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enciaga But Bigger②]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 발렌시아가에 색을 입힌 재단

발렌티노서 다듬은 고채도 색채, 크리스토발의 코쿤·자루형 드레스와 결합…가슴과 허리 대신 어깨·등·밑단으로 옮긴 부피

2026-07-13     박인경 기자
Balenciaga But Bigger: Pierpaolo Piccioli's Fall 2026 Couture Debut. 사진=Vogue Runway,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인경기자]라임색 재킷은 엉덩이를 덮은 뒤 곧게 떨어졌다. 무릎 아래에서는 짙은 바이올렛 깃털이 바닥까지 이어졌다. 위쪽은 매끄럽고 단단했으며 아래쪽은 걸음마다 흔들렸다. 두 색이 갈리는 선을 따라 재킷 길이와 하의의 부피도 또렷하게 나뉘었다.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Pierpaolo Piccioli)가 발렌시아가에 가져온 색은 옷 위에 덧붙인 장식이 아니었다. 재단과 소재가 바뀌는 자리를 색으로 구분하고, 커다란 옷의 구조를 한눈에 읽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1999년 발렌티노에 합류한 피치올리는 액세서리 부문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Maria Grazia Chiuri)와 함께 2008년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고, 2016년부터 단독으로 컬렉션을 총괄했다. 2024년 발렌티노를 떠날 때까지 25년 동안 기성복과 오트 쿠튀르를 다뤘다. 긴 드레스와 선명한 색, 아틀리에의 손작업은 발렌티노 시절부터 이어진 피치올리 디자인의 중심이었다.

발렌시아가는 2025년 5월 피치올리를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했다. 임기는 같은 해 7월 10일 시작됐다. 발렌시아가는 선임 발표에서 피치올리의 오트 쿠튀르 경험과 장인 기술에 대한 이해를 강조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óbal Balenciaga)의 유산을 잇는 동시에 뎀나(Demna)가 10년 동안 구축한 성과를 이어간다는 방향도 함께 제시했다. 전임자의 발렌시아가를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인사가 아니라 여러 시대의 디자인을 연결하는 선택이었다.

2025년 10월 공개한 첫 기성복 컬렉션은 크리스토발이 1957년 선보인 자루형 드레스인 색 드레스(Sack Dress)에서 출발했다. 허리를 조이지 않고 몸통을 곧게 떨어뜨려 옷 안에 빈 공간을 남긴 디자인이다. 피치올리는 몸과 원단 사이에 공기가 머물 수 있어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검은 브이넥 드레스와 코쿤 코트, 풍선처럼 부푼 스커트가 첫 기성복에 등장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발렌시아가의 55번째 오트 쿠튀르는 첫 기성복에서 시작한 작업을 더 큰 규모로 펼쳤다. 허리선을 강조하는 대신 어깨와 소매, 등과 밑단을 넓혔다. 몸을 드레스 안에 가두지 않고 옷의 중심에 세운 뒤 주변에 여유를 남겼다. 큰 실루엣은 신체를 압도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신체가 움직일 자리를 확보하는 재단에서 나왔다.

Balenciaga But Bigger: Pierpaolo Piccioli's Fall 2026 Couture Debut. 사진=Vogue Runway,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바이올렛 드레스는 상체를 비교적 간결하게 정리한 뒤 허리 아래에서 폭을 크게 넓혔다. 둥근 밑단은 바닥을 따라 이어졌지만 한 가지 모양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모델이 발을 내디디면 앞쪽 원단이 열렸고, 바람이 들어오면 치맛자락이 부풀었다. 몸에 붙는 부분을 줄인 대신 옷과 사람 사이에 공기가 드나들 공간을 만들었다.

크리스토발이 남긴 코쿤과 케이프, 자루형 드레스도 몸의 굴곡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곡선이나 목 아래에서 밑단까지 떨어지는 외곽이 먼저 자리 잡았고, 신체는 완성된 옷 안에서 움직였다. 피치올리는 창립자의 옷을 겉모양대로 복원하지 않았다. 허리에서 멀어진 원단, 앞보다 옆과 뒤에서 커지는 부피, 걸을 때 달라지는 밑단을 받아들였다.

피치올리의 색채도 발렌티노 시절과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발렌티노에서는 분홍과 빨강, 바이올렛이 몸을 따라 흐르는 드레스와 자주 만났다. 발렌시아가에서는 같은 고채도 색이 넓은 재킷과 케이프, 몸에서 떨어진 스커트에 들어갔다. 피치올리가 익숙하게 다뤄온 색을 크리스토발의 재단 안에 넣으면서 색이 차지하는 면적과 기능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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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착장은 재킷과 바지를 한 가지 색으로 묶었다. 반짝이는 표면이 재킷의 각진 어깨와 바지의 넓은 폭을 동시에 드러냈다. 검정으로 만들었다면 하나의 긴 외곽으로 읽혔을 옷이 노란색을 만나면서 라펠과 소매, 허리와 바짓단으로 나뉘었다. 선명한 색이 재단선을 가리는 대신 작은 굴곡까지 밖으로 꺼냈다.

55번째 쿠튀르에서는 검정 옷을 색채가 강한 착장 사이에 배치했다. 일부 디자인은 색과 표면을 달리한 뒤 같은 형태의 검정 버전으로 다시 제작됐다. 밝은 색과 질감을 먼저 본 관객은 뒤이어 나온 검정 옷에서 어깨와 등, 밑단의 외곽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검정은 피치올리의 색을 억누르는 배경이 아니라 색이 드러낸 구조를 정리하는 기준으로 쓰였다.

라임 재킷과 바이올렛 깃털 하의에서도 색은 형태를 나눴다. 라임색은 어깨부터 허리까지 이어지는 매끈한 면을 강조했다. 바이올렛은 깃털의 불규칙한 끝과 흔들리는 폭을 드러냈다. 색의 대비와 소재의 대비가 같은 자리에서 겹치면서 상의의 단단함과 하의의 움직임이 더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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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석색 드레스는 어깨와 허리, 무릎 아래의 폭을 차례로 달리했다. 몸통은 비교적 좁게 잡았지만 양옆의 형태와 밑단은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한 가지 색을 옷 전체에 사용해 장식보다 윤곽에 시선이 머물도록 했다. 드레스의 중심은 색 자체보다 색이 따라가는 곡선과 굴곡에 있었다.

타이외르(tailleur)와 플루(flou)의 결합도 피치올리의 경력을 발렌시아가의 제작 방식으로 옮긴 대목이다. 타이외르는 재킷과 코트, 바지의 형태를 정확한 패턴과 재단으로 세우는 작업이다. 플루는 원단을 몸 위에서 잡고 주름과 드레이프를 만들며 드레스의 흐름을 완성하는 작업이다. 피치올리는 두 방식을 재킷과 드레스로 나눠 놓지 않았다. 단단한 상의 아래에 흔들리는 하의를 붙이고, 재단이 분명한 몸통에서 유연한 치맛자락이 이어지도록 했다. 발렌시아가는 55번째 쿠튀르에서 테일러링과 플루를 하나의 옷 안에 결합했다고 설명했다.

발렌티노에서 피치올리의 플루는 긴 이브닝드레스와 망토, 얇은 원단의 흐름을 만드는 데 강점을 보였다. 발렌시아가에서는 플루만으로 옷을 완성하지 않았다. 넓은 칼라와 각진 어깨, 정확하게 잘린 상의가 먼저 형태를 잡고, 그 아래에서 깃털과 드레이프가 움직였다. 부드러운 드레스를 만드는 기술이 구조적인 재킷 안으로 들어가면서 피치올리의 옷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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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건디색 상의와 분홍색 하의는 가까운 계열의 색을 사용했지만 형태는 뚜렷하게 갈렸다. 상의는 허리에서 여민 뒤 소매와 어깨에 부피를 남겼고, 하의는 골반 아래에서 폭을 넓혔다. 진한 버건디가 상체의 무게를 잡고 밝은 분홍이 하체의 넓은 면을 드러냈다. 보색처럼 강한 충돌을 택하지 않고 명도 차이만으로 위아래의 비례를 나눈 구성이다.

피치올리는 색을 한 벌의 분위기로만 쓰지 않았다. 코발트 블루는 깃털의 길이를 강조했고, 라임은 재킷의 넓은 면을 드러냈다. 바이올렛은 둥근 드레스의 깊이를 만들었으며, 터키석은 몸통과 밑단의 굴곡을 이어 붙였다. 버건디와 분홍은 상하의의 무게를 달리했다. 색마다 맡은 역할이 달랐고, 같은 색도 소재와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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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스트랩리스 드레스는 색과 재단만 남긴 착장에 가까웠다. 가슴선은 수평에 가깝게 정리했고, 허리 아래에서 스커트 폭을 넓혔다. 자수와 깃털, 강한 배색을 덜어내자 초록색 면과 밑단의 곡선이 직접 맞닿았다. 피치올리의 색채가 화려한 장식에 기대지 않아도 성립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옷이었다.

발렌시아가가 공개한 제작 설명에는 3차원 인체 스캔과 갑각형 가죽 내부 구조인 카라페이스(carapace), 네오 가자(Neo-Gazar)가 포함됐다. 몸의 자세와 움직임을 반영한 내부 구조를 만든 뒤 원단을 재단하고 드레이프해 큰 부피와 가벼운 착용감을 함께 확보했다. 겉에서 보이는 색과 곡선은 안쪽에서 먼저 계산된 구조 위에 놓였다.

피치올리가 발렌시아가에서 바꾼 것은 색상표만이 아니다. 발렌티노에서 다듬은 고채도 색을 크리스토발의 코쿤과 케이프, 자루형 드레스 안으로 옮겼고, 뎀나가 키운 어깨와 소매의 폭도 그대로 남겼다. 라임과 바이올렛, 분홍과 버건디는 서로 다른 시대의 옷을 연결하는 동시에 재킷과 드레스의 구조를 나누는 역할을 맡았다.

피치올리의 첫 발렌시아가 쿠튀르는 색이 많아진 컬렉션이라는 설명만으로 부족하다. 옷의 폭을 어디에서 넓힐지, 몸과 원단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공간을 남길지, 단단한 재킷과 유연한 드레스를 어느 선에서 붙일지를 색으로 구분했다. 검정 위에 색을 얹은 것이 아니라 색이 들어갈 자리를 재단으로 먼저 만들었다.

향후 여성 기성복에서는 넓어진 어깨와 둥근 밑단이 재킷과 코트에 어느 정도 남는지, 쿠튀르의 고채도 배색이 가방과 신발까지 이어지는지가 확인될 전망이다. 피치올리가 발렌시아가에서 내놓은 색은 한 시즌의 강한 인상에 머물지 않았다. 옷의 크기와 몸의 움직임을 함께 정하는 새로운 재단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