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A] 박희열 ‘L 'appartment(Summer)’, 붉은 드레스와 빈 의자 사이의 거리
97×130cm 아크릴 회화… 초록 숲 앞 인물과 새가 마주하지 않는 구조
[KtN 박준식기자]짙은 초록 숲 앞에 붉은 드레스의 인물이 서 있다. 옷자락은 왼쪽으로 크게 펼쳐지고, 한쪽 팔은 위로 올라간다. 오른쪽 테이블 위에는 붉은 새가 앉아 있고, 왼쪽 아래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다. 박희열(Hee Yeol, Park)의 ‘L 'appartment(Summer)’는 인물과 새, 의자와 테이블을 가까운 자리에 배치하면서도 어느 대상도 완전히 마주 보게 하지 않는다. 작품의 긴장은 붉은 드레스와 빈 의자 사이에 남은 거리에서 먼저 생긴다.
‘L 'appartment(Summer)’는 97×130cm 크기의 캔버스에 아크릴로 제작된 작품이다. 캔버스 대부분은 초록 숲으로 채워졌다. 짙은 초록과 청록, 밝은 초록이 짧은 붓질로 겹쳐지며 숲의 밀도를 만든다. 숲은 뒤로 물러난 배경이 아니라 인물과 새를 둘러싼 두꺼운 환경에 가깝다. 초록이 촘촘하게 쌓일수록 붉은 드레스와 붉은 새는 더 강하게 떠오른다.
인물의 얼굴은 작고 표정도 절제돼 있다. 감정은 얼굴보다 몸의 방향과 드레스의 움직임에서 먼저 읽힌다. 왼쪽으로 넓게 번지는 붉은 드레스는 인물의 몸보다 크게 확장되고, 위로 뻗은 팔은 옷자락의 방향을 한 번 더 밀어 올린다. 발은 바닥에 닿아 있지만 드레스는 바람을 따라 흐르는 듯하다. 멈춰 선 몸과 움직이는 옷자락 사이에서 자유의 감각이 만들어진다.
오른쪽의 새는 인물과 같은 붉은 계열로 처리됐다. 크기는 작지만 색의 강도 때문에 존재감이 분명하다. 새는 인물 가까이에 있으나 인물과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인물도 새를 바라보지 않는다. 두 대상은 같은 색으로 연결돼 있으면서도 직접적인 접촉을 피한다. 말없이 곁에 놓인 새는 소통을 완성하는 존재라기보다 소통의 가능성을 남기는 상대역에 가깝다.
의자와 테이블은 작품에 생활의 기척을 넣는다. 오른쪽에는 새가 앉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왼쪽 아래에는 초록 의자가 크게 놓여 있다. 의자는 비어 있다. 빈 의자는 작품의 중심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지만, 붉은 드레스와 새 사이에 놓인 관계를 다시 보게 만든다. 마주 앉을 사물은 있으나 대화는 시작되지 않았고, 새와 인물은 가까이 있으나 말은 오가지 않는다. 자유와 소통의 감각은 완성된 상태보다 기다림의 상태로 남는다.
‘L 'appartment(Summer)’라는 이름은 아파트 또는 거주 공간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캔버스에서 가장 강하게 다가오는 요소는 실내가 아니라 숲이다. 의자와 테이블은 생활 공간의 사물로 놓이고, 초록 숲은 외부 자연의 밀도를 만든다. 두 요소가 한자리에 놓이면서 작품은 방 안과 숲속 사이의 경계에 선다. 여름은 특정 장소의 계절이라기보다 숲의 밀도와 붉은색의 온도 속에 남는다.
초록과 붉은색의 대비는 작품을 빠르게 각인시킨다. 숲은 빽빽하고, 인물과 새는 선명하다. 붉은 드레스는 자유의 몸짓으로, 붉은 새는 소통의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 다만 오래 봐야 할 대목은 상징의 명료함보다 대상들이 서로를 비껴서는 방식이다. 인물과 새는 함께 있으나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의자는 놓여 있으나 비어 있으며, 숲은 자연이면서도 개방감보다 밀도를 만든다.
박희열 회화에서 초록은 자연의 생명감을 밀어 올리고, 붉은색은 감정의 온도를 높이는 색으로 반복된다. ‘L 'appartment(Summer)’에서도 초록은 숲의 생명력을 만들면서 동시에 인물을 둘러싸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붉은색은 인물과 새를 하나의 정서로 묶지만, 의미를 빠르게 읽히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색채는 작품의 접근성을 높이면서도 해석의 방향을 일정하게 좁힌다.
‘L 'appartment(Summer)’의 설득력은 자유와 소통이라는 주제를 선언하는 데 있지 않다. 붉은 드레스와 새, 초록 숲과 빈 의자, 테이블과 인물 사이의 간격이 서로를 붙잡을 때 작품의 긴장이 생긴다. 드레스는 바람처럼 펼쳐지지만 몸은 멈춰 있고, 새는 곁에 있지만 날지 않으며, 의자는 대화를 암시하지만 비어 있다. 자유와 소통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관계로 남는다.
박희열은 자연을 단순한 배경으로 두지 않는다. 숲은 인물의 감정을 밀어 올리는 밀도 높은 공간이 되고, 새는 장식적 소재보다 관계의 거리를 만드는 존재가 된다. 의자와 테이블은 생활의 흔적을 남기지만, 동시에 비어 있는 대화의 자리를 만든다. 작품은 붉은색의 선명함으로 쉽게 다가오면서도, 가까이 놓인 대상들이 서로 닿지 않는 거리에서 다시 멈춘다.
붉은 드레스와 새가 자유와 소통을 향해 열려 있다면, 초록 숲과 빈 의자는 그 의미를 서둘러 완성하지 못하게 붙잡는다. ‘L 'appartment(Summer)’에서 자유는 넓은 공간으로 빠져나가는 해방감이 아니라 촘촘한 숲 앞에서 펼쳐진 한 번의 몸짓으로 남는다. 소통 역시 마주 보는 대화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닿지 않는 존재들의 간격으로 제시된다. 작품의 무게는 주제를 크게 말하는 데보다, 붉은 드레스와 빈 의자 사이에 놓인 거리에서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