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A]박희열 ‘A Moment of Serenity’, 짙은 숲과 기울어진 들판 사이의 푸른 인물
97×116.8cm 아크릴 회화… 자연의 무게 속에 작게 선 인물이 만든 정지감
[KtN 박준식기자]짙은 초록 숲이 위쪽을 누르고, 황갈색 들판이 비스듬히 흐른다. 아래쪽 풀은 짧은 선으로 솟아 있고, 왼쪽 아래에는 붉은색과 분홍빛이 낮게 번져 있다. 박희열(Hee Yeol, Park)의 ‘A Moment of Serenity’는 넓은 자연 한가운데 푸른 옷의 인물을 작게 세운 작품이다. 인물은 숲을 밀어내지 않고, 들판을 가로지르지도 않는다. 자연의 여러 층이 겹치는 자리에서 몸을 세우며 작품의 중심을 잡는다.
‘A Moment of Serenity’는 97×116.8cm 크기의 캔버스에 아크릴로 제작됐다. 산과 숲, 들판을 다룬 박희열의 다른 풍경 작품들과 연결되지만, 이 작품의 시선은 자연 자체보다 자연 안에 선 한 인물의 위치에 모인다. 인물은 크지 않다. 얼굴도 자세도 세밀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짙은 숲 아래, 황갈색 경사면 위, 솟은 풀 뒤에 놓인 푸른색의 몸은 작품 안의 여러 색을 한곳으로 묶는다.
위쪽 숲은 짙은 초록과 검은빛, 노란빛, 붉은빛이 뒤섞인 덩어리로 놓인다. 나무들은 세밀한 수종 묘사보다 붓질과 색의 중첩으로 정리됐다. 숲은 멀리 물러난 배경이라기보다 인물 뒤에서 내려오는 무게에 가깝다. 초록은 생명의 색으로 읽히지만, 여기서는 밝은 생동감보다 깊고 두꺼운 자연의 압력을 만든다.
가운데 들판은 황갈색으로 넓게 누워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완만하게 기울어진 선은 작품에 낮은 움직임을 만든다. 들판은 탁 트인 평지처럼 열리지 않는다. 숲 아래에서 비스듬히 흘러가며 인물이 선 자리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푸른 옷의 인물은 그 경사 위에 서 있다. 자연은 인물을 편안하게 감싸기보다, 인물이 버티고 서야 할 조건처럼 놓인다.
아래쪽 풀은 짧고 날카로운 붓질로 솟는다. 녹색과 노란색의 작은 선들이 앞쪽을 촘촘하게 채우며, 들판의 부드러운 면과 다른 질감을 만든다. 숲과 들판이 큰 색의 덩어리라면, 아래쪽 풀은 작은 움직임의 집합이다. 인물은 그 뒤에 놓이며, 앞쪽의 풀과 뒤쪽의 숲 사이에서 더 작고 조심스럽게 보인다.
왼쪽 아래의 붉은색과 분홍빛은 작품 안에서 다른 온도를 낸다. 짙은 숲, 황갈색 들판, 푸른 인물 사이에 낮게 남은 붉은색은 풍경 전체를 뜨겁게 바꾸지는 않는다. 대신 자연 안에 묻힌 감정의 흔적처럼 작동한다. 붉은색은 캔버스 아래쪽에 머물며, 푸른 인물과 직접 맞서기보다 주변의 색을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인물의 푸른 옷은 주변 색과 뚜렷하게 갈라진다. 초록 숲과 황갈색 들판, 붉은 흔적 사이에서 푸른색은 작품의 온도를 낮춘다. 두 팔은 몸 앞쪽으로 모여 있고, 몸은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얼굴은 단순한 윤곽으로 처리돼 표정의 세부보다 위치와 색이 먼저 읽힌다. 박희열은 인물의 감정을 얼굴에 몰아넣기보다 자연의 무게 속에 세워진 자세로 드러낸다.
‘A Moment of Serenity’라는 이름은 평온한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캔버스 안의 안정감은 자연이 가벼워져서 생기지 않는다. 숲은 어둡고 밀집해 있으며, 들판은 비스듬히 흐르고, 풀은 아래에서 솟는다. 푸른 인물은 그 사이에 놓인다. 평온은 넓게 펼쳐진 안락함보다, 자연의 압력 속에서 쉽게 밀려나지 않는 작은 몸의 자세에서 생긴다.
박희열의 다른 자연 회화에서 초록은 생명감의 밀도를 만들고, 붉은색은 감정의 온도를 높이는 색으로 반복된다. ‘A Moment of Serenity’에서도 초록은 자연의 밀도를 만든다. 다만 이 작품의 초록은 인물을 환하게 받쳐주는 배경이 아니라, 인물 뒤에서 무겁게 내려오는 공간이다. 푸른 옷은 그 초록을 끊고 서며, 인물이 자연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도록 붙잡는다.
작품의 설득력은 인물을 얼마나 세밀하게 그렸는가보다 인물이 놓인 자리에서 나온다. 푸른 옷의 작은 몸은 숲 아래, 들판의 경사 위, 솟은 풀 뒤에 놓이며 자연의 여러 층을 한 지점으로 모은다. 자연이 크게 말하고, 인물은 작게 머문다. 그 차이가 작품의 긴장을 만든다.
‘A Moment of Serenity’는 평온을 환한 풍경으로 그리지 않는다. 짙은 숲과 기울어진 들판, 솟은 풀과 낮게 번진 붉은색이 먼저 자리하고, 푸른 인물은 그 사이에서 조용히 몸을 세운다. 작품의 안정감은 자연이 조용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무게 속에서 인물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데서 생긴다. 박희열이 붙잡은 순간은 자연의 품 안에 안긴 평온보다, 그 자연을 견디며 잠시 멈춘 인물의 상태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