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재편과 K콘텐츠⑤] 글로벌사우스 전략, 중동을 아프리카·남아시아 관문으로 읽기
사우디·UAE는 소비시장 넘어 유통·자본·언어의 교차점…K콘텐츠 확장은 아랍어권 플랫폼과 남반구 교역망 안에서 재설계
[KtN 전성진기자]호르무즈 해협의 통항 불안은 중동을 위험지역으로 다시 불러냈지만, 같은 중동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는 아프리카·남아시아·아시아를 잇는 교역 거점으로 움직이고 있다. 인도 정유사들이 호르무즈 차질 이후 중남미와 아프리카산 원유 구매를 늘린 흐름은 아시아 수입국이 공급망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에너지 항로가 흔들리는 동안 걸프 국가는 항만, 물류, 금융, 콘텐츠, 관광을 묶어 글로벌사우스의 새 연결축을 넓히고 있다.
한국의 중동 전략도 사우디와 UAE에 콘텐츠를 파는 수준에서 멈출 수 없다. 중동은 아랍어권 시장이고, 걸프 자본의 출발점이며, 남아시아 노동·소비 네트워크와 북아프리카 인구시장이 만나는 지대다. 한국 드라마와 K팝, 웹툰, 게임이 사우디·UAE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단순히 두 나라의 소비자를 확보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랍어 자막과 더빙, 플랫폼 계약, 공동제작, 공연·관광·브랜드 협업을 통해 아프리카와 남아시아까지 이어지는 문화 유통망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글로벌 교역의 무게중심도 이 흐름을 뒷받침한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남남무역이 2024년 6조 달러를 넘어 전 세계 상품 교역의 약 4분의 1을 차지했고, 2025년에도 남남무역이 세계 평균보다 빠르게 늘었다고 집계했다. 개발도상국 간 교역이 세계 무역의 부수적 흐름이 아니라 성장축으로 올라섰다는 뜻이다.
중동 전쟁과 호르무즈 리스크는 이 전환을 더 빠르게 만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은 중동 전쟁이 에너지 생산과 수출, 항공, 물류, 금융시장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세계은행도 에너지 공급로와 인프라 차질이 시장 변동성을 키우고 성장 전망을 낮추고 있다고 봤다. 이 충격은 중동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아시아 수입국, 아프리카 원자재 수출국, 유럽 소비시장, 글로벌 해운·보험시장까지 한꺼번에 연결된다.
사우디와 UAE는 전쟁 리스크를 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역망 재편을 자국 전략으로 흡수하고 있다. UAE는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을 통해 인도, 케냐, 모리셔스 등과 경제 네트워크를 넓혀왔다. UAE 정부는 CEPA를 글로벌 무역·물류 허브 지위 강화의 핵심 수단으로 설명하고 있다. 케냐 정부도 UAE와의 CEPA가 동·남부 아프리카 관문으로서 케냐의 위치와 중동·아시아를 잇는 UAE의 물류·금융 허브 역할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사우디는 아프리카와의 경제관계를 별도 축으로 키우고 있다. 리야드에서 열린 사우디·아랍·아프리카 경제회의에서는 정부와 민간 부문 간 50건 이상의 협력 합의가 체결됐고, 아랍조정그룹은 아프리카 개발 지원을 위해 500억 달러 규모의 약속을 발표했다. 인프라, 에너지, 식량안보, 투자금융, 물류가 함께 묶인 관계다.
한국에는 UAE와의 CEPA 발효가 새 통로가 됐다. 한·UAE CEPA는 한국이 중동 아랍권 국가와 맺은 첫 자유무역협정 성격의 경제협정으로, 한국 관세청은 UAE 협정이 중동 신시장 창출과 자원부국 협력의 의미를 갖는다고 분류했다. 한국과 UAE는 상품 교역의 90% 이상에 대해 관세 철폐 또는 인하를 추진하며, 식품·화장품·방산·원유 등 주요 품목과 서비스·투자 협력 기반을 넓히게 됐다.
K콘텐츠는 이런 교역망 안에서 문화상품 이상의 역할을 맡는다. 드라마는 OTT 가입과 광고를 만들고, K팝은 공연과 관광을 만들며, 웹툰과 게임은 모바일 결제와 IP 라이선스를 만든다. 뷰티와 식품은 콘텐츠 장면과 팬덤 소비를 통해 수출 품목이 된다. UAE가 중동·아프리카·남아시아를 잇는 무역 허브라면, K콘텐츠는 한국 소비재가 그 교역망 안으로 들어갈 때 브랜드 친숙도를 높이는 선행 자산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UAE비즈니스센터는 중동 한류가 드라마·음악·예능·애니메이션·웹툰·게임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플랫폼 변화와 현지화 구조가 한류 확산의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중동 한류는 과거 방송 편성이나 팬 커뮤니티 중심 소비에서 OTT, 아랍어 자막·더빙, 공연, 브랜드 파트너십, 콘텐츠 수출 상담으로 이동했다.
사우디와 UAE는 글로벌사우스 전략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갖는다. 사우디는 대형 내수시장, 국부펀드, 공연·게임·스포츠 이벤트, 국가 주도 문화산업 프로젝트를 앞세운다. UAE는 두바이와 아부다비의 항공·항만·금융·미디어 인프라, 국제 콘텐츠 마켓, CEPA 네트워크, 관광 허브 기능이 강하다. 한국 기업이 두 나라를 하나의 중동 시장으로만 보면 전략이 흐려진다. 사우디에는 대형 공연, 게임, 리메이크, 현지 공동제작이 맞고, UAE에는 아랍어권 유통, 콘텐츠 마켓, 뷰티·식품·관광 연계, 중동·아프리카 확장 전략이 맞는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는 다른 층위의 시장이다. 사우디와 UAE가 지불능력과 투자자본의 중심이라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는 인구와 언어 확산의 기반이다. 한국 드라마와 웹툰, 키즈 콘텐츠가 아랍어로 서비스될 경우 걸프의 고소득 소비층과 북아프리카의 대중 소비층을 동시에 겨냥할 수 있다. 다만 구매력, 결제 인프라, 플랫폼 이용 방식, 규제 환경은 국가별로 다르다. 아랍어권이라는 공통점만으로 동일한 가격과 유통 전략을 적용하기 어렵다.
남아시아는 중동 전략에서 빠질 수 없는 축이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 인구는 걸프 노동시장과 소비시장에 깊게 연결돼 있고, UAE와 사우디의 항공·물류·송금·소매 네트워크를 통해 중동 일상경제 안에 들어와 있다. UAE가 인도와 CEPA를 가장 먼저 체결한 것도 이 배경과 맞물린다. 중동에서 유통되는 콘텐츠와 소비재는 현지 시민뿐 아니라 걸프에 거주하는 남아시아계 소비자, 귀국 노동자 네트워크, 인도양 교역망을 함께 타고 이동할 수 있다.
K콘텐츠 기업에는 아랍어 전략과 영어 전략을 함께 써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 사우디와 UAE의 현지 대중에게는 아랍어 더빙과 자막이 필요하고, 걸프 거주 남아시아계 소비자와 국제 도시의 젊은층에는 영어 서비스가 여전히 유효하다. 웹툰과 게임은 아랍어·영어 병행 서비스가 가능하고, 드라마와 예능은 더빙 비용을 고려해 시장별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한국어 원천 콘텐츠가 글로벌사우스에 들어가는 경로는 한 가지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다.
중동 시장을 글로벌사우스 관문으로 활용하려면 콘텐츠와 소비재의 결합도 더 정교해야 한다. 드라마 속 음식은 라면, 소스, 간편식으로 이어지고, 배우와 아이돌의 스타일은 화장품과 패션 소비로 확장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는 중동 내 한류 소비가 사우디와 UAE를 양대 축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한국 콘텐츠 소비자 1인당 월평균 지출액이 두 나라에서 세계 평균보다 높다고 정리했다. 지불 의향이 높은 걸프 시장에서 브랜드를 만들고, 아랍어권·남아시아권으로 인지도를 넓히는 순서가 가능하다.
웹툰과 게임은 물류 리스크가 낮은 글로벌사우스형 IP 품목이다. 해협이 막혀도 디지털 콘텐츠 유통은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다. MENA 게임 시장은 모바일 중심 구조이고, 한국 게임은 ‘PUBG 모바일’을 비롯해 모바일·온라인 분야에서 성과를 냈다. 사우디·UAE는 결제력이 높고, 이집트는 이용자 규모가 크다. 이 구분은 중동을 아프리카·남아시아 확장 거점으로 볼 때도 유효하다. 높은 결제 시장에서 수익을 만들고, 인구 시장에서 이용자 기반을 넓히는 복합 전략이 필요하다.
아랍어 웹툰은 한국 IP의 남반구 확장 실험장이 될 수 있다. 사우디 망가 아라비아가 한국 웹툰을 정식 서비스한 흐름은 팬 번역에 의존하던 소비가 공식 라이선스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뜻한다. 아랍어판 웹툰이 자리를 잡으면 웹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드라마 리메이크로 이어지는 권리 사업이 가능해진다. 중동은 한국 IP가 북미·일본·동남아 다음으로 시험할 수 있는 대형 언어권 시장이다.
K콘텐츠가 글로벌사우스 전략의 도구가 되려면 공공외교와 산업계약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한국문화원과 세종학당은 한국어 교육과 문화 체험, 한식 행사, K팝 프로그램을 통해 팬덤 기반을 만든다. 기업은 OTT 계약, 웹툰 라이선스, 게임 퍼블리싱, 공연, 굿즈, 브랜드 협업으로 수익 구조를 만든다. 정부 간 협정은 관세와 투자, 물류, 지식재산권, 인력 교류의 틀을 제공한다. 세 축이 따로 움직이면 중동 전략은 행사성 홍보나 단발성 수출에 머물기 쉽다.
트럼프 관세 리스크는 중동 전략의 필요성을 더 키운다. 미국은 대통령 관세 조치를 별도 정책 항목으로 운용하고 있고, 미국 항소법원은 트럼프 행정부의 10% 글로벌 관세를 둘러싼 하급심 판단을 일시 정지시켰다. 미국 시장의 비용 구조가 법원과 행정부 결정에 따라 흔들리는 동안, 한국 기업은 미국 의존도를 낮출 대체 성장축을 찾아야 한다. 중동은 위험을 동반하지만, 지불 능력과 인프라, 아랍어권 확장성을 동시에 가진 후보지다.
중동을 글로벌사우스 관문으로 쓰는 전략은 낙관론만으로 설계할 수 없다. 호르무즈 리스크는 물류와 보험료를 밀어 올리고, 중동 전쟁은 소비심리와 환율, 금융시장에 영향을 준다. 사우디와 UAE의 심의 체계는 종교적 가치와 국가정체성, 도덕성, 성 표현, 젠더 표현에 민감하다.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확장은 결제 인프라, 저작권 보호, 불법 유통, 현지 파트너 신뢰도라는 별도 위험을 동반한다. 글로벌사우스는 하나의 시장이 아니라 여러 규칙과 가격, 언어, 정치 위험이 겹친 권역이다.
한국 기업의 실행 전략은 단계별로 나뉘어야 한다. UAE에서는 CEPA와 물류·금융 허브 기능을 활용해 콘텐츠와 소비재 수출, 아랍어권 마케팅, 국제 콘텐츠 마켓을 연결해야 한다. 사우디에서는 공연, 게임, 공동제작, 리메이크, 교육·훈련 협력을 통해 국가 문화산업 전략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는 아랍어판 콘텐츠와 저가형 모바일 상품, 교육형·키즈 콘텐츠가 맞고, 남아시아 네트워크에는 영어·아랍어 병행 서비스와 모바일 결제 기반 상품이 필요하다.
호르무즈 해협은 원유와 LNG의 병목이지만, 중동의 의미가 에너지에만 묶여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사우디와 UAE는 자본과 플랫폼, 관광과 물류, 문화와 기술을 묶어 아프리카와 남아시아로 향하는 새 통로를 만들고 있다. 한국의 K콘텐츠 전략도 팬덤 수치와 작품 판매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아랍어권 플랫폼, 걸프 자본, 남남무역, 소비재 수출, 현지 심의, 미국 관세 리스크를 함께 놓고 설계할 때 중동은 위험지역이 아니라 글로벌사우스 진출의 전진기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