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소피아 회동①] 브라나 레지던스에 선 태권도, 남북 공동등재 논의가 유럽으로 옮겨간 날
소피아 왕실 공간에서 열린 유네스코 등재 간담회 최재춘 추진단의 민간외교, 국내 의제에서 국제 접점으로 확장
[KtN 임우경 · 박준식기자]불가리아 소피아 브라나 레지던스(Резиденция „Врана“)의 붉은 벽면과 샹들리에 아래에 태권도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회의용 마이크가 놓였다. 왕실 초상화가 걸린 공간에는 한국과 불가리아, 태권도계, 유네스코 관련 인사들이 자리했다. 태권도 남북 공동 유네스코 등재 논의가 서울과 무주, 부산의 국내 일정표를 넘어 유럽의 외교 공간으로 이동한 장면이었다.
브라나 레지던스 회동에는 최재춘(Che Chun Choi) 코리아태권도유네스코추진단장, 슬라비비네프(Slavi Binev·Слави Бинев) 불가리아 태권도협회장, 키틴 무뇨즈(Kitín Muñoz) 유네스코 친선대사, 시메온 왕자(Prince Simeon) 등 불가리아와 국제 태권도, 유네스코 네트워크에 걸친 인사들이 함께했다. 태권도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남북 공동의 문화 의제로 다룰 수 있는지, 불가리아가 그 과정에서 어떤 접점을 제공할 수 있는지가 회동의 중심에 놓였다.
국가유산청은 2026년 3월 31일 유네스코 본부에 ‘태권도: 한국의 도장 공동체 수련문화’ 등재신청서를 제출했다. 북한은 2024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통무술-태권도’ 신청서를 먼저 냈다. 남북이 같은 이름의 유산을 서로 다른 설명으로 유네스코 절차에 올린 상황에서, 소피아 회동은 공동등재 또는 확장등재 가능성을 국제 네트워크 안에서 다시 꺼낸 자리였다.
최재춘 코리아유네스코추진단의 활동은 2019년 민간 차원의 문제 제기에서 시작됐다. 본지가 축적해온 취재 흐름에서 최재춘 추진단은 태권도를 경기 종목이나 국기 상징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남북이 공유해온 문화유산이자 세계 태권도인이 함께 전승해온 수련문화로 제시해왔다. 북측 ITF 계열 접촉, 태권도계 내부 설득, 정부 협력 요구, 범국민 서명운동은 같은 흐름 안에서 이어졌다.
소피아 회동에서 최재춘 추진단의 민간외교는 유럽의 네트워크와 만났다. 국내에서 축적된 태권도 유네스코 등재 논의는 불가리아의 정치·태권도 인맥, 유네스코 친선대사 네트워크, 왕실 공간의 상징성과 결합했다. 민간 차원의 움직임이 유네스코 절차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공식 외교가 닿기 어려운 접촉면을 넓히는 역할은 할 수 있다.
슬라비 비네프는 태권도를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남북 사이의 소통 통로이자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로 설명했다. 태권도는 발차기와 경기 규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도장에서 사범과 수련생이 몸의 기술을 익히고, 예의와 절제의 규범을 배우며, 수련생 일부가 다음 세대를 지도하는 사범으로 성장하는 전승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 신청서가 ‘도장 공동체 수련문화’를 앞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브라나 레지던스 내부에서는 공식 브리핑과 후속 협의가 이어졌다. 왕실 초상화가 둘러싼 공간에 회의용 마이크가 놓였고, 참석자들은 태권도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와 남북 공동등재 가능성을 논의했다. 불가리아 측 인사와 한국 태권도계 관계자들은 태권도 등재 절차, 남북 접촉 가능성, 유럽 네트워크의 역할을 놓고 의견을 나눴다. 한국과 불가리아 국기가 함께 놓인 공간은 이번 회동이 단순한 민간 만남을 넘어 양국 접촉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줬다.
브라나 레지던스라는 장소는 회동의 성격을 더 분명하게 만들었다. 호텔 연회장이나 체육관이 아니라 불가리아 왕실의 상징 공간에서 태권도 유네스코 등재 논의가 다뤄졌다. 공식 브리핑 형식의 자리 배치, 왕실 공간의 의전성, 참석 인사들의 면면은 태권도 등재 논의를 체육계 간담회가 아니라 외교적 장면으로 만들었다.
불가리아 측 인사들은 태권도가 남북 사이의 접촉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남북관계가 정치·군사 영역에서 막힌 상황에서도, 태권도라는 공동 문화는 유네스코 절차 안에서 다시 다뤄질 수 있다는 취지다. 다만 태권도가 남북관계를 단번에 바꾸는 해법은 아니다. 태권도 공동등재는 적대와 단절의 국면에서 남북이 같은 문화의 이름을 국제사회 앞에 함께 올릴 수 있는지 따지는 절차다.
2018년 씨름 공동등재의 선례는 소피아 회동의 배경으로 놓여 있다. 남북은 당시 각각 씨름 신청서를 냈지만, 유네스코 중재와 남북 동의, 정부 외교가 맞물리며 공동등재를 이뤘다. 태권도는 씨름보다 복잡하다. 남측에는 국기원·세계태권도연맹 체계가 있고, 북측에는 ITF 계열 전승 체계가 있다. 올림픽 종목의 이미지와 도장 공동체 전승, 전통무술의 설명이 한 이름 안에 겹쳐 있다.
불가리아가 남북 공동등재를 결정하는 주체는 아니다. 유네스코 절차를 대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남북이 직접 접촉하기 어려운 시기에 유럽의 제3 공간이 회의와 메시지 전달의 접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은 가볍지 않다. 소피아 회동은 남북 당사자만으로 좁혀졌던 태권도 공동등재 논의에 제3의 외교 공간이 들어온 장면이었다.
최재춘 추진단이 소피아에서 만든 접점은 정부 외교와 연결될 때 실질적 힘을 얻는다. 대통령실, 외교부, 통일부, 문화체육관광부, 국가유산청은 태권도 공동등재를 단순한 민간 캠페인으로 남겨둘지, 유네스코 절차 안의 외교 의제로 다룰지 판단해야 한다. 민간이 만든 국제 네트워크를 정부가 제도권 외교로 옮기지 못하면 브라나 회동은 상징적 장면에 머물 수 있다.
2026년 7월 부산에서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다. 부산 회의는 태권도 등재를 결정하는 회의가 아니지만, 유네스코 고위 관계자와 회원국 대표단이 한국에 모이는 국제무대다. 소피아 회동이 유럽의 제3 접점을 만들었다면, 부산은 한국 정부가 태권도 공동등재의 취지와 씨름 공동등재의 선례를 설명할 수 있는 국내 외교무대가 된다.
태권도 유네스코 남북 공동등재 논의는 신청서 제출 이후 더 어려운 단계로 들어섰다. 북한의 선행 신청, 한국의 도장 공동체 수련문화 신청, 씨름 공동등재의 선례, 불가리아 소피아 회동, 부산 세계유산위원회 일정이 한 흐름 안에서 맞물리고 있다. 브라나 레지던스에 놓인 마이크는 태권도계의 민간 호소가 유럽의 외교 공간으로 옮겨간 장면이었다.
소피아 회동은 태권도 공동등재 논의가 국내 캠페인과 남북 당사자의 좁은 통로를 넘어, 유럽의 제3 공간과 유네스코 친선대사 네트워크로 확장된 장면이었다. 최재춘 추진단의 민간외교는 브라나 레지던스에서 국제 접점을 만들었고, 태권도 유네스코 등재 논의는 소피아를 거치며 다시 외교의 언어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남은 과제는 이 접점을 유네스코 절차와 정부 외교 안으로 연결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