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Gaby and the Beanstalk’④] 플루와 시스루, 몸의 움직임을 따라간 샤넬 드레스
실크 무슬린과 투명한 레이어, 쿠튀르를 일상적 움직임에 가깝게 만든 실루엣
[KtN 신미희기자]샤넬 2026/27 가을·겨울 오트쿠튀르(haute couture·고급 맞춤복)는 수트의 재단에서 출발했지만, 중반 이후 컬렉션의 무게는 얇은 드레스와 투명한 레이어로 옮겨갔다. 마티유 블라지(Matthieu Blazy)는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의 서가에서 출발한 동화적 모티프를 화려한 드레스의 환상으로만 밀어붙이지 않았다. 실크 무슬린(silk mousseline), 시스루(see-through), 레이어링(layering), 플루(flou)의 흐름은 몸이 걷고 방향을 바꾸고 앉는 순간까지 염두에 둔 오트쿠튀르의 다른 얼굴을 만들었다.
붉은 시스루 드레스는 컬렉션 중반부의 속도를 단번에 바꿨다. 샤넬 수트와 트위드, 꽃과 깃털 장식이 앞선 흐름을 만들었다면, 붉은 드레스는 몸의 선과 움직임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얇은 소재는 피부를 완전히 가리지도, 노출만을 앞세우지도 않았다. 투명한 층이 겹치며 색의 깊이를 만들고, 걸음에 따라 드레스의 가장자리가 흔들리면서 정지된 실루엣보다 움직이는 형태가 먼저 읽혔다.
플루는 이번 컬렉션을 읽는 중요한 단어다. 플루(flou)는 오트쿠튀르에서 흐르는 드레스와 부드러운 실루엣을 다루는 공방 영역을 가리킨다. 타이외르(tailleur)가 재킷과 수트의 골격을 세운다면, 플루는 얇은 소재와 드레이프(drape), 몸을 따라 흐르는 선을 다룬다. 블라지는 두 영역을 분리하지 않았다. 초반 수트 안쪽의 실크 무슬린, 스커트 아래의 투명한 층, 중반 이후의 시스루 드레스는 재단의 구조와 흐르는 소재가 함께 움직이도록 배치됐다.
부드러운 색의 드레스는 수트 중심의 초반 흐름을 완만하게 풀어냈다. 파스텔 톤은 동화적 분위기를 직접 설명하기보다 소재의 가벼움을 더 잘 드러내는 배경이 됐다. 얇은 층이 겹치면서 드레스는 한 벌의 덩어리처럼 보이지 않았고, 몸의 움직임을 따라 여러 겹의 선이 조금씩 어긋났다. 샤넬 오트쿠튀르의 전통적 정교함은 단단한 재킷뿐 아니라, 가벼운 소재를 흐트러지지 않게 통제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시스루는 이번 컬렉션에서 단순한 노출 코드가 아니었다. 투명한 소재는 몸을 드러내는 동시에 가리는 장치로 쓰였고, 색과 자수, 레이어가 겹치면서 한 겹의 옷 안에 여러 표면을 만들었다. 블라지의 시스루는 자극보다 거리 조절에 가까웠다. 가까이에서는 피부와 안감, 장식의 층이 보이고, 멀리서는 하나의 흐르는 실루엣으로 정리됐다. 샤넬의 드레스는 몸을 고정된 이미지로 세우기보다, 움직임 속에서 계속 달라지는 형태로 남았다.
얇은 드레스 위에 더해진 장식은 투명한 소재의 불안정함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자수와 비즈, 플로럴 모티프는 드레스의 표면을 장식하면서도 몸의 선이 지나가는 지점을 조절했다. 비치는 소재가 전부 드러내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식은 시선을 분산시키고, 레이어는 몸과 옷 사이에 완충을 만들었다. 블라지는 시스루를 과감한 스타일링의 표식이 아니라 오트쿠튀르의 구조적 실험으로 다뤘다.
장식이 많은 드레스에서도 플루의 흐름은 유지됐다. 꽃과 비즈, 얇은 소재가 겹치면 옷이 무거워지기 쉽지만, 이번 컬렉션의 드레스는 장식을 몸 주변에 띄우는 방식에 가까웠다. 선명한 자수나 반짝이는 표면이 있어도 스커트의 흐름은 막히지 않았다. 컬렉션 초반의 수트가 “입고 움직이는 샤넬”을 재단으로 설명했다면, 중반 이후의 드레스는 같은 생각을 가벼운 층과 흐르는 선으로 이어갔다.
연한 색조의 시스루 드레스는 붉은 드레스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만들었다. 강한 색이 컬렉션의 리듬을 바꿨다면, 부드러운 색은 투명한 소재의 층을 더 섬세하게 드러냈다. 얇은 레이어가 몸 주변에 흐르면서 드레스는 단순한 이브닝웨어보다 움직임을 위한 구조에 가까워졌다. 브라이덜이나 레드카펫의 완결된 이미지를 향하기보다, 걷는 과정에서 완성되는 옷으로 읽혔다.
블라지가 다룬 드레스는 동화 속 공주의 의상과 거리를 뒀다. 콩나무와 꽃의 세계에서 출발했지만, 드레스는 무대 장식의 연장선에 머물지 않았다. 얇은 소재, 투명한 층, 드레이프, 슬릿은 입는 사람의 몸을 중심에 놓았다. 환상은 몸을 감추는 장막이 아니라, 몸이 움직일 때 달라지는 표면으로 바뀌었다. 샤넬 오트쿠튀르는 동화적 서사를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이미지로 만들지 않고, 실제 착용자의 걸음과 자세 안으로 끌어왔다.
누드 톤의 레이어는 이번 컬렉션의 현실성을 더 분명하게 만들었다. 피부색에 가까운 소재는 드레스를 몸에서 분리된 조형물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다. 체인과 가장자리 장식은 샤넬의 익숙한 기호를 유지하면서도, 얇은 드레스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다. 금속성 장식과 투명한 소재가 함께 놓이면서, 샤넬의 장식 언어는 수트의 바깥에서 드레스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시스루와 플루의 결합은 다음 시즌 패션 흐름으로도 읽을 수 있다. 투명한 소재, 드러나는 안쪽 레이어, 풀어 입은 실루엣, 부드러운 파스텔은 하이패션에서 이미 확장되고 있는 코드다. 샤넬은 해당 흐름을 노출의 강도로만 다루지 않았다. 얇은 소재가 몸 위에서 어떻게 놓이고, 어떤 장식이 시선을 잡으며, 어느 지점에서 재단이 실루엣을 붙잡는지가 더 중요했다. 블라지의 드레스는 유행의 표면보다 옷의 작동 방식을 먼저 물었다.
후반부의 드레스들은 장식과 절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다. 앞선 수트와 장식 표면이 샤넬의 유산과 공방 기술을 보여줬다면, 흐르는 드레스는 블라지가 생각하는 현대적 쿠튀르의 쓰임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옷은 보기 위한 대상이면서 동시에 입기 위한 구조였다. 몸을 압박하지 않는 선, 걷는 순간 달라지는 밑단, 얇은 소재를 잡아주는 장식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드레이프가 강조된 드레스는 플루의 언어를 가장 차분하게 정리했다. 소재는 몸을 따라 내려오고, 선은 강하게 고정되지 않은 채 걸음에 따라 달라졌다. 샤넬이 오트쿠튀르에서 다룬 환상은 거대한 무대 효과보다 얇은 천이 몸 위에서 바뀌는 순간에 가까웠다. 블라지는 쿠튀르의 기술을 옷을 더 단단하게 세우는 데만 쓰지 않고, 더 가볍게 움직이게 하는 데 썼다.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 드레스는 동화적 환상을 현실의 몸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실크 무슬린과 시스루, 레이어링과 플루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작동했다. 옷은 가볍게 겹쳐졌고, 장식은 몸의 흐름을 막지 않았으며, 투명한 소재는 노출보다 구조를 만들었다. ‘Gaby and the Beanstalk’로 읽히는 이번 쇼에서 드레스는 공주 서사의 결말이 아니라, 샤넬 오트쿠튀르가 일상적 움직임을 품는 방식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