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패권 재편②] AI 반도체, 미중 패권의 외교 카드가 됐다
미국은 첨단 칩을 통제하면서 AI 기술 묶음 수출에 나섰고 중국은 화웨이 칩과 자국 모델로 엔비디아 의존을 낮추고 있다
[KtN 최기형기자]미국 백악관은 지난해 7월 ‘미국 AI 행동계획’을 공개했다. 문서의 축은 세 가지였다. 혁신 가속, 미국 AI 인프라 구축, 국제 외교·안보 주도다. 같은 날 백악관은 미국산 AI 기술 묶음을 동맹과 우방국에 수출하는 행정명령도 내놨다. 수출 대상에는 반도체와 서버 같은 하드웨어만 들어가지 않았다. 데이터 시스템, AI 모델, 사이버보안, 의료·교육·농업·교통 분야 응용 서비스까지 함께 묶였다. AI 경쟁이 기업 제품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기술질서 경쟁으로 넘어갔다는 장면이다.
챗GPT 공개 직후 시장의 관심은 모델 성능에 쏠렸다. 어느 모델이 더 자연스럽게 답하는지, 더 긴 문서를 처리하는지, 더 어려운 코딩 문제를 푸는지가 기업가치와 주가를 흔들었다. 지금의 쟁점은 다르다. 어느 나라의 칩으로 학습하고, 어느 나라의 클라우드에서 서비스하며, 어느 나라의 규범에 맞춰 팔 것인지가 AI 산업의 향방을 가른다. 모델 성능표 위에서 벌어지던 경쟁은 반도체 수출허가, 데이터센터 입지, 전력망, 동맹 외교, 규제 표준으로 번졌다.
미국의 움직임은 통제와 확산을 동시에 겨냥한다. 중국에는 첨단 AI 반도체 접근을 제한하고, 동맹과 우방국에는 미국식 AI 기술 묶음을 팔아 표준을 넓히는 방식이다. 백악관 AI 행동계획은 90개가 넘는 연방 정책 조치를 담았고, 국제 외교·안보를 별도 축으로 세웠다. 행정명령에는 미국 상무부가 ‘미국 AI 수출 프로그램’을 만들고, 산업계가 주도하는 AI 수출 패키지를 선정해 해외 배치를 지원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대중 반도체 통제는 더 복잡하게 움직인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은 지난해 5월 바이든 행정부 때 마련된 ‘AI 확산 규칙’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해당 규칙은 2025년 1월 발표됐고, 같은 해 5월 15일부터 준수 의무가 적용될 예정이었다. 상무부는 당시 규칙이 미국 혁신을 위축시키고 여러 국가를 사실상 2등급으로 낮춰 외교관계를 해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통제의 틀을 푼 듯 보였지만, 중국을 향한 첨단 칩 관리는 여전히 허가와 협상의 영역에 남았다.
엔비디아 H200의 중국 판매를 둘러싼 흐름은 이 모순을 보여준다. 로이터는 14일 미국 정부가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트댄스, JD닷컴 등 약 10개 중국 기업의 H200 구매를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다만 실제 판매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당국의 구매 자제 기류, 미국의 보안 조건, 수익 공유 구조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첨단 AI 칩은 이제 기업 간 거래 물품이 아니라 정상외교와 수출허가, 안보 조건이 붙는 전략물자가 됐다.
중국은 미국산 칩을 기다리는 대신 자국 생태계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딥시크는 지난 4월 화웨이 Ascend 칩에 맞춘 새 AI 모델을 공개했다. 로이터는 딥시크의 새 모델이 화웨이 칩에 최적화됐고, 화웨이가 Ascend 950 칩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딥시크와 긴밀히 협력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빅테크 기업들이 화웨이 AI 칩 확보에 나섰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미국 수출통제가 중국의 첨단 칩 접근을 어렵게 만들자, 중국은 모델과 칩을 함께 맞추는 방식으로 우회로를 넓히고 있다.
화웨이 칩이 엔비디아 최상위 제품을 곧바로 대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첨단 반도체 제조장비 접근 제한, 생산 수율, 대량 공급 능력,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모두 변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중국 기업이 모델 구조와 추론 환경을 자국 칩에 맞추기 시작한 변화는 작지 않다. 미국의 통제는 중국의 속도를 늦추는 동시에 중국 내부 기술 생태계를 키우는 압력으로도 작동하고 있다.
유럽은 다른 문법으로 AI 질서에 개입한다. 미국이 칩과 인프라, 중국이 자립 생태계를 앞세운다면 유럽연합은 법으로 시장의 문턱을 정하고 있다. EU AI Act에 따라 금지 AI 행위와 AI 리터러시 의무는 2025년 2월 2일부터 적용됐다. 범용 AI 모델 관련 거버넌스와 의무는 2025년 8월 2일부터 적용됐고, 일부 고위험 AI 시스템 규칙은 2028년 8월 2일까지 전환기간을 둔다. 유럽 시장에 들어가려는 기업은 모델 성능뿐 아니라 문서화, 투명성, 저작권, 안전관리 체계를 함께 갖춰야 한다.
미국, 중국, 유럽의 AI 전략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세계 기업을 압박한다. 미국은 자국 AI 스택을 수출해 동맹권의 기본 기술을 미국산으로 묶으려 한다. 중국은 미국의 통제망을 피해 칩과 모델을 함께 키운다. 유럽은 법과 규범으로 기업의 개발·판매 방식을 바꾼다. AI 패권 경쟁은 어느 나라가 더 뛰어난 챗봇을 만들었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나라의 반도체, 클라우드, 보안 기준, 규제 문서가 세계 시장의 기본값이 되는지의 문제로 바뀌었다.
한국 기업에는 기회와 부담이 동시에 온다. 미국 AI 인프라 투자가 커지면 HBM과 메모리 반도체, 서버 부품, 전력 장비 수요가 늘어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메모리 기업에는 단기 수혜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대중 수출통제가 강화되거나 중국의 국산화 속도가 빨라지면 한국 기업의 시장 운용 폭은 좁아진다. 유럽 AI Act는 한국 AI 서비스 기업에도 문서화와 위험관리 부담을 높인다.
한국이 반도체 공급망의 수혜자에 머물지, AI 질서의 설계자 쪽으로 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메모리와 부품은 강하지만 독자 모델, 클라우드, 산업용 AI 서비스, 규범 대응 능력은 더 검증받아야 한다. 미중 AI 경쟁은 한국에 물량을 주는 동시에 선택을 요구한다. 반도체 수요 증가만으로 안심하기에는 AI 패권의 무대가 이미 외교와 안보, 통상과 규범까지 넓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