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한민국①] 경부고속도로에서 AI 기반망까지, K경제 세 번째 도약
산업화의 물류축, 정보화의 통신축을 지나 반도체·데이터센터·피지컬 AI가 국가 성장 인프라로 부상
[KtN 박준식기자]경부고속도로는 산업화 시대의 물류축이었다. 초고속 정보통신망은 디지털 경제의 통신축이었다. 2026년 6월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발표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는 반도체,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를 묶어 인공지능 시대의 국가 기반망을 짜려는 시도로 읽힌다. 공장과 항만을 잇던 도로, 사람과 기업을 잇던 통신망에 이어 연산과 데이터, 현실 세계의 자동화를 잇는 인프라가 국가 성장전략의 전면으로 올라섰다.
박정희 시대의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하나의 산업축으로 묶었다. 도로는 사람과 화물을 빠르게 이동시키는 시설을 넘어 수출 제조업, 공단, 항만, 내륙 물류를 연결하는 국가 성장 장치였다. 김대중 정부의 정보화 전략은 인터넷과 통신망을 경제의 새 기반으로 끌어올렸다. 초고속 인터넷, 벤처 생태계, 전자상거래, 온라인 콘텐츠, 디지털 행정은 정보고속도로 위에서 확산됐다. 대한민국 경제는 물류망을 깔고 제조업을 키웠고, 통신망을 깔고 디지털 산업을 키웠다.
이재명 정부가 제시한 3대 메가프로젝트는 같은 계보 위에 놓인다. 반도체는 AI 시대의 연산 기반이고, AI 데이터센터는 지능을 생산하고 배포하는 설비이며, 피지컬 AI는 인공지능을 공장과 물류, 조선, 자동차, 돌봄, 안전 현장으로 옮기는 실행망이다. 세 축은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반도체가 부족하면 AI 학습과 추론이 막히고, 데이터센터가 부족하면 지능 서비스를 대규모로 공급하기 어렵다. 피지컬 AI가 약하면 AI는 문서와 화면 안에 머물고 제조 현장의 생산성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보고회 모두발언에서 세계 경제지형이 흔들리는 시기를 “승부의 시간”으로 규정했다.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주요국이 인공지능 신대륙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으며, 경쟁 전선은 연산과 추론을 담당하는 반도체, 대규모 데이터를 처리하는 AI 데이터센터, 인공지능을 현실에서 구현할 피지컬 AI, 전력과 용수 같은 기초 인프라까지 넓어졌다고 밝혔다.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는 대도약을 위한 삼각축으로 제시됐다.
정부가 발표한 구상은 개별 산업 육성책보다 크다. 산업통상부는 잠재성장률 1% 시대 진입을 한국 경제의 현실로 제시했고, AI 산업혁명과 지방, 혁신 생태계를 대도약의 승부처로 묶었다. 수도권 반도체 생산능력을 5년 안에 두 배로 늘리고, 2040년대 중후반으로 잡혔던 팹 구축 시기를 2030년대 중반까지 최대 12년 앞당기는 방안도 제시됐다. 서남권은 제2의 반도체 생산기지, 충청권은 첨단 패키징 거점, 동남권과 대경권은 소부장 공급망과 차세대 반도체 거점으로 배치됐다.
경부고속도로가 물류 시간을 줄였듯 AI 기반망은 판단과 생산의 시간을 줄이는 인프라가 된다. 제조업에서 원자재와 완제품이 도로를 따라 움직였다면, AI 경제에서는 데이터와 연산, 모델과 로봇 명령이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현장 장비 사이를 오간다. 정보고속도로가 검색, 포털, 게임, 전자상거래, 디지털 금융을 키웠다면 AI 기반망은 제조 자동화, 지능형 물류, 무인 생산, AI 의료, 로봇 서비스, 에너지 최적화 산업을 키우는 토대가 된다.
반도체는 이 기반망의 출발점이다. AI 모델의 학습과 추론에는 막대한 메모리와 연산 자원이 필요하다. HBM, 첨단 패키징, 서버용 D램, AI 반도체, 기판과 장비는 하나의 공급망 안에서 움직인다. 삼성 측 발표에서도 AI로 기술 패러다임이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바뀌고 있으며, 기존 반도체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에도 폭발적 수요에 대응하기 부족하다는 인식이 제시됐다. 기흥·화성·평택에 이어 용인 국가산단 투자 일정이 앞당겨졌고, 전력·용수·인력·인프라 조건을 고려한 광주 후보지 검토도 언급됐다.
AI 데이터센터는 정보고속도로 시대의 통신망과 닮았지만 역할은 더 넓다. 인터넷 시대의 망은 정보를 연결했다. AI 시대의 데이터센터는 지능을 생산한다. 정부 발표에는 2029년까지 8.4GW 규모, 2035년까지 10GW를 추가한 총 18.4GW 규모 AI 데이터센터 투자 구상이 담겼다. 2029년까지 8.4GW에 해당하는 550조원 규모 투자를 추진하고, 이후 2035년까지 10GW를 추가해 1천조원이 넘는 투자로 확장하겠다는 내용도 제시됐다. 수도권 집중을 벗어나 권역별 데이터센터를 구축해 지역 활성화와 산업 생태계 강화로 연결하겠다는 방향이다.
데이터센터는 서버 건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전력, 냉각, 클라우드 운용, 보안, 통신망, 국산 NPU, 서버용 반도체, 스토리지, 패키지 기판이 함께 필요하다. 데이터센터가 커질수록 반도체 수요가 늘고, 반도체 수요가 늘수록 생산거점과 패키징, 소부장 산업이 확장된다. AI 데이터센터를 국가전략산업으로 다루는 이유도 건설 투자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지능을 대량 생산하고, 산업 현장과 공공서비스, 개인의 일상에 배포하는 능력이 국가 경쟁력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피지컬 AI는 AI 기반망의 마지막 접점이다. 생성형 AI가 문서와 코드, 이미지 중심으로 확산됐다면 피지컬 AI는 현실 세계의 기계와 설비, 차량, 로봇, 센서를 움직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피지컬 AI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데이터 확보 체계와 월드모델 기반 피지컬 AI 파운데이션 모델, 풀스택 국산화, 분야별 실증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주력 산업 생산성을 20% 이상 높이고, 공장뿐 아니라 돌봄과 안전 영역까지 활용 범위를 넓히겠다는 구상도 담겼다.
피지컬 AI 경쟁은 데이터 확보에서 갈린다. 텍스트와 이미지 데이터는 디지털 공간에 방대하게 쌓였지만, 현실 세계의 동작 데이터는 훨씬 비싸고 느리게 모인다. 공 하나를 잡고 던지는 동작에도 크기, 무게, 마찰, 탄성, 속도, 주변 환경이 개입한다. 제조 현장의 손동작, 물류 창고의 이동 경로, 조선소의 조립 순서, 돌봄 현장의 신체 지원 방식은 쉽게 표준화되지 않는다. 피지컬 AI가 로봇 보급 정책에 그치지 않고 데이터 생산 체계와 시뮬레이션 인프라, 현장 실증망까지 요구하는 이유다.
전력과 용수는 AI 기반망의 숨은 축이다. 반도체 팹과 AI 데이터센터는 안정적인 전기와 물 없이 가동될 수 없다. 정부 발표에서는 서남권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6.3GW 전력과 65만톤 용수, 수도권 용인 반도체 팹에 필요한 약 15GW 전력과 150만톤 용수 공급이 제시됐다. 충청·영남·호남·강원권 등에 들어설 대규모 AI 데이터센터에는 8GW 이상 전력이 필요하다는 내용도 나왔다. AI 데이터센터 전용 요금제와 지역 전기요금제 논의도 함께 제시됐다.
전력망의 성격도 바뀐다. 산업화 시대에는 공장과 항만, 도로가 성장의 외형을 만들었다. 정보화 시대에는 통신망과 인터넷 접속률이 성장의 속도를 만들었다. AI 시대에는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반도체 생산망이 서로 맞물린다. 전기가 생산된 곳에서 소비될 수 있는 구조, 재생에너지와 원전, SMR, ESS, 양수발전, 분산형 전력망의 결합은 에너지 정책을 넘어 산업입지 정책이 됐다. 호남에서 생산된 전기를 호남의 반도체 팹에 쓰는 구상은 균형발전과 에너지 전환, 반도체 투자가 같은 표면 위로 올라왔다는 의미를 갖는다.
산업입지의 기준도 수도권 접근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용인과 평택을 중심으로 한 기존 사이트는 전력과 용수, 부지 측면에서 한계가 거론됐다. 전력과 용수, 넓은 부지, 물류 접근성, 인력 확보, 정주 여건을 갖춘 지역이 새 산업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대통령 모두발언에서도 수도권 집중에 따른 비효율과 지방 소멸 위기가 함께 언급됐고, 전력·용수·부지가 풍부한 지역을 새로운 사이트로 개발해야 한다는 방향이 제시됐다.
호남, 충청, 영남, 대경권의 재배치는 균형발전 구호를 넘어 산업입지 전략으로 읽어야 한다. 서남권 반도체 생산기지, 충청권 패키징 거점, 동남권·대경권 소부장 거점, 권역별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 실증과 로봇 생산 기반은 전국 산업망의 구조를 바꾼다. 과거 특정 지역에 집중 투자해 산업화를 밀어붙였던 방식과 달리 AI 기반망은 전력, 데이터, 제조, 인재가 동시에 맞아야 한다. 지역 산업정책은 더 이상 보조축이 아니라 AI 시대 국가 기반망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기업형 첨단도시 구상은 공장 중심 산업정책의 한계를 겨냥한다. 기업이 지방에 투자하려면 부지와 세제만으로 부족하다. 연구자와 엔지니어가 살 수 있는 주거, 교육, 의료, 문화, 교통이 필요하다. 정부는 산업, 혁신, 정주환경을 하나로 연결하고 기업이 원하는 방식으로 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출퇴근과 생활권은 30분, 물류권은 1시간을 목표로 제시됐고, 계획과 보상, 설계를 동시에 추진하는 패스트트랙도 언급됐다.
경부고속도로와 정보고속도로의 공통점은 국가가 먼저 기반을 깔고 기업과 시민의 활동이 뒤따랐다는 점이다.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제조업 물류가 빨라졌고, 정보고속도로 위에서 인터넷 기업과 디지털 서비스가 성장했다. AI 기반망도 같은 순서를 요구한다. 반도체 팹, 데이터센터, 전력망, 피지컬 AI 실증, 기업형 첨단도시가 먼저 깔려야 기업의 투자와 인재 이동, 지역 산업 생태계가 따라붙는다.
차이는 속도와 복잡도에 있다. 도로는 물리적 경로를 만들면 기능이 비교적 분명했다. 통신망은 접속과 속도가 확산의 기준이었다. AI 기반망은 반도체, 전력, 데이터, 모델, 로봇, 클라우드, 규제, 도시, 인재가 동시에 맞아야 작동한다. 어느 한 축이 늦어지면 전체 속도도 떨어진다. 메가프로젝트가 부처별 사업을 넘어 대통령 주재 점검과 전담 체계를 예고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국민보고회 모두발언에서는 청와대 안에 3대 메가프로젝트 담당관을 두고 직접 챙기겠다는 구상도 제시됐다.
대한민국 성장 모델은 매번 기반망의 전환과 함께 바뀌었다. 산업화 시대에는 도로와 항만, 공단이 제조업 국가를 만들었다. 정보화 시대에는 통신망과 초고속 인터넷이 디지털 경제의 문을 열었다. AI 시대에는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피지컬 AI, 전력망과 산업도시가 새로운 기반망이 된다. 3대 메가프로젝트는 개별 투자 규모보다 이 전환의 계보 안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투자 발표 이후의 흐름은 착공과 가동, 인력 유입, 공급망 형성의 순서로 판단받게 된다. 용인과 서남권 반도체 산단의 부지와 보상, 전력망과 용수 공급, AI 데이터센터 입지와 요금체계, 피지컬 AI 데이터 확보와 실증, 기업형 첨단도시의 주거·교통·교육 인프라가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경부고속도로가 길 위의 공장을 만들고 정보고속도로가 인터넷 위의 산업을 만들었듯, AI 기반망은 연산과 지능, 현실 세계의 자동화를 연결하는 국가 성장의 새 바닥이 될 수 있다. 성패는 발표 규모보다 각 일정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맞물리는지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