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골드러시⑦] AI 산단의 승부, 땅보다 전력·데이터·사람
13개 AX 실증 산단·AI 팩토리 500개 계획…수도권 쏠림 넘는 지역 제조 전환의 조건
[KtN 최기형기자]13개 AX 실증 산업단지, 2030년까지 AI 팩토리 500곳, 대·중·소 협력 AI 선도모델 15개. 정부가 제조업 인공지능 전환을 지역 산업정책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산업통상부는 2026년 업무계획에서 ‘5극 3특’ 성장엔진 산업을 선정하고, 전국 제조 공급망에 AI 제조혁신을 확산하겠다고 밝혔다. AI 골드러시는 샌프란시스코와 베이 지역의 자본 집중에서 시작됐지만, 한국에서는 산업단지와 전력망, 공장 데이터, 지역 인재망을 통과해야 실제 생산성으로 바뀐다.
AI 자본은 한곳에 모이는 속성이 강하다. 맥킨지가 2026년 6월 공개한 ‘The next gold rush’ 보고서에서 베이 지역은 321개 유니콘 기업과 약 1조2000억 달러 규모의 지역 국내총생산(GDP)을 가진 세계적 혁신 생태계로 제시됐다. 샌프란시스코는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약 1230억 달러의 AI 관련 민간자본을 끌어들였고, 2025년 샌프란시스코 기반 기업은 전 세계 벤처캐피털 자금의 30%를 받았다.
베이 지역의 숫자는 화려하지만, 한국이 그대로 따라갈 모델은 아니다. 같은 보고서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높은 생활비, 소득 격차, 산업 편중, 도심 회복 지연도 함께 들어 있다. 자본과 인재가 좁은 도시권에 몰리면 기술 개발은 빨라지지만, 부동산 비용과 인력 쏠림, 중산층 이탈, 주변 지역의 공동화도 커진다. 한국의 AI 전략이 수도권과 일부 대기업 연구소에 집중되면 베이 지역이 먼저 드러낸 비용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할 수 있다.
한국의 출발선은 도시형 창업 생태계보다 제조업 현장에 가깝다. 반도체 공장, 자동차 생산라인, 조선소, 기계·로봇 산업단지, 배터리와 바이오 공장에는 설비와 데이터, 숙련 인력이 이미 놓여 있다. AI가 생산성을 바꾸려면 이 현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산업단지는 단순한 공장 집합지가 아니라 전력, 물류, 협력사, 실증 고객, 현장 인력이 만나는 곳이다.
정부가 산업단지를 AI 전환의 단위로 잡은 배경도 여기에 있다. 산업통상부는 1000개 이상 산·학·연 단체가 참여하는 M.AX 얼라이언스를 중심으로 제조와 AI 융합을 추진하고, 올해까지 102개를 보급한 AI 팩토리를 내년 100개를 포함해 2030년 500개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대기업과 협력사가 함께 활용할 AI 선도모델 15개, AX 실증 산업단지 13개 구축 계획도 같은 발표에 포함됐다.
AI 산단의 성패는 간판보다 공장 데이터에서 먼저 갈린다. 제조 현장에는 설비 운전 기록, 불량률, 온도와 습도, 진동, 작업자 동선, 납기, 에너지 사용량이 쌓여 있다. AI는 이 데이터를 학습해야 공정을 바꾸고, 설비 이상을 잡고, 품질검사와 물류를 조정할 수 있다. 데이터가 있어도 기업마다 형식이 다르고 설비마다 저장 방식이 다르면 곧바로 쓸 수 없다. 산단 안의 중소기업 상당수는 데이터 전담 인력과 보안 체계, 클라우드 운영 경험이 부족하다.
대기업과 협력사의 데이터 관계도 민감하다. 원청은 품질과 납기 관리를 위해 협력사의 공정 데이터를 필요로 한다. 협력사는 데이터 공유를 통해 불량률을 낮추고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지만, 같은 데이터가 납품 단가 협상이나 원가 압박에 쓰일 수 있다는 우려도 갖는다. AI 산단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데이터 사용권, 보안, 성과 배분, 지식재산권 기준이 먼저 정리돼야 한다.
산단 AI 전환은 전력망과도 맞물린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 배터리·자동차·조선·로봇 공장은 같은 전력망 위에서 움직인다. 산업부는 2026년 예산안에서 산업 전반 AX 확산 예산을 1조1000억 원 규모로 늘리고, 재생에너지 예산 1조3000억 원과 차세대 전력망 구축 2285억 원도 함께 제시했다. 지역 산업단지 경쟁력이 AI 설비와 소프트웨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이유다.
RE100 산단도 같은 흐름 안에 있다. 글로벌 기업은 공급망 안에서 재생에너지 사용 여부를 따지고, 반도체·배터리·자동차 기업은 해외 고객사의 탄소 기준을 맞춰야 한다. 산업부는 RE100 산단, 영농형 태양광, 해상풍력 등을 포함한 재생에너지 투자를 확대하고, 에너지 고속도로 등 전력 인프라를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지역 산업단지가 AI 제조의 거점이 되려면 싸고 안정적인 전력뿐 아니라 탄소 부담이 낮은 전력까지 확보해야 한다.
AI 산단은 인재 문제도 피할 수 없다. 수도권 대학과 판교·강남의 AI 기업만으로 반도체, 조선, 자동차, 기계, 바이오 현장에 필요한 사람을 충분히 공급하기 어렵다. 공장 AI는 모델 연구자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설비를 아는 기술자, 공정 데이터를 읽는 엔지니어, 로봇을 유지보수하는 인력, 보안과 안전 기준을 다루는 관리자, 현장 노동자와 개발자 사이를 잇는 사람이 함께 필요하다.
정부는 5극 3특 성장엔진 산업을 선정하고 9개 지역 거점 국립대를 통한 인재 공급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성장펀드 150조 원의 40% 이상을 집중 투자하고, 2조 원 규모 전용 연구개발 프로그램 신설도 검토하겠다는 내용도 업무계획에 포함됐다. 지역대학과 산업단지를 연결하지 못하면 AI 인재 정책은 수도권 임금 경쟁으로 좁아진다.
지역 산업은 이미 서로 다른 기반을 갖고 있다. 반도체는 수도권 남부와 충청권, 자동차는 울산·화성·광주, 조선은 울산·거제·부산, 기계·로봇은 창원·대구·대전권과 맞물려 있다. 지역마다 필요한 AI도 다르다. 반도체 공장은 수율과 장비 이상 감지가 중요하고, 조선소는 용접·도장·물류와 안전 검증이 중요하다. 자동차 공장은 유연생산과 품질검사, 배터리 관리가 맞물린다. 하나의 AI 산단 모델을 전국에 복제하는 방식으로는 현장 수요를 맞추기 어렵다.
지역 창업 생태계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AI 산단에 들어갈 기술은 대기업 연구소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설비 예지보전, 검사 자동화, 에너지 관리, 산업보안, 물류 최적화, 현장 교육 소프트웨어는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맡을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지역 스타트업은 투자자 접근성, 고급 인재 채용, 해외 고객 연결에서 수도권보다 불리하다. 산단이 실증 고객을 제공하고 지방정부와 대학, 출연연이 기술 검증을 지원해야 지역 기업이 남을 수 있다.
산업단지의 생활 조건도 중요해졌다. 청년 인재는 공장과 연구소만 보고 지역에 정착하지 않는다. 주거, 교통, 교육, 의료, 문화시설, 배우자 일자리까지 함께 본다. 베이 지역은 높은 임금과 세계적 기업을 갖췄지만 생활비와 주거 부담도 함께 키웠다. 한국의 지역 산단도 청년 주거와 교통, 교육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AI 인재를 붙잡기 어렵다. 산업단지를 생산 공간으로만 보는 시각으로는 장기 인력 기반을 만들 수 없다.
기업 투자도 같은 조건을 본다. 지방투자 보조금과 세제 혜택은 기업 이전을 유도할 수 있지만, 전력망과 협력사, 숙련 인력, 물류, 고객사 접근성이 약하면 지속성이 떨어진다. 산업부는 지역 주도 성장엔진 육성을 위해 지역 관련 예산을 확대하고, 지역 발전이 낮은 곳의 지방투자촉진보조금 지원한도를 기업당 200억 원에서 300억 원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재정 인센티브는 필요하지만, 기업이 남는 구조는 산업 생태계에서 만들어진다.
AI 산단 정책은 수도권 완화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수도권의 반도체·AI·벤처 생태계는 이미 크고, 글로벌 기업과 연구자도 수도권 접근성을 먼저 본다. 지역으로 AI를 확산하려면 수도권 기능을 억누르는 방식보다 지역 산업의 고유한 문제를 AI로 해결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조선소의 인력난, 자동차 부품사의 품질관리, 기계산업의 예지보전, 반도체 협력사의 수율 개선처럼 현장에서 당장 비용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과제가 있어야 한다.
중소 제조기업의 참여는 별도 설계가 필요하다. 대기업은 자체 클라우드와 보안 조직, AI 연구소, 교육 체계를 갖췄다. 중소기업은 생산라인을 멈추고 시스템을 바꿀 여력이 작다. 산단 AI 전환이 대기업 중심으로 빠르게 진행되면 협력사는 원청 시스템에 맞춰 데이터를 제공하는 위치에 머물 수 있다. 공동 활용 플랫폼, 표준 데이터 포맷, 보안 비용 지원, 현장 인력 교육이 함께 들어가야 중소기업이 주체로 참여할 수 있다.
AI 산단은 공공 조달과도 연결된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에너지 관리, 재난 안전, 물류, 교통, 환경 관리에 AI를 쓰면 지역 기업의 첫 시장이 될 수 있다. 다만 단기 실증과 낮은 가격 입찰에 머물면 기술 축적은 어렵다. 성능 평가, 후속 구매, 데이터 접근, 책임 기준을 묶어야 공공 실증이 지역 기업의 성장 통로로 바뀐다.
해외 플랫폼 의존도도 지역 산단의 변수다. 공장 데이터가 해외 클라우드와 외국 AI 모델 위에서 처리되면 운영비와 보안, 산업 주도권 문제가 따라온다. 반대로 모든 기술을 국내에서 직접 만들겠다는 접근도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산단별로 어떤 데이터는 내부에 두고, 어떤 모델은 외부를 쓰며, 어떤 기술은 국내 기업과 공동개발할지 기준이 필요하다. AI 산단은 기술 도입 사업이 아니라 산업 데이터의 통제권을 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베이 지역의 골드러시는 자본과 인재를 모으는 속도를 보여줬다. 한국의 산업단지는 그 속도를 제조업 생산성으로 바꾸는 현장이다. 샌프란시스코식 창업 생태계가 AI 모델과 투자금을 빨아들였다면, 한국형 AI 골드러시는 공장 데이터와 전력망, 지역대학, 협력사, 산업용 소프트웨어를 묶는 쪽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 산단이 이름만 AI를 붙인 공간으로 끝나면 투자는 흩어지고, 지역 제조업의 낡은 구조는 그대로 남는다.
AI 산단은 지역 균형성장의 구호보다 훨씬 구체적인 산업 설계를 요구한다. 정부는 13개 AX 실증 산업단지와 2030년 AI 팩토리 500개 계획을 제시했지만, 산단 안에서 전력망과 공장 데이터, 중소기업 참여, 지역 인재, 청년 정주 여건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베이 지역의 경험은 자본 집중이 기술 성장을 빠르게 만들 수 있지만 생활비와 격차, 산업 편중을 함께 키운다는 점을 보여줬다. 한국형 AI 골드러시가 수도권 일부 기업의 성과에 머물지 않으려면 산업단지가 공장 부지에서 데이터와 사람, 전력을 연결하는 지역 생산성의 거점으로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