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같은 문화의 이름③] 씨름은 길을 열었고, 태권도는 더 어려운 등재 방정식 앞에 섰다
2018년 남북 최초 공동등재는 유네스코 중재와 정부 외교가 만든 선례 태권도는 남북 제도, ITF·WT 체계, 올림픽 종목, 도장 전승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
[KtN 임우경 · 박준식기자] 2018년 11월 26일 모리셔스 포트루이스에서 열린 제13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는 ‘씨름’을 남북 최초의 공동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공식 명칭은 ‘씨름, 한국의 전통 레슬링’이었다. 한국과 북한이 각각 제출한 신청서가 유네스코 절차 안에서 하나의 공동유산으로 병합됐다. 남북 문화유산 공동등재의 첫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한국은 2016년 3월 씨름 등재신청서를 냈고, 북한은 2015년 3월 먼저 신청서를 제출했다. 북한 신청서는 2016년 제11차 정부간위원회에서 정보보완 판정을 받은 뒤 2017년 3월 수정 제출됐다. 남북 신청서는 처음부터 공동신청서가 아니었다. 따로 출발한 신청서가 심사 과정에서 공동등재로 전환됐다. 태권도 남북 공동등재 논의가 씨름 사례를 계속 불러오는 이유는 절차 전환의 선례 때문이다.
2018년 씨름 공동등재 과정에는 정부 외교가 깊숙이 들어갔다. 외교부와 문화재청은 남북 씨름 공동등재를 추진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10월 16일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접견해 씨름 공동등재를 논의했다. 한국과 북한은 각각 공동등재 요청 서한을 냈고, 유네스코 사무국은 씨름 공동등재 안건을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 긴급안건으로 올렸다. 24개 위원국은 만장일치로 공동등재를 결정했다.
씨름 공동등재는 남북이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는 주장만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남북 씨름의 연행과 전승 양상, 공동체에 대한 사회·문화적 의미에 공통점이 있다는 판단이 있었고, 평가기구도 남북 씨름 모두에 등재 권고를 냈다. 남북 당국의 동의, 유네스코의 중재, 정부 외교가 맞물리면서 전례 없는 공동등재가 가능해졌다.
북한은 2024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통무술-태권도’라는 이름으로 등재신청서를 먼저 제출했다. 한국은 2026년 3월 31일 ‘태권도: 한국의 도장 공동체 수련문화’라는 이름으로 신청서를 냈다. 남북이 같은 이름의 유산을 따로 올린 구도는 2018년 씨름 공동등재 당시와 닮아 있다.
최재춘 코리아태권도 유네스코 추진단은 씨름 공동등재 이후 태권도 남북 공동등재 가능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본지가 축적해온 취재 흐름에서 추진단은 태권도를 남북이 공유하는 문화유산으로 설명했고, 북측 ITF 계열과의 접촉 가능성을 넓히는 데 힘을 쏟아왔다. 씨름 공동등재는 남북이 따로 제출한 유산도 국제기구 절차 안에서 하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있다는 현실적 근거가 됐다.
씨름은 남북 모두에서 민속놀이와 전통 경기의 성격이 강했다. 명절, 장터, 마을 공동체, 생활 속 놀이문화와 이어져 왔고, 남북 전승 양상의 공통성도 유네스코 심사 과정에서 확인됐다. 태권도는 다른 제도 지형 위에 놓여 있다. 남측에는 국기원·세계태권도연맹·대한태권도협회·태권도진흥재단 체계가 있고, 북측에는 ITF 계열 전승 체계가 자리한다.
세계인이 기억하는 태권도에는 올림픽 종목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한국 신청서가 앞세운 태권도는 도장을 중심으로 사범과 수련생이 관계를 맺고, 몸의 기술과 생활 규범을 함께 익히는 공동체 수련문화다. 북한 신청서의 태권도는 ‘전통무술’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됐다. 같은 태권도 안에서도 남측은 도장 공동체, 북측은 전통무술, 국제사회는 스포츠 종목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 수 있다. 씨름의 형식을 태권도에 그대로 옮기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8년 한반도에는 평창동계올림픽과 남북 정상회담 이후의 대화 흐름이 있었다. 씨름 공동등재는 남북 화해 분위기와 맞물렸다. 2026년 태권도 논의는 전혀 다른 국면에 놓여 있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고, 정치·군사 대화는 사실상 막혀 있다. 태권도 공동등재는 평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추진되는 교류 사업이 아니라, 단절 국면에서 문화유산을 통해 협의의 통로를 찾는 외교 과제에 가깝다.
문재인 대통령의 유네스코 사무총장 접견, 남북의 공동등재 요청 서한, 유네스코 사무국의 긴급안건 상정은 2018년 씨름 공동등재를 움직인 핵심 장면이었다. 태권도 공동등재도 민간 추진과 태권도계 결집만으로 완성되기 어렵다. 문화체육관광부, 국가유산청, 외교부, 통일부가 각각 맡을 역할을 정리하고, 유네스코와 회원국을 상대로 남북 공동등재 또는 확장등재의 명분을 설명해야 한다.
2018년 씨름 남북 공동등재 당시 신청서 실무를 맡았던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는 태권도 신청서 보완 과정에도 참여했다. 씨름의 경험이 태권도 신청서 작성과 절차 검토에 참고됐다는 뜻이다. 남북이 각각 신청한 유산을 하나의 공동유산으로 묶어낸 경험은 태권도에도 유효한 자산이다. 다만 씨름의 문서 경험이 태권도의 절차를 자동으로 열어주지는 않는다.
세계 각국의 도장과 국제대회, 올림픽 종목으로 자리 잡은 태권도는 이미 넓은 전승 기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된 스포츠 이미지가 강할수록 유네스코 무형유산이 요구하는 공동체성과 전승성을 더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태권도 등재 논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 무술”이 아니라 “도장 공동체 안에서 살아 있는 수련문화”라는 설명 위에 서야 한다.
북한 신청서는 2024년 먼저 유네스코 절차에 들어갔다. 한국 신청서는 2026년에 제출됐다. 신청 순서가 갈라지면서 병합과 확장등재를 둘러싼 절차 조율은 더 복잡해졌다. 북한 등재 전 병합이 가능한지, 북한 등재 뒤 한국이 확장등재로 참여할 수 있는지, 한국 신청서의 2028년 심사 일정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가 남은 쟁점이다.
부산에서 열리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태권도 등재를 결정하는 회의가 아니다. 결정 회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히 전제해야 정부 외교의 방향도 흐려지지 않는다. 부산에는 유네스코 고위 관계자와 회원국 대표단이 모인다. 정부가 태권도 남북 공동등재의 취지와 씨름 선례를 설명하고, 무형유산 심사 절차와 별도로 협조 기반을 쌓을 수 있는 외교 무대로 활용할 수 있다.
2018년 씨름 공동등재는 태권도에 하나의 가능성을 남겼다. 남북이 따로 제출한 문화유산도 공통 전승과 남북 동의, 유네스코 중재, 정부 외교가 맞물리면 하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있었다. 태권도는 같은 길을 더 좁은 조건에서 다시 걸어야 한다. 남북 제도 차이, 국제연맹의 역사, 올림픽 종목의 이미지, 도장 공동체 전승, 북한의 선행 신청까지 함께 설명해야 한다.
태권도 남북 공동등재의 성패는 씨름 선례의 반복이 아니라 응용에 달려 있다. 씨름은 문을 열었고, 태권도는 더 복잡한 열쇠를 요구한다. 남북이 같은 문화의 이름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제도와 정치 현실 속에서도 공동의 유산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근거를 유네스코 절차 안에서 다시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