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같은 문화의 이름⑤] 적대의 시대에 남은 태권도, 평화는 도장에서 시작된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 이후 좁아진 남북 접촉면 태권도 공동등재는 정치 해법보다 문화협의의 통로에 가깝다

2026-05-22     임우경 기자
한국은 2026년 3월 31일 ‘태권도: 한국의 도장 공동체 수련문화’라는 이름으로 신청서를 냈다.  /사진=KOREA 태권도 유네스코 등재추진단,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우경 · 박준식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23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과 남북 정상회담 이후 만들어졌던 화해의 언어는 북한의 대남 노선 전환 이후 빠르게 사라졌다. 태권도 남북 공동 유네스코 등재 논의는 바로 이 단절의 시간표 위에 놓여 있다.

북한은 2024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통무술-태권도’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신청서를 먼저 제출했다. 한국은 2026년 3월 31일 ‘태권도: 한국의 도장 공동체 수련문화’라는 이름으로 신청서를 냈다. 남북관계가 적대와 단절의 언어로 바뀐 뒤에도, 같은 문화명을 가진 태권도는 유네스코 절차 안에서 다시 마주 섰다.

2018년 씨름 공동등재 당시 한반도에는 평창동계올림픽, 남북 정상회담, 유네스코 사무총장 접견, 남북의 공동등재 요청 서한이 한 흐름 안에 있었다. 2026년 태권도 논의는 정치·군사 대화가 막힌 상태에서 진행된다. 같은 문화의 이름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공동의 이름으로 등재를 추진할 외교 환경은 훨씬 좁아졌다.

2018년 씨름 공동등재 당시 한반도에는 평창동계올림픽, 남북 정상회담, 유네스코 사무총장 접견, 남북의 공동등재 요청 서한이 한 흐름 안에 있었다.  /사진=청와대,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은 태권도 공동등재 논의를 더 무겁게 만든다. 남북관계가 대화와 교류의 언어에서 적대와 분리의 언어로 옮겨간 상황에서, 태권도 공동등재는 평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추진되는 교류 사업이 아니다. 정치가 멈춘 자리에 문화유산 절차가 남아 있고, 태권도는 남북이 같은 이름을 다시 다룰 수 있는 제한된 의제로 떠올랐다.

최재춘 코리아태권도 유네스코 추진단은 태권도 유네스코 등재를 체육계 현안으로만 다루지 않았다. 본지가 축적해온 취재 흐름에서 최재춘 추진단은 태권도를 남북이 공유하는 문화유산이자 세계 태권도인이 함께 전승해온 수련문화로 설명해왔다. 2026년 5월 태권도계 6개 단체 결집과 범국민 100만 서명운동은 등재 논의를 태권도계 내부 의제에서 국민적 문화유산 의제로 넓히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태권도가 평화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근거는 경기장보다 도장에 있다. 한국 신청서의 명칭은 ‘태권도: 한국의 도장 공동체 수련문화’다. 도장에서는 사범과 수련생이 몸의 기술을 익히고, 예의와 절제의 규범을 배우며, 수련생 일부가 다음 세대를 지도하는 사범으로 성장한다. 유네스코 신청에서 태권도는 국가 상징이나 올림픽 종목만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이어지는 생활문화로 제시됐다.

이 대통령은 남북 대화 재개를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을 설명하며 폴란드의 지지에 사의를 전했다. /사진=청와대,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평화의 언어는 선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태권도 공동등재가 남북관계를 곧바로 바꾸거나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지우지는 못한다. 남북이 같은 문화의 이름을 국제기구 절차 안에서 다룰 수 있다면, 군사와 적대의 언어만으로 한반도를 설명하는 흐름에 작은 균열을 낼 수 있다. 문화유산 외교는 막힌 관계를 한 번에 여는 해법이 아니라, 협의 가능한 의제를 남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재명 정부는 2026년 2월 공개한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에서 남북 간 평화공존 제도화, 한반도 공동성장 기반 구축, 전쟁과 핵 없는 한반도 실현을 목표로 제시했다. 추진 원칙에는 북한 체제 존중, 흡수통일 불추구, 적대행위 불추진이 포함됐다. 태권도 공동등재는 정부 정책의 성과로 단정할 수 없지만, 평화공존 기조가 문화유산 분야에서 만날 수 있는 구체 의제다.

통일부의 평화공존 정책은 교류, 관계정상화, 비핵화를 함께 다루는 접근을 담고 있다. 북측이 호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규모 정치회담이나 경제협력 사업은 단기간에 추진하기 어렵다. 태권도 공동등재는 군사·경제 현안보다 낮은 단계의 문화 의제다. 낮은 단계라는 표현은 중요도가 낮다는 뜻이 아니다. 안보 현안보다 먼저 협의할 수 있는 작은 접촉면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최재춘 추진단장,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잇따라 만나 태권도 유네스코 등재 추진 현황을 보고하고 정부 차원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사진=KOREA 태권도 유네스코 등재추진단,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북한 신청서와 한국 신청서는 태권도를 다르게 설명한다. 북한은 ‘전통무술’이라는 명칭을 썼고, 한국은 ‘도장 공동체 수련문화’를 앞세웠다. 같은 이름 안에 다른 제도와 역사, 전승 방식이 놓여 있다. 공동등재가 가능하려면 차이를 숨기기보다 공통 기반을 정확히 찾아야 한다. 몸의 기술, 예의와 규범, 사범과 수련생의 관계, 세대 간 전승, 한반도 문화적 뿌리가 설득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최재춘 추진단이 북측 ITF 계열과 접촉해온 이력은 단절 국면에서 더 중요해졌다. 정부 간 채널이 막힐수록 민간 네트워크와 국제 태권도 네트워크는 작은 연결선으로 남는다. 민간 추진단이 유네스코 절차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북측 태권도계와의 접촉 경험은 정부가 공동등재나 확장등재를 검토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자산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국가유산청, 외교부, 통일부의 역할 조정도 필요하다. 국가유산청은 유네스코 신청서와 무형유산 절차를 책임진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태권도 진흥 정책과 국제 스포츠 외교를 맡는다. 외교부는 유네스코와 회원국 설득의 축이고, 통일부는 남북 접촉과 대북정책의 기준을 관리한다. 태권도진흥재단, 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 코리아태권도 유네스코 추진단은 전승 현장과 태권도계 여론을 연결해야 한다.

최재춘 코리아태권도 유네스코 추진단은 씨름 공동등재 이후 태권도 남북 공동등재 가능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다.북측 ITF 계열과의 접촉 가능성을 넓히는 데 힘을 쏟아왔다.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태권도 공동등재가 평화의 실질적 의제가 되려면 국내 태권도계의 결집도 필요하다. 공동등재를 둘러싼 정치적 부담, 남북 태권도 체계의 차이, 북한 선행 신청에 대한 우려를 태권도계 내부에서 먼저 정리해야 한다. 공동등재는 남측 태권도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절차가 아니다. 태권도가 한반도에서 출발해 세계로 퍼진 공동체 수련문화라는 점을 더 넓은 틀에서 설명하는 절차다.

남북관계가 적대적 두 국가론으로 굳어질수록 문화의 역할은 작아 보인다. 작아진 통로가 사라진 통로와 같지는 않다. 유네스코 절차와 국제 태권도 네트워크는 남북이 같은 이름을 다시 다룰 수 있는 제도적 공간을 남긴다. 태권도는 그 공간 안에서 평화의 수사를 넘어 협의의 대상으로 남을 수 있다.

태권도 공동등재는 전쟁과 평화를 가르는 거대한 전환점이 아니다. 북한의 대남 노선을 바꾸는 즉각적 해법도 아니다. 그러나 남북이 같은 문화의 이름을 국제사회 앞에서 함께 다룰 수 있다면, 한반도에는 아직 군사적 적대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역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 평화는 때로 정상회담의 선언보다 작은 절차에서 오래 버틴다.

태권도는 이미 세계가 아는 한국의 이름이다. 2026년 이후 태권도 유네스코 공동등재 논의는 남북이 같은 문화의 이름을 각자의 유산으로만 남겨둘지, 차이를 인정한 채 공동의 유산으로 다룰지를 가르는 절차로 남게 됐다. 적대적 두 국가론의 시대에 태권도는 거창한 평화 담론보다 더 현실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 남북이 같은 몸의 언어를 유네스코 제도 안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민간의 축적과 정부의 외교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