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대전환기 문화유산, WMF ‘대체 불가’ 목록으로 본 보존의 우선순위
미국 독립 250년 앞두고 10곳 선정 달라스시청·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한국 국가유산 디지털 전환의 빈틈까지
[KtN 전성진기자]아이엠 페이(I. M. Pei)가 설계한 미국 텍사스 달라스시청과 보스턴의 아프리칸 미팅 하우스,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 칼리지 스터디스 빌딩이 같은 위험 목록에 올랐다. 세계기념물기금(World Monuments Fund·WMF)은 미국 독립선언 250주년을 앞두고 ‘대체 불가한 미국(Irreplaceable America)’ 명단을 발표하며 미국의 역사와 문화, 공동체 기억을 품은 유산 10곳을 보존 우선순위에 올렸다. WMF는 개인과 단체로부터 추천을 받은 뒤 문화적 중요성, 보존 시급성, 지역사회 효과를 기준으로 심사를 진행했다.
WMF 명단은 유명 관광지 목록이 아니다. 19세기 전염병 병원 폐허, 식민지 시대 주택군, 흑인 교회, 원주민 선교교회, 현대 공공건축, 실험예술 교육공간, 민속예술 구조물, 항공 실험지, 식물원, 도시 전체가 한 목록 안에 놓였다. 미국사의 승리와 성취만 골라낸 배열이 아니라, 질병과 격리, 노예제 폐지 운동, 원주민 공동체, 이민자 노동, 기후 위기, 도시 재개발 압력이 겹친 장소들이 선정됐다. WMF가 별도로 미국 국립공원체계(National Park System)를 특별 지정한 대목도 같은 흐름에 놓인다.
달라스시청은 이번 명단에서 가장 선명한 현대 유산이다. 1978년 완공된 건물은 케네디 암살 이후 달라스가 추진한 도시 재구상 속에서 만들어졌고, 기울어진 콘크리트 외관과 대형 유리, 시민광장으로 공공기관의 개방성과 도시 행정의 상징성을 함께 드러냈다. WMF는 달라스시청이 민간 개발 압력, 장기간 누적된 유지보수 지연, 보수비 논란 속에서 방치나 철거 위험에 놓였다고 봤다.
달라스시청 논쟁은 문화유산 보존이 오래된 것만 지키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20세기 후반의 브루탈리즘 건축은 아직 시민 다수에게 ‘낡은 관공서’로 인식되기 쉽다. 도심 땅값이 오르고 재개발 수익 논리가 강해지면 공공건축의 역사적 가치보다 철거 이후의 경제성이 먼저 거론된다. 그러나 이미 세워진 건축을 고쳐 쓰는 선택은 탄소 배출을 줄이고, 도시의 공공 공간을 유지하며, 한 도시가 겪은 정치적 기억을 다음 세대에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랙마운틴 칼리지 스터디스 빌딩은 예술교육의 장소가 어떻게 유산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블랙마운틴 칼리지는 1933년 설립 이후 요제프 알버스(Josef Albers), 아니 알버스(Anni Albers),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 존 케이지(John Cage), 메르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등 전후 미국 예술사의 주요 인물이 거쳐 간 실험적 교육 공동체였다. 스터디스 빌딩은 1940~1942년 학생과 교수, 직원이 지역 재료와 전시 체제의 제약 속에서 함께 지은 건물로, 현재 심각한 노후화와 수분 침투, 기후 관련 손상을 겪고 있다.
AI 생성 도구가 이미지를 만들고 음악을 조합하며 문장을 생산하는 시대에 블랙마운틴 칼리지의 가치는 더 또렷해진다. 창작은 결과물의 이미지 파일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누가 함께 배웠는지, 어떤 공간에서 재료를 다뤘는지, 실패와 협업이 어떤 방식으로 축적됐는지가 예술사의 구조를 만든다. 디지털 아카이브가 작품과 인물 정보를 저장할 수는 있어도, 교육 공동체가 남긴 장소의 밀도까지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보스턴 아프리칸 미팅 하우스는 1806년 자유 흑인 장인들이 세운 미국에서 가장 오래 남은 흑인 교회 건물로 소개됐다. WMF는 건물이 예배 공간을 넘어 강연, 집회, 노예제 폐지 운동의 거점으로 기능했고,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와 마리아 스튜어트(Maria Stewart) 등이 이 공간과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는 건물 보존과 해설 프로그램을 지속하기 위한 지원이 필요한 상태다.
미국 뉴멕시코의 아코마·라구나 푸에블로 선교교회는 17세기 스페인 정복 이후 푸에블로 공동체가 세운 종교·문화 공간으로 분류됐다. WMF는 두 교회가 원주민 공동체의 신앙과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장소라고 설명하면서도, 재원 부족과 석조·어도비 벽체의 손상, 전통 수리기술 약화가 보존을 위협한다고 짚었다. 식민의 상처와 공동체의 지속성이 한 장소 안에 함께 남은 경우다.
뉴올리언스와 뉴포트는 기후 위기 앞에 놓인 역사도시의 현재를 압축한다. 뉴올리언스의 프렌치쿼터, 트레메, 마리니, 센트럴시티, 세븐스워드 같은 역사 지역은 건축, 음악, 음식, 생활권을 통해 원주민·아프리카·유럽·카리브해 문화가 겹친 도시 풍경을 이룬다. WMF는 홍수, 노후 기반시설, 보험료 상승, 인구 이동을 뉴올리언스의 위험 요인으로 제시했다. 뉴포트의 식민지 시대 주택군은 박제된 박물관이 아니라 실제 거주지로 유지돼왔지만, 해수면 상승과 폭풍 강도 증가로 역사 건축의 상당 부분이 위험권에 들어갔다.
로스앤젤레스 왓츠 타워스(Watts Towers)는 이민자 개인의 노동이 지역 정체성으로 바뀐 유산이다. 이탈리아 이민자 사바토 ‘사이먼’ 로디아(Sabato “Simon” Rodia)는 1921년부터 로스앤젤레스 남부 왓츠 지역의 삼각형 부지에 17개 구조물을 손으로 세웠고, 유리와 타일, 도자기 조각을 박아 넣었다. 가장 높은 탑은 99.5피트에 이른다. 현재 왓츠 타워스는 환경 스트레스, 지진 위험, 방문객 증가, 제한된 자원이라는 복합 압력을 받고 있다.
오하이오 데이턴의 라이트 형제 유적은 기술혁신의 기억도 물리적 장소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허프먼 프레리 비행장, 라이트 사이클 컴퍼니, 라이트 앤드 라이트 인쇄소, 호손힐 등은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와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가 동력비행을 실험하고 발전시킨 현장이다. WMF는 인력 축소와 자본사업 지연, 문화자원 조사 지연이 장기 보존과 공공 해설을 위협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위험 유산 목록은 한국 국가유산 정책에도 직접적인 비교 지점을 만든다. 한국은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 시행과 함께 문화재청을 국가유산청으로 바꾸고, 기존 ‘문화재’ 명칭을 ‘국가유산’으로 전환했다. 국가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나뉘며, 정부는 60여 년간 이어진 문화재 체계를 국제 기준과 변화된 정책 환경에 맞춰 바꾸겠다고 설명했다.
명칭 전환은 행정 언어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재산’의 관점이 강했던 문화재에서 ‘유산’으로 옮겨가는 일은 사물 중심 보존에서 장소, 생태, 공동체, 전승, 활용까지 함께 보는 정책 구조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궁궐과 사찰, 왕릉처럼 이미 제도권 안에 들어온 유산뿐 아니라 근현대 공공건축, 산업시설, 이주와 노동의 공간, 지역 생활문화, 기후 변화에 취약한 해안·하천 유산을 더 촘촘히 다뤄야 하는 시점이 왔다.
국가유산 분야의 AI 전환도 이미 시작됐다.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은 2025년 민간클라우드 기반 AI·데이터레이크 활용지원 사업에 선정돼 한국형 국가유산 기반 멀티모달 인공지능 개발을 추진했다. 국가유산진흥원은 2026년 1월 공공기관 채용정보박람회에서 국가유산 기반 멀티모달 AI ‘하이(HAI, Heritage AI)’를 공개하고, 국가유산 데이터를 활용한 이미지 생성 체험을 진행했다. 멀티모달 AI는 문자, 이미지, 음성, 3차원 데이터를 함께 이해하고 처리하는 기술로 소개됐다.
AI가 국가유산을 다루는 시대에 필요한 문화정책은 단순한 디지털화가 아니다. 고해상도 이미지, 3D 모델, 음성 기록, 문헌 데이터는 훼손 위험이 있는 유산을 기록하고 교육 접근성을 넓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데이터가 많아진다고 누수, 균열, 지반 침하, 목재 부식, 장인 고령화, 지역 공동체 해체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화유산 보존의 출발점은 여전히 현장 조사, 수리 재료, 전문 인력, 지역 참여, 장기 예산이다.
AI 대전환기 문화가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조건은 정확한 맥락이다. 생성형 AI는 유산 이미지를 빠르게 복제하고 변형할 수 있지만, 장소가 품은 역사적 갈등과 공동체의 기억을 자동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학습데이터 안에 출처, 시대, 소유·관리 주체, 전승 공동체, 훼손 상태, 수리 이력, 해설 논쟁이 함께 들어가지 않으면 국가유산 AI는 보기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에 머물 수 있다. 잘못 학습된 문양, 시대가 뒤섞인 복식, 존재하지 않는 건축 양식이 대량 유통될 위험도 커진다.
WMF 명단이 한국에 남기는 가장 큰 시사점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유산’과 ‘정책적으로 먼저 구해야 할 유산’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알고리즘은 조회 수가 높은 궁궐과 유명 사찰, 인기 축제 이미지를 반복 추천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물리적으로 위험한 근현대 건축, 사라지는 생활권, 전승자가 줄어드는 무형유산, 기후 변화에 취약한 자연유산은 검색량이 낮다는 이유로 더 멀어질 수 있다. AI 기반 문화정책은 인기의 순위가 아니라 손실 위험의 순위를 함께 계산해야 한다.
한국문화유산의 다음 단계는 ‘디지털 기록 이후의 현장 보존’에 달려 있다. 국가유산 AI는 보존 우선순위를 찾는 도구, 수리 이력을 비교하는 도구, 기후 위험을 예측하는 도구, 시민에게 정확한 해설을 제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다만 AI가 문화유산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현장을 지키는 사람, 전통 기술을 잇는 사람, 해설을 검증하는 연구자, 생활권을 유지하는 주민이 빠진 디지털 전환은 문화의 속도를 높일 뿐 문화의 신뢰를 보장하지 못한다.
미국의 ‘대체 불가’ 목록은 보존 실패가 단순한 건물 손실이 아니라 기억의 기반을 잃는 일임을 분명히 한다. 루스벨트섬의 천연두병원 폐허는 공중보건의 역사를, 아프리칸 미팅 하우스는 흑인 시민사회의 형성을, 달라스시청은 현대 민주주의의 공공건축을, 블랙마운틴 칼리지는 예술교육의 실험을, 왓츠 타워스는 이민자 노동과 지역 공동체의 자부심을 품고 있다. 3D 모델과 생성 이미지는 사라진 외형을 어느 정도 되살릴 수 있지만, 장소를 둘러싼 생활과 기억, 갈등과 전승의 시간까지 되돌리지는 못한다.
국가유산 체계 전환 이후 한국의 평가는 데이터 규모가 아니라 손실 위험을 얼마나 빨리 발견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보존 우선순위를 정하며, AI 기술을 현장 보존과 정확한 해설로 연결했는지에 달려 있다. 문화유산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미래 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기억의 기반이다. AI 대전환의 시대에 문화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