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환⑤] 한국 AI 바이오, 연구비보다 ‘연결된 데이터’가 승부처
병원·제약사·AI기업·규제 체계가 같은 학습 회로로 묶일 때 신약개발 생산성 개선
[KtN 최기형기자]신약 후보물질이 임상 1상에 들어간 뒤 시장에 도달하는 비율은 약 13%에 그친다. 성공한 신규 분자 하나를 시장에 내놓는 데 드는 비용은 2016년 약 25억 달러에서 현재 약 40억 달러 수준으로 높아졌다. 바이오·제약 R&D 지출의 약 70%는 임상 개발 단계에 집중된다. 맥킨지앤드컴퍼니의 2026년 6월 바이오·제약 R&D 분석은 AI 바이오 경쟁의 중심이 더 많은 연구비나 더 강한 모델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연구개발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데이터가 다음 판단으로 돌아가는 구조가 생산성 격차를 가른다는 분석이다.
한국 바이오 산업은 병원, 임상시험 인프라, 제약·바이오벤처, 디지털 헬스 기업, 반도체·클라우드 기반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러나 각 자산이 따로 움직이면 AI 신약개발의 성과는 개별 프로젝트에 머문다. 병원 데이터가 환자군 정의와 임상 설계로 이어지고, 후보물질 실험 데이터가 표적 검증과 제조 전략으로 되돌아가며, 임상 운영 데이터가 다음 시험의 모집 전략과 기관 배치에 반영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AI 바이오 경쟁의 본질은 자원의 보유가 아니라 자원의 연결 방식에 가깝다.
맥킨지가 제시한 AI 기반 R&D 모델은 환자와 질병 생물학 이해, 약물 표적 발굴과 검증, 후보물질 최적화, 임상시험 설계와 실행, 승인 이후 환자 영향 확대를 하나의 학습 회로로 묶는다. 기존 신약개발은 각 단계를 통과하는 데 무게가 실렸다. AI 기반 구조에서는 임상 결과가 표적 선정과 환자군 정의로 돌아가고, 제조·상업화 단계의 정보가 후보물질 설계와 포트폴리오 판단에 다시 들어간다. 개발 단계마다 생긴 정보가 끝점에 머물지 않고 다음 판단의 입력값으로 바뀌는 방식이다.
한국의 병원 데이터는 AI 바이오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다. 같은 질환명 아래에서도 환자의 유전적 특성, 병리 진행, 동반 질환, 치료 이력, 실제 진료 패턴은 다르게 나타난다. 전자의무기록, 영상, 유전체, 처방, 검사 결과가 분리돼 있으면 치료 반응이 높은 환자군을 정교하게 찾기 어렵다. AI가 환자 이질성과 바이오마커 후보를 좁히려면 데이터의 양만큼 데이터의 품질, 표준, 활용 가능성이 중요하다. 병원 안에 축적된 데이터가 연구개발 판단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데이터는 산업 자산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제약사와 바이오벤처의 실험 데이터도 같은 회로 안에 들어가야 한다. 후보물질 설계 과정에서 나온 결합력, 선택성, 안정성, 독성, 제조 가능성 정보는 다음 실험의 기준이 된다. 생성형 AI가 새로운 후보 구조를 제안하더라도 실험 결과가 다시 모델과 연구 판단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복 학습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동화 실험실과 고처리량 스크리닝은 데이터를 빠르게 만들 수 있지만, 어떤 결과를 버리고 어떤 후보에 자원을 집중할지 결정하는 조직 구조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
표적 발굴에서는 단순한 데이터 분석보다 인과 판단이 중요해진다. 질병과 함께 관찰되는 신호가 실제 질병 진행을 움직이는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맥킨지는 머신러닝이 복잡한 생물학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고, 인과모델이 실제 결과를 움직이는 변수를 구분한다고 설명한다. 한국 바이오 기업이 AI 신약개발에서 성과를 내려면 후보 표적을 많이 뽑는 경쟁보다 실패 가능성이 높은 표적을 앞에서 걸러내는 역량이 중요해진다.
임상시험은 한국 AI 바이오의 산업적 승부처다. 환자 모집 속도, 중도 탈락률, 대조군 성과, 기관별 운영 역량, 평가변수 설정은 개발 일정과 비용을 직접 움직인다. 병원과 제약사, 임상시험수탁기관, AI기업이 서로 다른 데이터 기준으로 움직이면 임상 운영 데이터는 다음 시험의 설계 자산으로 쌓이지 않는다. AI가 여러 환자군과 프로토콜 가정을 병렬로 검토하고, 임상 운영 중 위험 신호를 빠르게 잡으려면 데이터 표준과 책임 구조가 먼저 맞아야 한다.
규제 체계도 AI 바이오 경쟁의 일부로 들어왔다. AI가 임상 설계, 환자 선별, 근거 종합, 규제 제출 자료 검토에 관여할수록 품질, 검증, 감사 가능성, 인간 감독 기준이 중요해진다. 맥킨지는 에이전트 AI가 승인된 임상 프로토콜을 독자적으로 수정하거나 규제 판단을 대신하는 구조가 아니라, 감독받는 의사결정 지원층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한국에서도 AI 기반 근거가 허가와 심사 과정에서 어떻게 검증될지에 대한 기준이 산업 확산 속도를 좌우할 수 있다.
AI기업과 제약사의 관계도 재정의가 필요하다. AI기업은 모델과 분석 역량을 제공할 수 있고, 제약사는 질병 이해, 실험 설계, 임상 전략, 규제 경험을 갖고 있다. 양쪽이 단순 용역 관계로 연결되면 성과는 특정 후보물질 탐색이나 문헌 분석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환자군 정의, 표적 검증, 후보물질 최적화, 임상 설계가 함께 돌아가는 구조에서는 AI기업의 기술과 제약사의 과학 판단이 같은 업무흐름 안에 들어가야 한다. 모델 성능보다 공동 학습 구조가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클라우드와 AI 반도체는 바이오 R&D의 뒤쪽 인프라가 아니라 전면 조건으로 올라섰다. 대규모 오믹스 데이터, 영상 데이터, 실제 진료 데이터, 임상시험 데이터, 문헌 데이터를 함께 다루려면 안정적인 연산 자원과 데이터 처리 체계가 필요하다. 다만 데이터센터와 컴퓨팅 자원만으로 신약개발 생산성이 오르지는 않는다. 병원과 기업, 연구기관이 어떤 데이터를 어떤 형식으로 만들고, 어떤 판단에 연결할지 정하지 않으면 인프라 투자는 계산 능력 확충에 머문다.
한국의 공공 R&D 투자도 같은 기준에서 재배치될 필요가 있다. 개별 연구과제의 성과가 논문, 특허, 후보물질 발굴 단계에서 끝나면 다음 개발 판단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환자 데이터, 표적 검증, 후보물질 실험, 임상 운영, 제조 가능성 정보가 서로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공공 투자의 산업적 효과가 누적된다. 맥킨지가 강조한 학습 루프는 기업 운영모델에 관한 분석이지만, 국가 R&D 체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제조 전략은 한국 바이오 산업이 놓치기 쉬운 변수다. 신약개발은 임상적 가능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생산 확장성, 품질 관리, 원가, 공급 안정성은 출시 준비와 시장 경쟁력에 영향을 준다. 후보물질 개발 후반에 제조 가능성 문제가 드러나면 비용과 일정 부담이 커진다. 한국이 바이오 제조 역량을 AI R&D와 연결하려면 초기 후보 설계 단계부터 제조·품질 데이터를 함께 반영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데이터 공유를 둘러싼 신뢰도 산업 경쟁력의 조건이다. 의료 데이터는 높은 연구 가치를 갖지만 개인정보, 차별 가능성, 상업적 독점 우려를 동반한다. 데이터 활용을 지나치게 막으면 AI 모델의 성능과 일반화 가능성이 떨어지고, 활용 기준이 느슨하면 사회적 신뢰를 잃는다. 한국 AI 바이오의 확산 속도는 데이터 활용을 허용하느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환자 보호와 연구개발 생산성을 함께 충족하는 기준을 얼마나 예측 가능하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
글로벌 경쟁은 이미 연구개발 운영체계의 싸움으로 옮겨가고 있다. 미국은 빅테크, 클라우드, 바이오벤처, 글로벌 제약사의 결합이 강하고, 유럽은 건강 데이터 공간과 규제 원칙을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아시아 주요국은 제조, 임상, 데이터 인프라, 글로벌 파트너십을 묶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와 병원 데이터, 임상 수행 역량, 바이오 제조 기반을 동시에 갖고 있지만, 각 기반을 하나의 학습 구조로 엮는 작업은 아직 산업적 완성도가 더 필요하다.
기업 내부 역량 확보도 중요해졌다. 맥킨지는 클라우드 기업이 확장 가능한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지만 과학적 업무흐름과 의사결정 구조를 대신 설계할 수는 없다고 봤다. 전문 벤더가 알고리즘을 제공하더라도 기업 내부의 학습 구조를 대신 만들 수는 없다. 지속적인 우위는 어떤 데이터를 내부 자산으로 삼고, 어떤 AI 역량을 직접 보유하며, 어떤 판단 권한을 연구조직 안에 남길지에서 갈린다.
한국 바이오 기업에는 선택의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 모든 AI 기술을 내부에서 직접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질병별 데이터 전략, 표적 검증 기준, 후보물질 우선순위 판단, 임상 설계 의사결정, 제조 가능성 평가처럼 기업의 학습 방식을 좌우하는 역량은 외부에 완전히 맡기기 어렵다. AI를 도입한 기업과 AI로 연구개발 방식을 바꾼 기업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벌어진다.
신약개발 40억 달러 시대에는 더 많은 연구비만으로 비용 압박을 넘기 어렵다. 환자군을 더 정확히 좁히고, 실패 가능성이 높은 표적을 더 빨리 제외하며, 후보물질 실험 결과를 다음 설계에 반영하고, 임상 운영 데이터를 다음 시험 전략으로 돌려보내는 체계가 필요하다. 한국 AI 바이오의 경쟁력은 개별 기술의 보유보다 병원·제약사·AI기업·규제기관이 같은 데이터 회로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바이오 산업의 AI 전환은 기술 도입률보다 학습 속도로 평가될 가능성이 크다.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연구개발 체계, 성공과 실패의 데이터를 다음 판단으로 빠르게 되돌리는 운영 구조, 규제와 신뢰를 함께 갖춘 데이터 활용 기준이 격차를 만든다. 한국 AI 바이오가 글로벌 경쟁에서 앞서려면 연구비와 인프라를 늘리는 전략을 넘어, 데이터를 의사결정으로 바꾸고 의사결정의 결과를 다시 산업 자산으로 축적하는 구조를 먼저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