으로 밀어내지 않고, 디지털 전환과 에너지 전환의 중심에 다시 세우겠다는 접근이다.
글로벌 조선시장은 중국 쏠림이 뚜렷하다. 클락슨리서치 집계 기준 2026년 4월 전 세계 선박 발주량에서 중국은 67%, 한국은 16%를 수주했다. 수주 잔량도 중국 1억2425만CGT, 한국 3702만CGT로 벌어졌다
수주량만 놓고 보면 중국의 우위가 뚜렷하다. 그러나 조선업의 경쟁력은 배를 많이 따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LNG 운반선, 암모니아선, 수소운반선, 액화이산화탄소 운반선, 전기추진선, 해상풍력지원선, 극지쇄빙선처럼 에너지 전환과 해양 안보가 맞물린 선종에서는 설계, 화물창, 추진체계, 기자재, 선급 인증, 납기 신뢰도가 함께 경쟁력을 만든다. 한국 조선업이 가격 경쟁보다 기술 밀도와 생산 정밀도, 고부가 선종으로 승부해야 하는 이유다.
국제 규제 환경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25년 4월 선박 연료의 온실가스 집약도 기준과 배출 가격제를 결합한 넷제로 프레임워크 초안을 승인했다. 이 틀은 대형 외항선에 연료 기준과 배출 비용을 함께 적용하는 방향으로, 국제 해운의 탈탄소 전환을 제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장치다.
환경규제 강화는 한국 조선업에 부담이면서 기회다. 선주들은 앞으로 선박 가격만 보지 않는다. 탄소 비용, 연료 전환, 운항 효율, 규제 대응 능력을 함께 따진다. LNG 이후 암모니아, 메탄올, 수소, 전기추진, 자율운항 기술을 선점하는 조선사가 더 높은 협상력을 갖게 된다. 이재명 정부가 K-조선 미래비전에서 친환경 선박과 AI 조선소를 앞세운 배경도 여기에 있다.
정부가 이날 제시한 K-조선 미래비전은 본진 강화, 시장 확대, 상생 생태계 구축으로 짜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5년간 최대 5250억원을 투자해 LNG 운반선, 암모니아선, 수소운반선, 액화이산화탄소 운반선 등 핵심 선종의 화물창 기술을 확보하고, 전기추진선과 해상풍력지원선, 극지쇄빙선 자립화에도 나서기로 했다.
현장에서 소개된 한국형 LNG 화물창은 이 전략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LNG 화물창은 영하 163도의 극저온 상태를 유지하며 액화천연가스의 기화를 막는 고난도 기술이 적용되는 분야다. 선박을 많이 짓는 능력과 별개로, 핵심 기자재와 화물창 기술을 어느 나라가 갖고 있느냐에 따라 부가가치와 협상력이 달라진다. 이 대통령이 LNG 화물창 단면 구조를 살피며 기술개발 현황, 국산화 수준, 해외 경쟁력에 관심을 보인 장면은 K-조선 정책의 초점이 수주 확대를 넘어 기술 자립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AI 조선소 구축도 정부가 내세운 또 다른 축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민관 합동으로 약 1조원을 투입해 24시간 자율 운영이 가능한 조선소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설계와 생산, 운영 등 조선소 전 공정에 AI와 자동화 기술을 적용하고, 완전자율운항 선박 개발에는 7년간 6300억원을 별도로 투입한다.
조선소의 디지털 전환은 단순한 자동화가 아니다. 조선소는 대형 블록 이동, 용접, 도장, 배관, 의장, 시운전이 동시에 맞물리는 복합 생산 현장이다. 공정 하나가 밀리면 납기와 원가가 흔들린다. AI 조선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설계 단계의 디지털 트윈, 생산 현장의 로봇과 센서, 야드 운영 최적화, 협력업체 공정 관리가 하나로 연결돼야 한다. 간담회장에 전시된 AI 기반 장비, 운반 가능한 용접 로봇, 도장 VR 기기는 조선업 경쟁력이 도크 규모만이 아니라 생산 시스템의 정밀도에서 갈린다는 점을 보여준다.
금융 지원도 함께 묶였다. 정부는 K-조선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해 16조원 규모의 상생 무역금융을 공급하기로 했다. 신한·우리·하나은행과 무역보험공사가 무역금융 공급 규모를 15조원으로 확대하고, 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 등 대형 조선사는 1조원 규모의 공급망 보증을 맡는 구조다.
조선업에서 금융은 수주 경쟁의 뒤편에 있는 핵심 조건이다. 선박은 계약에서 인도까지 시간이 길고, 협력업체는 원자재와 인건비를 먼저 부담해야 한다. 기자재 기업과 중소 협력사가 자금 압박에 막히면 대형 조선사의 수주도 실제 생산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16조원 상생 무역금융은 대형 조선사의 수주 온기가 공급망으로 내려가도록 만드는 혈맥에 가깝다.
이재명 정부의 산업정책은 기존 주력 제조업을 AI와 친환경 기술, 핵심기술 국산화, 정책금융, 지역균형발전과 결합하는 방향으로 잡혔다. 반도체와 AI가 미래 성장축으로 제시됐다면, 조선업은 한국 제조업의 생산 기반과 현장 경쟁력을 보여주는 산업으로 다시 전면에 놓였다. 울산 조선소 현장에서 K-조선 미래비전이 논의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조선산업이 지역 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수도권에서 멀수록 지원을 강화한다는 원칙도 다시 언급했다. 울산, 거제, 목포, 영암 등 주요 조선업 거점은 대부분 비수도권 산업도시다. 조선업 정책은 특정 기업의 수주 지원에 그치지 않고 지역 일자리, 협력업체, 기자재 산업, 숙련 인력 정착과 맞물려 있다.
HD현대가 중소 조선소와 협력해 추진 중인 ‘반선 프로젝트’도 산업 생태계 확장과 연결된다. 정기선 회장은 반선 건조에 대해 선박의 앞뒤를 각각 다른 조선소에서 제작한 뒤 결합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건조 유연성을 높이고 대형 조선소와 중소 조선소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상생 모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대형 조선사의 수주가 중소 조선소와 기자재 기업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K-조선의 산업 기반도 두꺼워진다.
정부는 2030년까지 조선업 전문·숙련인력 1만5000명을 양성하기로 했다. 고령 퇴직자가 현장 경험을 전수하는 OJT 아카데미 운영도 추진한다. 대형 조선 3사는 올해 직영 인력을 전년보다 20% 이상 늘리기로 했다. 조선업 경쟁력은 설비와 자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도면을 읽고, 용접 품질을 맞추고, 위험한 야드에서 공정을 지켜내는 숙련 인력이 산업의 바닥을 이룬다.
대통령실 브리핑에는 도크 곳곳에 “아빠 올 때 치킨! 다치지 말고”라는 안전 문구가 게시돼 있었다는 내용도 담겼다. 조선소는 고소 작업, 중량물 이동, 밀폐공간 작업, 용접과 도장이 겹치는 고위험 현장이다. 숙련 노동자의 생명과 기술을 지키는 일은 생산성과 분리할 수 없는 과제다.
K-조선 미래비전은 조선업을 경기순환 산업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수주가 늘면 살아나고 줄면 구조조정하는 방식만으로는 중국의 추격, 친환경 규제, 인력 부족, 공급망 압박을 넘기 어렵다. 정부가 핵심 선종 기술, AI 조선소, 상생 금융, 숙련 인력, 안전, 지역 산업 기반을 함께 제시한 것은 주력 제조업을 다음 세대 산업으로 옮기려는 시도에 가깝다.
남은 과제는 실행이다. 한국형 LNG 화물창은 대형선 실증과 실제 운항 실적으로 경쟁력을 입증해야 한다. AI 조선소는 대형 조선소 내부 공정뿐 아니라 협력업체의 생산 일정과 품질 관리까지 연결돼야 효과를 낼 수 있다. 상생 무역금융도 중소 협력사가 낮은 비용과 빠른 절차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의 물량 공세와 고부가 선종 추격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13일 울산 도크에서 열린 K-조선 미래비전 간담회는 이재명 정부 산업정책의 한 방향을 보여줬다. 제조업을 과거의 성장 방식에 묶어두지 않고 AI, 친환경 기술, 핵심 기자재, 금융, 인력, 지역 생태계와 다시 연결하는 접근이다. 발표된 투자와 금융이 실제 야드의 생산성, 협력업체의 체력, 고부가 선박 수주 경쟁력으로 이어지는지가 앞으로 확인해야 할 대목이다. K-조선의 다음 경쟁력은 도크의 규모만이 아니라 그 안에 축적되는 기술과 사람, 지역 산업망의 밀도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