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미로·고미스①] 미로의 형상, 종이·조각·디지털 설치로 확장
고미스의 사진이 연결한 가우디와 미로…검은 선과 원색, 조립된 조각에 3D 스캔·생성형 AI 결합
[KtN 임민정기자]검은 덩어리 위로 붉은 곡선이 내려가고, 삼각형에 가까운 머리에는 노란 눈이 자리한다. 아래쪽의 작은 형상은 파랑과 초록, 빨강으로 나뉜 몸체를 갖췄다. 두 형상 주변에는 둥근 색점과 가느다란 선이 흩어져 있다. 호안 미로(Joan Miró)의 그래픽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의 몸은 액자 아래쪽에 닿고, 작품을 채운 검은 형상은 사람보다 크게 다가온다.
같은 전시의 안쪽에는 기다란 흰 전시대가 놓였다. 유리 구조물 안에 세운 미로의 조각들은 구멍이 뚫린 머리와 가느다란 목, 층층이 쌓인 몸체를 갖췄다. 전시대 끝에서는 조각의 표면과 윤곽을 디지털 방식으로 재구성한 작업이 이어진다. 종이에 남은 선과 색, 입체로 굳어진 부피와 접합, 움직임을 얻은 디지털 형상이 하나의 관람 동선에 들어왔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사 바트요에서 2026년 7월 8일 개막한 ‘가우디-미로-고미스: 디컨스트럭티드(Gaudí-Miró-Gomis: Deconstructed)’는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의 건축과 미로의 조각·그래픽 작품, 호아킴 고미스(Joaquim Gomis)의 사진을 함께 다룬다. 카사 바트요 컨템퍼러리와 호안 미로 재단이 공동 기획하고 조아나 세구로(Joana Seguro)와 에스테르 라모스(Ester Ramos)가 큐레이션을 맡았다. 런던의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투모로 뷰로(Tomorrow Bureau)는 포토그래메트리와 애니메이션, 3D 스캔, 생성형 인공지능을 이용한 디지털 설치를 제작했다.
전시의 출발점은 새 기술이 아니다. 가우디와 미로가 자연의 형태와 재료, 제작 방식을 다뤘던 태도, 고미스가 두 창작자의 작업을 사진으로 연결했던 기록이 먼저 놓인다. 디지털 기술은 세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마지막 층으로 들어왔다. 원작과 사진 아카이브를 밀어낸 대체물이 아니라 이미 축적된 해석을 다시 나누고 조립하는 제작 수단이다.
검은 윤곽과 원색, 형상을 묶는 미로의 문법
미로의 그래픽 작품에는 검은 선이 넓고 거칠게 지나간다. 빨강과 파랑, 초록과 노랑은 선 안쪽을 빈틈없이 채우기보다 서로 다른 크기의 조각으로 흩어진다. 둥근 덩어리와 뾰족한 삼각형, 짧게 끊긴 직선과 말려 올라간 곡선이 한 작품에서 부딪힌다.
세부에는 붉은 원형과 검은 삼각형이 겹쳐 있고, 옆에는 초록과 파랑으로 나뉜 형태가 길게 누워 있다. 안쪽에 점을 넣은 원과 오른쪽으로 말린 선은 눈과 더듬이, 식물의 줄기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구체적인 대상을 완전히 지우지 않으면서도 한 가지 이름으로 고정하기 어려운 형상이다.
색면의 가장자리는 기계적으로 반듯하지 않다. 검은 선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고, 색은 종이에 스며들며 미세한 얼룩과 농도 차이를 남긴다. 빨강과 검정이 겹친 부분은 짙은 갈색에 가까워지고, 파랑과 초록의 표면에는 종이의 입자가 드러난다. 형태를 단순화했지만 제작 과정에서 생긴 번짐과 긁힘까지 제거하지 않았다.
큰 작품에서 검은 형상은 전체 구도를 장악한다. 아래쪽의 붉은 줄무늬와 삼각형 머리, 노란 눈은 강한 방향성을 만들고, 작은 형상은 여러 색의 조각으로 분리된다. 크기 차이는 두 대상을 위아래의 위계로 나누지만, 검은 윤곽과 원색의 반복은 서로 다른 몸체를 한 구도 안에 묶는다.
작은 그래픽 작품에서는 관계가 달라진다. 액자 안쪽의 넓은 여백 가운데 색과 선이 압축돼 있고, 여러 형상이 하나의 매듭처럼 중앙에 모인다. 작품의 실제 크기와 종이의 빈 부분이 조형 요소로 남기 때문에 색채만 확대했을 때와는 다른 밀도를 만든다.
가우디와 미로의 연결도 형태가 닮았다는 단순 비교에 머물지 않는다. 자연에서 출발한 곡선, 재료의 성질을 감추지 않는 제작, 건축·공예·조각 사이의 경계를 좁힌 태도가 두 사람의 작업을 잇는다. 전시는 자연과 물질, 예술적 실험이라는 공통 주제를 중심으로 세 창작자의 관계를 구성했다.
미로의 작품은 가우디 건축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검은 선과 원색, 별과 눈, 새와 인물을 연상시키는 기호는 미로가 오래 사용한 조형 언어다. 가우디의 영향은 특정 건축 형태를 복제한 결과보다 자연물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제작 방식, 평면과 입체를 자유롭게 오가는 태도에서 더 가깝게 읽힌다.
색면이 사라진 자리, 부피와 구멍의 조각
어두운 전시실로 들어가면 빨강과 파랑의 색면보다 조각의 윤곽이 먼저 들어온다. 둥근 덩어리 위에 작은 형태를 쌓거나 가느다란 기둥 위에 얼굴을 얹은 조각들이 흰 전시대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였다. 머리와 몸통의 구분은 느슨하고, 뚫린 구멍과 돌출된 부분이 표정을 대신한다.
한 조각은 넓적한 머리 아래로 길고 가는 몸체가 내려오고, 다른 조각은 크기가 다른 두 덩어리를 수직으로 쌓았다. 가운데 놓인 조각에는 원형과 반원형이 반복되며 앞뒤로 빈 공간이 생긴다. 형태를 채운 재료만큼 비어 있는 구멍이 전체 윤곽을 결정한다.
평면 작품에서 검은 선이 색면의 경계를 나눴다면 조각에서는 굴곡과 접합부가 몸체를 나눈다. 종이 위의 원과 삼각형은 부피를 가진 덩어리와 돌출부로 바뀌고, 말려 올라간 선은 가느다란 금속 형태나 뿔처럼 솟은 부분으로 이어진다. 평면과 입체가 같은 모양을 반복하는 방식보다 선과 덩어리를 조직하는 감각이 매체에 맞게 달라진다.
조각들은 정면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옆으로 이동하면 앞에서 하나로 겹쳤던 덩어리가 분리되고, 머리에 뚫린 구멍 너머로 뒤쪽 조각이 들어온다. 길게 배열된 전시대와 투명한 유리 구조물은 한 작품의 윤곽 안에 다른 작품의 일부가 겹치도록 만든다.
조명도 조각의 표면을 고르게 밝히지 않는다. 돌출된 부분에는 강한 빛이 닿고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는 짙은 그림자가 남는다. 같은 재료에서도 매끈한 부분과 거친 부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갈린다. 그래픽 작품의 원색을 대신해 빛과 그림자가 조각의 표면을 여러 면으로 나눈다.
고미스의 사진, 건축을 고정하지 않은 기록
호아킴 고미스의 사진은 가우디 건축과 미로 작품 사이에서 별도의 역할을 맡는다. 건축물을 한 번에 담는 기록보다 부분을 선택하고 가까이 당겨 형태와 재료를 분리하는 방식에 무게를 뒀다. 건축 현장에서 서로 멀리 떨어진 부분도 사진의 배열 안에서는 연속된 형태로 이어질 수 있었다.
고미스가 1950년대에 제작한 사진책의 연속 배열은 가우디와 미로의 작업을 읽는 새로운 순서를 만들었다. 자연의 형태와 움직임, 수공예를 향한 두 창작자의 관심을 여러 사진의 흐름으로 연결했고, 영화의 숏을 이어 붙이는 편집에 가까운 구성을 사용했다. 사진은 완성된 작품을 보존한 기록인 동시에 어떤 부분을 먼저 보고 다음에 무엇을 볼지 정하는 해석이 됐다.
건물 전체보다 굴곡진 벽과 장식, 재료가 만나는 부분을 크게 다루면 건축의 규모는 사라지고 형태의 반복이 남는다. 가우디 건축의 한 부분은 미로의 조각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독립된 이미지가 된다. 고미스의 프레임은 건축을 축소해 복제한 것이 아니라 건축에서 새로운 조형 관계를 골라낸 결과다.
2019년 호안 미로 재단에서 열린 전시는 미로의 조각과 도자, 드로잉, 판화에 고미스의 가우디 사진을 연결했다. 2026년 카사 바트요 전시는 당시 축적한 연구와 작품 구성을 다시 가져오면서 디지털 설치를 더했다. 원작과 사진의 재배치에서 출발한 기획이 원작의 3차원 데이터화와 새로운 시청각 작업으로 넓어진 셈이다.
고미스의 촬영과 디지털 제작은 기술과 시기가 다르지만 공통된 편집 과정을 거친다. 건축이나 조각의 어느 부분을 선택할지, 어느 크기로 확대할지, 여러 형태를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를 제작자가 정한다. 사진과 3차원 데이터 모두 원작의 모든 정보를 옮기는 중립적인 복사본이 아니다.
조각을 데이터로 나눈 포토그래메트리
호안 미로 재단은 이번 전시를 위해 미로의 조각 일부를 처음으로 고해상도 포토그래메트리(photogrammetry) 방식으로 디지털화했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의 공통 위치를 계산해 조각의 입체 형상과 표면 정보를 구축하는 기술이다. 확보한 데이터는 투모로 뷰로가 제작한 새로운 시청각 작업에 사용됐다.
포토그래메트리는 정면에서 가려진 측면과 후면을 이어 붙이고, 조각을 여러 방향으로 회전해 살필 수 있는 입체 모델을 만든다. 실제 조각에서는 관람 위치나 진열 구조 때문에 한꺼번에 보기 어려운 굴곡과 접합부도 확대와 회전을 거쳐 다른 순서로 제시할 수 있다.
전시대 정면에서는 가장 앞쪽 조각과 뒤편의 긴 조각, 끝에 놓인 디지털 설치가 하나의 축으로 겹친다. 유리 구조물의 수직선은 조각 사이를 구획하면서도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다. 실물 조각을 따라가던 시선이 전시대 끝의 디지털 작업으로 이어지며 입체 형상이 다른 매체로 옮겨진 과정을 비교하게 한다.
스캔 단계에서 기록된 조각은 애니메이션과 생성형 AI를 거치며 회전하고 분리된 뒤 새로운 배열로 바뀐다. 정지된 조각에 속도와 순서가 더해지고, 작은 표면은 실제 작품의 크기를 넘어 확대된다. 디지털 설치는 조각의 재현물이 아니라 원작에서 수집한 형상과 질감을 다시 편집한 별도의 제작물이다.
투모로 뷰로가 맡은 작업에는 기술적 처리뿐 아니라 조형적 판단이 들어간다. 어느 굴곡을 크게 다룰지, 형태를 어디에서 나눌지, 분리된 부분을 어떤 순서로 결합할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생성형 AI가 사용됐다는 사실보다 입력 자료의 선택과 결과물의 편집을 누가 맡았는지가 작품의 성격을 결정한다.
원작 해석에 참여하는 주체도 늘어났다. 호안 미로 재단은 작품과 고미스 아카이브, 기존 연구를 제공했고, 공동 큐레이터들은 세 창작자의 관계를 다시 구성했다. 투모로 뷰로는 원작을 입체 데이터와 움직임, 음향으로 전환했다. 기술 스튜디오는 장비를 공급하는 후방 인력에 머물지 않고 원작의 일부를 선택하고 재조합하는 제작자로 들어왔다.
원작과 파생 작업을 함께 둔 이유
카사 바트요의 밝은 전시실에는 미로의 그래픽 작품과 고미스의 사진이 걸렸고, 어두운 공간에는 미로의 조각과 디지털 설치가 놓였다. 원작에서 추출한 색과 형상만 크게 펼치는 방식과 달리 변환의 근거가 된 실물 작품을 같은 동선에 남겼다.
종이 작품에서는 넓은 여백과 잉크의 번짐, 색면 가장자리의 미세한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조각에서는 실제 높이와 무게, 돌출부가 만드는 그림자, 관람객의 몸과 작품 사이의 거리가 유지된다. 디지털 작업은 형상을 회전하고 확대할 수 있지만 종이와 청동이 가진 물리적 조건까지 옮기지는 않는다.
반대로 원작만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관찰도 생긴다. 조각의 여러 면을 빠르게 전환하고, 작은 접합부를 크게 확대하며, 서로 떨어진 형태를 하나의 연속된 움직임으로 묶을 수 있다. 같은 조각이 물질로 존재할 때와 데이터로 다뤄질 때 서로 다른 정보가 앞에 나온다.
고미스의 사진도 같은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가우디 건축의 크기와 기능은 사진에서 줄어들지만 표면의 굴곡과 장식, 재료의 반복은 더 또렷하게 다뤄진다. 원작에서 일부 조건을 덜어내는 대신 다른 관계를 앞으로 가져오는 방식이다.
미로의 형상은 종이에서 검은 선과 원색으로 나뉘고, 조각에서는 구멍과 접합부를 가진 부피로 굳어진다. 고미스의 사진은 가우디 건축을 선택적인 프레임으로 바꾸며, 3D 스캔과 생성형 AI는 미로 조각에 회전과 분해, 재결합의 시간을 더한다.
카사 바트요는 종이의 여백과 조각의 무게를 남겨둔 채 사진의 프레임과 데이터의 움직임을 덧붙였다. 기술은 원작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미로의 형상이 서로 다른 시대의 제작 방식과 만나는 과정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