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 사진축제 2026②] 할렘에서 아그라까지, 관계가 만든 사진
마르틴 바라의 공동체 기록, 샬럿 용가의 공동 연출, 아만 알람의 가족 돌봄…촬영 전 쌓인 시간이 바꾼 인물사진
[KtN 김성은기자]검은 가죽옷을 입은 여성이 흰색 자동차 옆에 몸을 기댄다. 차창 위로 왼팔을 올리고 사이드미러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한쪽 발은 보도에 단단히 붙어 있고, 뒤로 뻗은 다리와 허리를 숙인 자세가 사진 전체에 비스듬한 선을 만든다. 마르틴 바라(Martine Barrat)의 1996년 할렘 사진은 리듬 클럽에 가기 전 화장을 확인하는 짧은 순간을 붙잡았다. 클럽 안의 공연이나 거리의 소란보다 외출을 준비하는 한 사람의 몸짓이 먼저 들어온다.
검은 재킷과 스커트, 스타킹과 구두는 자동차의 밝은 차체와 강한 대비를 이룬다. 차에 남은 긁힌 자국과 보도의 얼룩도 지워지지 않았다. 여성은 촬영자를 위해 자세를 고쳐 잡기보다 거울 속 얼굴에 집중한다. 카메라는 인물의 생활 안으로 들어갔지만 행동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사진에 남은 것은 할렘을 설명하는 대표 풍경이 아니라 밤 외출을 앞둔 주민의 준비와 취향, 스스로 다듬은 모습이다.
마르틴 바라는 뉴욕 할렘과 사우스브롱크스, 복싱 체육관과 거리 공동체를 수십 년 동안 오가며 촬영했다. 1968년 뉴욕으로 건너온 뒤 카메라를 들고 지역 주민과 생활을 나눴고, 1970년대에는 사우스브롱크스의 거리 조직 로만 킹스(Roman Kings)와 로만 퀸스(Roman Queens)를 영상으로 기록했다. 촬영한 사진을 당사자에게 건네는 일도 이어갔다. 주민을 잠시 찾아가 관찰하는 외부인의 위치와 다른 관계가 사진보다 먼저 형성됐다.
아를 국제사진축제는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에 마련한 ‘Soul of the City’에서 반세기를 넘긴 작업을 펼쳤다. 할렘과 브롱크스의 거리, 주민과 음악가, 어린 복서들이 한 작가의 연대기 안에 들어왔다. 도심 주변부를 빈곤이나 위험의 상징으로 압축하기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옷차림과 몸짓, 기다림과 만남을 기록한 사진들이다. 전시는 7월 6일부터 10월 4일까지 열린다.
‘리듬 클럽에 가기 전’의 여성도 도시의 수동적인 피사체로 머물지 않는다. 거울에 얼굴을 비추고 화장을 다듬는 행위에는 밤거리로 나가기 전 자신의 모습을 결정하는 시간이 담겼다. 촬영자는 인물의 행동을 지시하거나 정면 얼굴을 요구하지 않았다. 자동차와 몸이 만든 좁은 공간, 순간적으로 굽혀진 자세를 따라 생활의 속도에 접근했다.
마르틴 바라의 사진에서 친밀성은 얼굴을 크게 촬영하거나 사생활을 공개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이 쌓였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촬영자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카메라 때문에 생활이 공연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Soul of the City’가 담은 도시의 중심에는 건축물이나 유명 장소보다 사람 사이에 축적된 시간이 놓였다.
샬럿 용가(Charlotte Yonga)의 ‘Gabrillà, Antananarivo, Madagascar’(2024)는 거리에서 포착한 순간과 다른 방식으로 인물에게 다가간다. 붉은빛이 도는 두꺼운 직물이 인물의 몸을 넓게 감싸고, 회색과 푸른색이 섞인 천은 머리에서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다. 인물은 나무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뒤편 건물과 기울어진 나무줄기는 배경에 남지만 시선은 중앙의 얼굴과 겹쳐진 직물에 모인다.
붉은 직물은 흙과 마른 솔잎의 갈색을 이어받고, 머리를 감싼 천의 차가운 색은 주변의 녹색과 구분된다. 옷의 세부를 또렷하게 보여 주기보다 여러 겹의 천이 만든 부피가 앉은 자세를 감싼다. 한 손은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려왔고 다른 팔은 몸 안쪽에 놓였다. 정면을 향한 얼굴과 느슨하게 감긴 직물이 단단함과 편안함을 한 인물 안에 함께 남긴다.
프랑스계 카메룬 작가 샬럿 용가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진행한 ‘(Tsy) Possible’을 통해 사랑과 친밀성, 소속감을 다뤘다. 작품은 가족사진과 지역의 대중적 이야기를 참고해 촬영 대상과 함께 연출했다. 마다가스카르의 생활 방식과 노출에 관한 규범을 고려하면서도 사적인 관계가 사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구성을 찾았다. 제목의 ‘tsy’는 마다가스카르어로 부정을 뜻하며, 프랑스어 ‘possible’과 결합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관계와 상상을 다시 열어 놓는다.
공동 연출은 촬영자가 구도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Gabrillà’의 장소와 의복, 자세, 시선은 세심하게 정리돼 있다. 다만 인물은 사진가가 발견한 낯선 대상이 아니라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한다. 어떤 옷을 입고 어디에 앉으며 어느 정도의 신체를 드러낼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피사체의 선택이 작동한다.
정면을 향한 시선도 일방적으로 관찰당하는 관계를 흔든다. 관람자는 인물의 옷차림과 환경을 살피지만 인물 역시 카메라를 통해 관람자를 응시한다. 사진가만 바라보는 주체로 남지 않고 촬영 대상도 자신의 모습을 내보이는 방식을 결정한다. 마르틴 바라가 장기간의 생활 속에서 카메라가 받아들여지는 시간을 쌓았다면 샬럿 용가는 촬영 과정 자체를 협의와 공동 구성의 영역으로 옮긴다.
‘(Tsy) Possible’은 루이 로드레르 재단 디스커버리 어워드(Discovery Award Louis Roederer Foundation) 전시에 선정돼 에스파스 모노프리(Espace Monoprix)에서 소개된다. 대형 회고전과 거장 중심의 프로그램 사이에 신진 작가의 장기 프로젝트를 배치한 올해 아를의 전시 구조도 함께 드러난다. 친밀한 관계는 개인적 소재에 머물지 않고 누가 타인을 촬영하며, 피사체가 이미지 제작에 어느 정도 참여하는지를 다루는 문제로 넓어진다.
아만 알람(Aman Alam)의 ‘Mother and Pigeon’에서는 사람의 얼굴이 사라진다. 검은 비둘기 한 마리가 밝은 바닥 위에 몸을 낮췄다. 머리와 부리 주변은 흐리고, 날개와 등은 짙은 검은 덩어리로 이어진다. 새 아래쪽에는 흙이나 작은 파편이 흩어져 있다. 망점과 거친 입자가 몸의 윤곽을 풀어 놓으면서 살아 있는 새와 바닥에 드리운 검은 흔적의 경계가 겹친다.
사진 제목은 어머니와 비둘기를 함께 부르지만 작품에는 한 마리의 새만 뚜렷하게 남았다. 인물사진에서 기대되는 얼굴과 표정, 가족의 자세가 빠져 있다. 사람의 부재를 설명하는 문장도 사진 안에는 없다. 관람자는 낮게 웅크린 새와 흩어진 흔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가족의 시간을 짐작하게 된다.
‘Mother and Pigeon’은 아만 알람이 가족의 기억과 상실을 기록해 온 ‘Ozymandias’ 연작에 속한다. 대학 재학 시절 할머니 나심(Naseem)에게서 치매의 초기 증상이 나타났고, 몇 년 뒤 29세가 된 아만 알람은 고향 아그라로 돌아가 돌봄에 참여했다. ‘Ozymandias’는 알츠하이머 진단 뒤 말로 꺼내지 못한 슬픔을 견디기 위해 시작한 장기 작업으로 소개됐다.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을 기록할 때 카메라는 쉽게 얼굴과 신체의 쇠약을 향한다. 아만 알람은 질병의 진행을 직접 보여 주는 방식만 택하지 않았다. 가족이 생활하던 집과 주변의 동물, 남겨진 물건, 흐릿한 흔적을 함께 촬영했다. 한 사람의 병력이 사진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돌봄이 이어지는 환경과 가족이 감당하는 시간을 연작 안에 넣었다.
‘Mother and Pigeon’의 거친 흑백은 가족의 슬픔을 극적인 표정으로 대신하지 않는다. 비둘기의 몸은 중심에 있지만 정확한 상태는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다. 부리 주변의 흐림과 바닥에 흩어진 물질은 생명과 소멸을 곧바로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 연작의 배경을 알게 된 뒤에도 새가 특정 인물을 상징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사진은 해답보다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Ozymandias’라는 제목은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가 거대한 권력도 시간 앞에서 무너진다는 내용을 담아 발표한 동명의 시와 연결된다. 아만 알람의 연작에서는 제국의 몰락 대신 개인의 기억과 가족의 역사가 시간 속에서 달라지는 과정이 놓인다. 다만 작품은 시의 내용을 사진으로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기억을 붙잡으려는 촬영과 계속 진행되는 상실 사이의 긴장이 제목을 통해 더해진다.
아만 알람은 2025년 세렌디피티×아를 그랜트(Serendipity × Arles Grant) 수상자로 선정됐고, ‘Ozymandias’는 메종 데 팽트르(Maison des Peintres)에서 10월 4일까지 전시된다. 가족 내부에서 시작된 작업이 국제 사진축제의 전시로 옮겨졌지만 연작은 완료된 과거형으로 닫히지 않았다. 2020년부터 이어진 촬영은 돌봄과 기억의 변화에 따라 계속되고 있다.
마르틴 바라와 샬럿 용가, 아만 알람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만 같은 위치에서 촬영하지 않는다. 마르틴 바라는 할렘과 브롱크스의 생활 속에 장기간 머물며 주민의 행동이 계속되는 순간을 기록했다. 샬럿 용가는 촬영 대상과 장소와 자세를 함께 구성했다. 아만 알람은 가족의 질병을 얼굴에 집중시키지 않고 사람 주변에 남은 동물과 사물, 빈자리를 향했다.
세 작업에서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는 렌즈의 초점거리로 결정되지 않는다. 함께 보낸 시간, 촬영에 대한 동의와 참여, 공개할 수 있는 범위가 거리를 만든다. 가까이 촬영했다는 사실보다 관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사진으로 바뀌었는지가 중요하다.
에스파스 반 고흐의 ‘Soul of the City’, 에스파스 모노프리의 ‘(Tsy) Possible’, 메종 데 팽트르의 ‘Ozymandias’는 10월 4일까지 이어진다. 할렘의 밤 외출을 준비하는 몸짓, 마다가스카르에서 공동으로 구성한 초상, 아그라의 가족 주변에 남은 비둘기는 서로 다른 지역과 세대를 잇는다. 촬영 전부터 존재했던 관계와 촬영 뒤에도 계속되는 삶이 사진 한 장의 바깥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