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재편과 K콘텐츠⑥] 미국·이란·이스라엘, 협상 국면이 흔드는 에너지 가격과 문화시장

호르무즈 통항, 핵 협상, 이스라엘 안보, 아브라함 협정이 한꺼번에 얽힌 중동…한국 기업에는 물류비·환율·공연 리스크로 전이

2026-05-30     전성진 기자
"호르무즈 막혀도 길은 있다"... 우리 유조선, 홍해 우회 통과 첫 성공 ...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발 에너지 수급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원유를 실은 우리 유조선이 우회로인 홍해를 처음으로 안전하게 통과했다.  사진=2026. 04.17 자료 영상 갈무리/ 편집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전성진기자]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LNG선과 유조선의 움직임이 재개됐지만, 중동 정세는 정상화보다 조건부 협상 국면에 가깝다. 미국은 이란과 합의를 추진하면서도 실패할 경우 다른 대응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란은 일부 쟁점에서 진전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최종 합의가 임박했다는 해석에는 선을 그었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이란이 만드는 협상 틀을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고,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 문제와 아브라함 협정 확대를 한 묶음으로 다루려 한다. 에너지 해협의 재개 여부가 핵 협상, 이스라엘 안보, 걸프 외교, 글로벌 물류비를 동시에 움직이는 구조다.

호르무즈 해협은 이번 협상의 첫 번째 가격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은 호르무즈 해협을 세계 에너지 수송의 핵심 병목으로 분류해왔다. 2024년 호르무즈를 지난 석유류 흐름은 하루 평균 2,000만 배럴 수준으로, 세계 석유류 소비의 약 20%와 해상 석유 교역의 4분의 1 이상에 해당했다. LNG 교역에서도 호르무즈의 비중은 크다. 카타르산 LNG가 아시아로 향하는 길목이 흔들리면 한국, 일본, 중국, 인도, 파키스탄의 에너지 조달비가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

최근 해협을 빠져나간 선박은 시장에 안도 신호를 줬다. 카타르에너지의 LNG선과 일본 선사가 보유한 LNG선, 이라크산 원유를 실은 초대형 유조선 등이 중국과 파키스탄, 인도 방면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선박 운항은 전쟁 이전 수준과 거리가 있고, 걸프 해역에는 여전히 수많은 선박과 선원이 묶여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선박 몇 척의 이동은 해협의 ‘재개’라기보다 협상 가능성을 시험하는 제한적 통항에 가깝다.

미국과 이란의 협상에서 핵심 쟁점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전쟁 종식과 해상 통항이고, 다른 하나는 이란의 핵 활동과 농축우라늄 문제다. 미국은 이란의 핵 능력 제한과 호르무즈 통항 회복을 연결해 보려 한다. 이란은 제재 완화와 항만 봉쇄 해제, 해협 관리 권한, 전쟁 피해 보상 문제를 협상 의제로 올려놓고 있다. 이란 고위 소식통은 고농축 우라늄 재고를 넘기기로 합의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핵 문제를 뒤로 미루고 해협부터 여는 식의 합의가 거론되더라도, 핵심 안보 쟁점은 그대로 남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변수는 협상의 속도를 늦추는 압력이다. 미국은 에너지 통로를 열고 전쟁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낮추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미사일 역량과 지역 무장세력을 직접 안보 위협으로 본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미국과 이란의 협상에서 이스라엘의 영향력이 제한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관련 결정을 충분히 움직이기 어렵다고 주변에 말했다는 보도까지 나온 배경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구상은 더 넓다. 이란 합의와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파키스탄, 튀르키예, 이집트, 요르단 등 주요 이슬람권 국가의 아브라함 협정 참여를 요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즉각 부정적 입장을 보였고, 사우디도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 로드맵 없는 이스라엘 관계 정상화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왔다. 이란과의 휴전, 호르무즈 통항, 이스라엘 정상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한꺼번에 묶는 방식은 외교적 판을 키우는 동시에 합의 난도도 높인다.

걸프 국가의 계산도 단순하지 않다. 사우디와 UAE는 전쟁 확대를 원하지 않지만, 이란이 해협 관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례도 부담스럽다. UAE는 호르무즈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우회 수송 인프라를 키우고 있다. ADNOC 최고경영자는 호르무즈를 우회하는 신규 원유 파이프라인 공사가 절반가량 진행됐고,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걸프 산유국이 해협 리스크를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장기 구조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다.

한국 경제에는 에너지 가격보다 넓은 경로로 충격이 전달된다. 원유와 LNG 가격이 오르면 전력비와 석유화학 원가가 먼저 움직인다. 해상보험료와 운임은 수입 원가와 수출 단가를 밀어 올린다. 환율이 흔들리면 콘텐츠 기업의 해외 공연, 촬영, 장비 임차, 굿즈 제작 비용도 달라진다. 중동의 군사 리스크는 정유·화학·조선·해운만의 변수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관광, 유통, 소비재 기업의 손익계산서까지 건드린다.

K콘텐츠 시장은 이 정세 변화와 떨어져 있지 않다. 사우디와 UAE는 한국 드라마와 K팝, 웹툰, 게임, 키즈 콘텐츠의 핵심 성장시장으로 부상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UAE비즈니스센터는 중동 한류가 팬덤 소비를 넘어 OTT, 현지어 더빙, 공연, 브랜드 제휴, 콘텐츠 수출 상담으로 이동했다고 정리했다. 중동 현지 플랫폼에서 한국 드라마가 핵심 콘텐츠로 부상했고, Viu는 MENA 시장에서 한국 드라마 300편 이상을 제공하며 영어·아랍어 자막과 더빙을 강화하고 있다.

정세 리스크가 커질수록 디지털 콘텐츠의 장점은 분명해진다. 드라마, 웹툰, 게임은 원유 수송로처럼 해협에 직접 묶이지 않는다. 플랫폼 계약과 스트리밍 유통은 물류 차질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그러나 공연, 팬미팅, 굿즈, 브랜드 팝업, 키즈 라이브쇼, 관광 연계 행사는 항공편, 보험, 현지 치안, 소비심리의 영향을 받는다. 한국 콘텐츠 기업은 중동을 디지털 유통시장과 오프라인 행사시장으로 나눠 리스크를 따로 계산해야 한다.

사우디와 UAE의 문화산업 투자는 전쟁 리스크 속에서도 전략적 의미를 유지한다. 중동 한류는 한때 한국을 알리는 공공외교 수단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콘텐츠 유통과 행사 공동 개최, 문화산업 진흥기관 협력으로 체계화되고 있다. KOCCA와 UAE 두바이경제관광청 산하 기관의 협력, 두바이 국제콘텐츠마켓, K팝 콘서트, K콘텐츠 엑스포 같은 사업은 중동 한류가 정상외교와 산업협력의 연결고리로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이란 협상이 실제 합의로 이어지더라도 한국 기업이 봐야 할 지점은 ‘전쟁 종료’가 아니라 ‘조건’이다. 해협 통항이 어느 수준으로 열리는지, 이란 항만 봉쇄가 어떻게 조정되는지, 제재 완화가 원유 판매와 금융 결제로 이어지는지, 이스라엘이 별도 군사행동 가능성을 남겨두는지에 따라 시장 반응은 달라진다. 통항 제한이 풀리면 에너지 가격은 내려갈 수 있지만, 이란의 해협 관리 권한이 커지면 해운·보험시장은 새 위험 프리미엄을 붙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반응은 공연과 문화행사에도 간접 영향을 준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 가능성이 다시 커지면 걸프 지역 대형 이벤트는 보안 비용과 보험 비용을 다시 계산해야 한다. K팝 공연과 팬미팅, 콘텐츠 마켓, 브랜드 행사는 수만 명이 모이는 오프라인 사업이다. 항공 노선과 숙박, 현지 교통, 행사장 안전, 관객 이동이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수익성이 나온다. 중동 한류가 커질수록 지정학 리스크는 단순 배경이 아니라 행사 계약서와 보험료 안으로 들어온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전략도 중동 문화시장에 영향을 준다. 미국이 이란과 합의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정상화 블록을 확대하려 하면, 중동 각국은 미국과의 안보 관계, 이스라엘에 대한 국내 여론, 팔레스타인 문제, 에너지 수출 이익을 함께 따져야 한다. 사우디와 UAE가 문화산업을 키우는 흐름은 유지되더라도, 외교적 긴장이 커지면 대형 외국 콘텐츠 행사와 국가 이미지 홍보사업은 더 신중하게 운영될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에는 세 가지 대응이 필요하다. 첫째, 중동 플랫폼 계약은 장기 유지하되 오프라인 행사는 단계별 옵션을 붙여야 한다. 둘째, 사우디·UAE에 집중하되 카타르, 오만,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 대체 개최지와 유통망을 함께 확보해야 한다. 셋째, 공연·굿즈·브랜드 협업에는 환율, 물류비, 보험료, 취소 조항, 정세 악화 시 일정 변경 조건을 계약에 명확히 넣어야 한다. 중동은 성장시장인 동시에 리스크 가격이 높은 시장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에너지의 길이고, 미국·이란 협상은 그 길의 사용 조건을 정하는 정치 과정이다. 이스라엘은 그 조건이 자국 안보를 충분히 반영하는지 따지고, 걸프 국가는 전쟁 확대를 피하면서 해협 의존도를 줄이려 한다. 한국의 K콘텐츠 기업은 이 복잡한 판 위에서 플랫폼 유통과 현지 행사를 동시에 키우고 있다. 중동을 단순한 위험지역으로 보면 성장 기회를 놓치고, 단순한 신시장으로 보면 에너지·안보·외교 리스크를 과소평가하게 된다.

중동 한류의 다음 단계는 정세 안정 이후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열리지 않는다. 호르무즈 통항이 제한적으로 움직이는 동안에도 OTT 계약은 이어지고, 사우디와 UAE의 문화산업 투자는 계속되며, 한국 콘텐츠는 아랍어권 플랫폼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미국·이란·이스라엘의 협상 국면은 K콘텐츠의 중동 진출을 멈추게 하는 변수가 아니라, 진출 방식과 비용 구조를 새로 짜게 만드는 변수다. 한국의 중동 전략은 이제 드라마 수출과 공연 유치만이 아니라 에너지 안보, 해상 물류, 외교 리스크, 플랫폼 계약을 함께 놓고 설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