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외교④] 가치의 언어로 실리를 협상하는 국가전략

민주주의·문화·기술·평화를 외교 자산으로 묶는 시도…국내 신뢰와 후속 집행이 성패 가를 변수

2026-06-15     박준식 기자

 

[KtN 박준식기자]이재명 대통령의 첫 유럽 순방에서 반복된 단어는 민주주의, 평화, 연대, 규범 기반 국제질서였다. 브뤼셀에서는 자유무역과 다자주의가 거론됐고, 로마에서는 헌정질서와 인간의 존엄, 보편적 가치가 언급됐다. 교황청에서는 한반도 평화와 세계의 연대가 전면에 놓였다. 그러나 순방의 실제 협상 의제는 철강 쿼터, 디지털통상, 비밀정보보호협정, 방산·우주·AI·반도체 협력, 문화유산 교류,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로 이어졌다. 가치의 언어와 실리의 의제가 한 일정 안에서 동시에 움직인 셈이다.

이재명식 외교의 네 번째 축은 가치와 실리의 결합이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말하면서도 통상과 산업을 놓치지 않고, 문화와 연대를 말하면서도 관광·전시·도시 브랜드·청년 교류를 외교 자산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가치외교와 실용외교를 분리하지 않고, 가치의 언어로 협상 공간을 열어 실질 이익을 확보하려는 접근에 가깝다.

유럽 순방에서 민주주의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탈리아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민주주의, 헌정질서, 인간의 존엄성, 세대 간 통합,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양국이 공유하는 가치로 제시했다. 이어 주권자의 힘으로 헌정질서를 지켜낸 ‘빛의 혁명’을 국정철학과 연결했다. 한국의 국내 정치 경험을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신뢰 언어로 쓰려는 흐름이다.

유럽은 가치의 언어를 중요하게 다루는 권역이다. EU와 G7 주요국은 민주주의, 법치, 인권, 규범 기반 질서를 외교와 통상의 기본 명분으로 삼는다. 한국이 유럽과 철강, 탄소규제, 디지털통상, 방산, AI, 우주 협력을 논의하려면 신뢰의 언어가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는 한국의 민주주의 경험을 협상 테이블의 배경 자산으로 삼으려 한다. 한국이 단순한 제조업 수출국이 아니라 같은 규범을 공유하는 파트너라는 점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민주주의를 외교 자산으로 쓰는 순간 국내 제도 신뢰는 더 무거운 부담이 된다. 해외에서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말하는 정부는 국내에서 선거관리, 법치, 공공기관 책임성, 권력기관 운영의 안정성을 함께 증명해야 한다. 국내 제도가 흔들리면 유럽에서 말한 민주주의의 설득력도 약해진다. 가치외교는 해외 발언으로만 성립하지 않는다. 국내 제도의 안정성과 국제 발언의 정합성이 맞아야 외교 자산으로 기능한다.

문화외교는 순방의 또 다른 축이었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국립중앙박물관과 우피치미술관은 문화유산 교류와 박물관 협력 강화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전시 교류, 해설과 교육, 소장품 관리, 복원, 출판, 인력 교류가 협력 범위로 제시됐다. 한복 패션쇼, K-클래식 음악인 간담회,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자 격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관련 일정도 같은 순방 흐름 안에 배치됐다.

문화는 더 이상 외교의 부속 일정에 머물지 않는다. K-팝과 드라마의 인기를 넘어 박물관, 전통의상, 클래식, 문화유산, 디지털 콘텐츠, 청년 교류가 외교의 실질 자산으로 들어오고 있다. 한국의 문화적 매력은 관광객을 부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시 유치, 교육 협력, 콘텐츠 산업, 도시 브랜드, 국가 이미지, 소비재 수출과 연결된다. 이재명 정부는 문화자산을 산업과 외교의 사이에 놓으려 한다.

우피치 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협력은 문화외교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담고 있다. 우피치의 대표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는 전시 교류 논의가 이어질 경우 관람 산업, 박물관 역량, 문화유산 보존·복원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양해각서만으로 성과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작품 대여 조건, 보험, 복원 기술 교류, 전시 일정, 관람 수요, 예산, 전문 인력 교류가 뒤따라야 한다. 문화외교 역시 발표보다 집행에서 성과가 갈린다.

 

김혜경 여사의 한복 패션쇼 참석과 관계자 간담회는 전통문화의 외교적 쓰임을 드러냈다. 이탈리아 예술 교육기관 학생들이 한복의 실루엣과 소재, 패턴을 연구하고 창작 컬렉션으로 재해석한 대목은 문화교류가 단순 소개를 넘어 교육과 창작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말한다. 다만 한복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행사성 접근만으로는 부족하다. 전통문화가 장기적 교류 자산이 되려면 교육 프로그램, 디자이너 교류, 전시, 제작 협업, 저작권과 브랜드 전략까지 이어져야 한다.

K-클래식 일정도 같은 맥락이다. 벨기에에서 열린 차세대 K-클래식 음악인 간담회는 한국 청년 음악인들이 유럽 무대에서 쌓아온 성과를 외교 자산으로 확인한 자리였다.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현지 음악 교육, 호스트 가족 전통, 유학생 네트워크는 국가 간 문화교류의 오래된 기반이다. K-클래식은 단기간 유행보다 개인의 기량과 교육 체계, 현지 네트워크가 결합해야 성장한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홍보보다 지속 가능한 지원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는 가치외교와 문화외교, 평화외교가 만나는 가장 큰 무대다. 서울 세계청년대회는 전 세계 가톨릭 청년들이 모이는 종교 행사이지만,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국제 청년 교류, 관광, 국가 브랜드, 한반도 평화 메시지를 함께 담을 수 있는 외교 플랫폼이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 가톨릭이 다수 종교가 아닌 국가에서는 처음 열리는 대회라는 조건도 국제사회에 전할 상징성을 키운다.

세계청년대회가 외교 자산으로 남으려면 행사 운영 능력과 메시지 설계가 함께 필요하다. 숙박, 교통, 안전, 의료, 통역, 지방 프로그램, 종교계와 정부의 역할 분담, 자원봉사자 운영이 모두 중요하다. 청년들이 한국 문화를 경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분단 현실, 평화, 민주주의, 연대의 의미를 접할 수 있는 구조도 필요하다. 대회가 관광 이벤트로만 소비되면 외교적 의미는 줄어든다. 반대로 청년 교류와 평화 담론이 연결되면 한국 외교의 장기 자산이 될 수 있다.

기술외교도 가치와 실리의 결합 속에 놓인다. 이재명 대통령은 EU와의 논의에서 AI 접근성과 포용성을 중시하는 ‘모두의 AI’를 정책 목표로 소개했다. AI가 미래 성장의 핵심 동력이지만 일부 계층과 기업에만 혜택이 집중될 경우 격차를 키울 수 있다는 인식도 제시했다. 기술을 성장산업으로만 보지 않고 포용과 공공성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접근이다.

 

AI, 반도체, 양자기술, 우주, 방산은 모두 경제안보의 핵심 분야다. 동시에 민주주의와 인권, 개인정보, 공정성, 접근성 논쟁과도 연결된다. EU는 AI와 개인정보, 디지털 규범에서 세계 표준을 만들려는 권역이다. 한국이 EU와 기술협력을 넓히려면 단순한 기술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술의 사회적 책임, 데이터 보호, 공정한 접근, 산업 경쟁력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모두의 AI’를 외교 언어로 꺼낸 배경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기술외교 역시 국내 실행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전국민 무료 AI 서비스, 글로벌 AI 허브, 반도체 공동연구, 양자기술 협력은 모두 예산과 인력, 규제 정비, 민간 기업 참여가 필요하다. 해외 정상회담에서 기술 협력을 말해도 국내 연구 생태계가 약하거나 규제가 불명확하면 성과는 제한된다. 기술외교는 외교부만의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 산업, 교육, 금융, 개인정보 규제, 인재 정책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가치의 언어로 실리를 얻는 외교는 높은 수준의 정교함을 요구한다. 가치만 앞세우면 국내 산업의 이해를 놓칠 수 있고, 실리만 앞세우면 유럽과 국제사회에서 신뢰의 언어를 잃을 수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 평화와 연대, 인간의 존엄을 말하면서 철강 쿼터와 탄소규제, 방산 정보보호, AI 협력, 문화유산 교류를 동시에 협상해야 한다. 이재명 외교가 어려운 이유는 가치와 실리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둘을 같은 테이블에서 작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정치의 부담은 작지 않다. 외교 성과가 순방장 발표문으로만 남을 경우 야권과 여론은 의전 외교, 행사 외교, 말뿐인 가치외교로 비판할 수 있다. 반대로 경제 성과만 강조하면 민주주의와 평화, 문화외교의 의미가 약해질 수 있다. 정부는 순방 이후 무엇이 실제로 달라졌는지 계속 제시해야 한다. 쿼터, 협정, 투자, 공동연구, 전시 교류, 청년대회 준비, 남북 긴장 완화 조치가 구체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문화와 가치가 실리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시간도 필요하다. 박물관 협력은 전시 일정과 전문 인력 교류로, 한복과 K-클래식은 교육과 창작 네트워크로, 세계청년대회는 관광과 청년교류, 평화 담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기술협력은 공동연구 예산과 인력 이동, 표준 협력으로 확인돼야 한다. 가치외교는 말의 품격보다 실행의 지속성으로 평가받는다.

 

이재명식 외교의 가장 큰 야심은 한국의 산업, 기술, 문화, 민주주의, 평화를 하나의 국가 협상력으로 묶는 데 있다. 한국이 커진 경제력과 문화적 영향력, 기술 경쟁력, 민주주의 경험을 따로 쓰지 않고 하나의 외교 자산으로 결합하려는 시도다. 제조업 국가는 통상 협상에서, 문화국가는 이미지 경쟁에서, 민주주의 국가는 신뢰 협상에서, 기술국가는 미래 규칙 논의에서 힘을 얻는다. 이재명 정부는 한국이 가진 여러 자산을 한꺼번에 외교 테이블에 올리려 한다.

가장 큰 약점도 같은 지점에 있다. 국내 제도 신뢰가 흔들리면 민주주의 외교는 힘을 잃고, 후속 집행이 약하면 문화외교는 행사 기록으로 남으며, 기술협력이 예산과 인력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미래산업 외교는 선언에 그친다. 평화외교도 군사적 신뢰 회복 장치 없이 상징만 반복하면 국내 설득력을 잃는다. 여러 자산을 묶는 전략은 성공하면 외교 체급을 키우지만, 실패하면 여러 분야의 취약성이 동시에 드러난다.

첫 유럽 순방은 이재명 정부 외교의 완성된 성과라기보다 국가전략의 배치도에 가깝다. EU에는 통상과 규제 협상을, 이탈리아에는 제조업과 문화 협력을, 교황청에는 한반도 평화와 청년 연대를 배치했다. 각각의 일정은 다른 의제로 보였지만, 모두 한국의 협상 자산을 넓히는 방향으로 연결됐다. 가치의 언어를 앞세워 실리의 공간을 만들고, 실리 협상을 통해 가치외교의 지속성을 확보하려는 구조다.

성과는 말보다 후속 결과로 남아야 한다. 철강 무관세 물량, CBAM 검증기관, 디지털통상협정의 기업 체감 효과, 비밀정보보호협정 체결, 우피치와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교류,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준비 체계, 남북 긴장 완화 장치, 국내 민주주의 제도 신뢰가 평가 기준이다. 가치와 실리를 함께 말한 외교는 가치와 실리 양쪽에서 모두 검증받는다.

대한민국이 가진 자산은 과거보다 커졌다. 그러나 자산이 크다고 자동으로 협상력이 커지지는 않는다. 산업은 규칙 속에서 움직이고, 문화는 관리와 투자가 필요하며, 민주주의는 국내 제도 신뢰로 증명되고, 평화는 군사적 긴장 관리로 확인된다. 이재명 정부가 가치의 언어로 실리를 협상하려면 발표문보다 강한 후속 집행이 필요하다.

이재명 외교의 마지막 평가는 순방장의 환대가 아니라 한국의 조건이 얼마나 바뀌었는지에서 갈린다. 기업의 비용이 줄었는지, 시장 접근권이 넓어졌는지, 문화자산이 장기 협력으로 이어졌는지, 기술협력이 제도로 굳어졌는지, 한반도 긴장이 관리됐는지, 국내 민주주의 신뢰가 외교 발언의 무게를 떠받쳤는지가 남는다. 가치와 실리를 한 테이블에 올린 외교는 더 많은 가능성을 열지만, 더 엄격한 결과표를 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