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미로·고미스②] 밝은 복도와 검은 전시실, 관람 방식을 나눈 전시 설계

액자 작품·부유하는 사진·장기 진열장·조각·디지털 설치를 조도와 거리로 구획

2026-07-14     임민정 기자
Casa Batlló Unveils ‘Gaudí-Miró-Gomis: Deconstructed’ Exhibition in Barcelona. 사진=Casa Batlló,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임민정기자]흰 벽과 녹색 바닥이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면 전시 환경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액자 안의 종이 작품을 가까이 살피던 관람객은 검은 공간에서 길게 놓인 조각 전시대와 공중에 매단 사진, 안쪽의 디지털 설치를 한꺼번에 마주한다. 작품을 한 점씩 읽는 구역과 여러 매체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구역이 밝기와 거리로 나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사 바트요에서 열린 ‘가우디-미로-고미스: 디컨스트럭티드(Gaudí-Miró-Gomis: Deconstructed)’는 호안 미로(Joan Miró)의 조각과 그래픽 작품, 호아킴 고미스(Joaquim Gomis)의 사진에 애니메이션과 3D 스캔, 생성형 인공지능, 음향 작업을 결합했다. 카사 바트요 컨템퍼러리와 호안 미로 재단이 공동 기획하고 조아나 세구로(Joana Seguro)와 에스테르 라모스(Ester Ramos)가 큐레이션을 맡았다. 런던의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투모로 뷰로(Tomorrow Bureau)는 역사적 작품과 사진을 바탕으로 디지털 설치를 제작했다.

전시는 가우디와 미로, 고미스의 생애와 작업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종이와 잉크, 청동 조각, 사진, 소리, 디지털 프로젝션을 공간별로 묶고 관람객의 이동에 따라 관계를 드러낸다. 세 사람의 연결은 설명문보다 작품 사이의 거리와 조명, 시선의 방향을 통해 전달된다.

가까이 읽는 복도, 한꺼번에 바라보는 검은 공간

밝은 구역에서는 미로의 그래픽 작품이 흰 벽에 한두 점씩 걸려 있다. 액자 사이에는 넓은 간격을 두고 작품 주변의 시각적 정보를 줄였다. 관람객은 액자 앞으로 접근해 검은 선과 색면, 종이의 여백을 살핀 뒤 다음 작품으로 이동한다.

복도의 폭은 넓지 않다. 작품과 마주 보는 거리가 짧고, 한 작품 앞에 사람이 서면 뒤쪽 관람객의 이동 속도도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작품을 멀리서 전체적으로 조망하기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세부를 읽도록 만든 구조다.

Casa Batlló Unveils ‘Gaudí-Miró-Gomis: Deconstructed’ Exhibition in Barcelona. 사진=Casa Batlló,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대형 그래픽 작품 앞에서는 관람객의 몸과 작품의 크기가 직접 비교된다. 검은 형상과 붉은 곡선은 사람보다 크게 다가오고, 맞은편 벽과 커튼이 시야를 좁혀 한 작품에 집중하게 한다. 밝은 조명은 종이의 색과 여백을 고르게 드러내며 작품을 벽면에서 분리한다.

어두운 전시장에서는 감상 방식이 달라진다. 개별 작품을 차례로 읽기보다 조각의 배열과 사진, 디지털 설치, 천장의 반사광이 동시에 들어온다. 흰 전시대는 검은 바닥과 벽 사이에서 강한 수평선을 만들고, 조각들은 하나의 긴 군집으로 묶인다.

밝은 복도가 한 점씩 멈춰 보는 관람을 유도한다면 검은 공간은 이동하면서 전체 구성을 파악하게 한다. 작품의 매체뿐 아니라 관람 거리와 체류 방식까지 두 구역에서 다르게 설계했다.

벽에서 떨어진 사진, 이동 경로에 들어온 고미스의 기록

고미스의 사진은 벽에 나란히 걸리지 않았다. 천장에서 내려온 가는 선에 매달려 전시장 양쪽과 중앙에 놓였다. 사진 아래에는 작은 무게추가 연결돼 있고, 인화물은 관람객의 눈높이 부근에서 떠 있는 형태를 취한다.

벽면 전시는 대체로 작품을 정면에서 바라보게 한다. 공중에 매단 사진은 관람객이 앞과 옆을 오가며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한다. 한 인화물 너머로 다른 사진과 조각, 전시장 안쪽의 디지털 설치가 겹쳐지면서 사진은 독립된 평면인 동시에 공간을 나누는 얇은 경계가 된다.

Casa Batlló Unveils ‘Gaudí-Miró-Gomis: Deconstructed’ Exhibition in Barcelona. 사진=Casa Batlló,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고미스는 가우디 건축의 전체 모습뿐 아니라 표면과 장식, 재료가 만나는 부분을 세부적으로 촬영했다. 전시장에 흩어진 인화물은 건축 사진을 한 줄로 읽는 대신 서로 떨어진 세부를 조각과 디지털 작업 사이에서 비교하게 한다. 가우디 건축을 기록한 사진이 미로 조각 주변에 놓이면서 곡선과 구멍, 돌출부와 거친 표면이 매체를 넘어 반복된다.

사진의 크기와 설치 높이는 대형 디지털 작업보다 낮고 조각과는 비슷한 범위에 놓였다. 고미스의 기록을 배경 자료로 벽면에 밀어두지 않고 조각과 같은 동선에 포함한 선택이다. 관람객은 사진 앞에 멈추기보다 사진 사이를 통과하며 가우디 건축의 세부를 조각과 함께 접한다.

공중 설치에는 부담도 따른다. 뒤쪽의 조명과 다른 작품이 인화물 주변으로 들어오면서 사진 한 점의 구도와 명암에 집중하기 어려울 수 있다. 사진을 독립 작품으로 오래 보는 방식보다 여러 매체의 관계를 빠르게 연결하는 방식에 더 가까운 배치다.

긴 전시대가 만든 하나의 축

검은 전시장 중앙에는 흰 전시대가 입구에서 안쪽까지 길게 이어진다. 조각마다 개별 좌대를 두는 대신 하나의 수평 구조 위에 여러 작품을 배열했다. 유리 덮개는 조각 단위로 나뉘어 있지만 전시대 전체는 끊기지 않는다.

Casa Batlló Unveils ‘Gaudí-Miró-Gomis: Deconstructed’ Exhibition in Barcelona. 사진=Casa Batlló,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관람객은 전시대의 양옆을 따라 이동하며 조각을 차례로 본다. 독립된 조각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방식은 제한되고, 긴 축을 따라 앞과 옆에서 살피는 관람이 중심이 된다. 전시대의 방향은 관람객의 발걸음뿐 아니라 시선도 안쪽의 디지털 설치로 이동시킨다.

가장 앞에 놓인 조각과 가운데의 긴 조각, 끝부분의 디지털 작업은 정면에서 하나의 선 위에 겹친다. 가까운 조각의 작은 구멍 사이로 뒤쪽 작품이 들어오고, 유리 구조물의 수직선은 전시대의 깊이를 여러 구간으로 나눈다.

Casa Batlló Unveils ‘Gaudí-Miró-Gomis: Deconstructed’ Exhibition in Barcelona. 사진=Casa Batlló,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조각의 배치는 개별 작품의 완결성보다 형태의 반복을 앞세운다. 둥근 머리와 가느다란 목, 층층이 쌓인 덩어리, 비어 있는 구멍이 전시대 전체에서 이어진다. 한 작품을 보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구분보다 비슷한 구조가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따라가게 한다.

긴 전시대는 미로의 조각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동시에 관람 위치를 제한한다. 유리와 전시대 가장자리 때문에 조각 가까이 다가가거나 자유롭게 뒤쪽을 살피기는 어렵다. 작품 보호와 전체 구성의 통일성이 확보되는 대신 조각마다 다른 표면과 접합 구조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범위는 줄어든다.

조명에서 전시 구조로 넓어진 빛의 역할

밝은 복도의 조명은 작품을 고르게 비추는 기능에 집중한다. 액자 위와 진열장 안쪽에 빛을 모으고, 벽과 바닥에는 강한 명암을 만들지 않는다. 작품의 색과 종이, 문헌 자료를 읽는 데 필요한 시야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검은 전시장에서는 빛 자체가 공간의 일부가 된다. 흰 전시대가 아래에서 밝게 떠오르고, 디지털 설치의 빛이 어두운 벽과 천장으로 번진다. 조각은 전체가 균일하게 드러나지 않고 돌출부와 가장자리만 밝아진다.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는 짙은 그림자가 남아 형상의 깊이를 강조한다.

천장의 금속성 표면은 빛을 그대로 반사하지 않는다. 물결처럼 굴곡진 표면을 따라 밝은 부분이 흔들리고 길게 퍼진다. 조각과 디지털 설치에서 나온 빛이 천장까지 이어지며 전시장 상부도 관람 범위에 들어온다.

Casa Batlló Unveils ‘Gaudí-Miró-Gomis: Deconstructed’ Exhibition in Barcelona. 사진=Casa Batlló,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빛은 밝기 조절을 넘어 매체의 위계를 정한다. 흰 전시대와 안쪽의 디지털 설치는 어두운 공간에서 가장 먼저 들어오고, 공중에 매단 사진은 주변의 빛을 받은 부분만 드러난다. 조각과 사진, 디지털 작업을 같은 밝기로 제시하지 않고 관람 순서에 차이를 둔 구성이다.

강한 명암은 전시 전체의 인상을 빠르게 전달하지만 작은 작품에는 불리할 수 있다. 디지털 설치와 반사 천장이 먼저 주목을 끌면 사진의 세부와 조각의 표면은 뒤로 밀린다. 빛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감각형 전시가 작품의 집중도를 높이는 동시에 전시 연출 자체를 더 강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다.

설명문보다 공간의 전환을 앞세운 전시

밝은 공간과 검은 공간 사이에는 단순한 색상 차이만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을 읽는 방법, 이동 방향, 관람 거리, 한 번에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모두 달라진다. 복도에서는 한 점의 원작과 짧은 설명을 가까이 살피고, 어두운 전시장에서는 여러 조각과 사진, 빛과 소리를 하나의 구성으로 받아들인다.

가우디와 미로, 고미스의 관계도 긴 연표나 대형 설명문보다 매체의 연속으로 구성된다. 고미스가 촬영한 가우디 건축의 세부가 공중에 놓이고, 비슷한 유기적 형태를 가진 미로 조각이 중앙에 이어지며, 안쪽의 디지털 설치가 형태를 확대하고 움직인다. 역사적 관계를 텍스트로 정리하는 대신 관람객이 공간을 지나며 반복되는 형태를 찾아가도록 했다.

공식 프로그램은 카사 바트요 컨템퍼러리를 가우디의 유산과 동시대 예술·기술을 연결하는 전시 공간으로 규정한다. 2026년 1월 개관한 2층 전시장은 연간 두 차례 장소 특정적 프로젝트와 매체 융합형 작업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가우디-미로-고미스: 디컨스트럭티드’는 개관전에 이어 마련된 두 번째 주요 전시다.

카사 바트요처럼 건축 자체의 인상이 강한 장소에서 전시는 작품을 흰 벽에 정렬하는 방식만으로 건축과 경쟁하기 어렵다. 전시장 일부에서는 목재 문과 창, 곡선형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고, 다른 구역에서는 벽과 바닥을 검게 처리해 기존 건축의 존재를 낮췄다. 건축을 계속 노출하는 대신 작품의 성격에 따라 건축의 가시성을 조정했다.

관람객의 움직임까지 포함한 구성

밝은 복도에서는 관람객이 작품과 나란히 서거나 정면에서 멈춘다. 이동 방향은 벽면을 따라 이어지고, 액자 앞에 머무는 사람이 통로의 속도를 결정한다. 한 사람이 작품을 오래 살피면 뒤쪽의 관람객도 천천히 이동하게 된다.

어두운 공간에서는 긴 전시대가 이동 방향을 분명하게 만든다. 관람객은 중앙을 가로지르기보다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걷고, 조각을 보다가 안쪽의 디지털 설치로 시선을 옮긴다. 공중에 매달린 사진과 바닥의 작은 구조물은 직선 이동을 일부 끊으며 좌우를 살피게 한다.

관람객의 몸은 작품을 가리는 방해 요소로만 처리되지 않는다. 조각과 사람의 높이, 대형 디지털 설치와 관람객의 거리가 작품의 규모를 체감하게 한다. 움직이는 사람과 고정된 조각이 함께 놓이면서 전시장 안의 시간도 구분된다.

다만 관람객 참여를 별도의 체험 장치로 확장하지는 않았다. 작품에 손을 대거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인터랙티브 전시와 달리 걷고 멈추며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기본적인 신체 움직임을 활용한다. 기술적 장치를 관람객의 조작보다 작품과 공간의 재구성에 사용한 선택이다.

감각형 전시가 원작과 만나는 방식

최근 전시에서 디지털 프로젝션과 음향, 어두운 공간은 관람객을 빠르게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널리 쓰인다. 원작의 세부보다 넓은 벽과 바닥을 채운 빛이 앞에 나오고, 작품 감상과 촬영 경험의 경계가 흐려지는 구성도 늘었다.

카사 바트요 전시는 디지털 설치만으로 전체 공간을 채우지 않았다. 밝은 복도에서 미로의 그래픽 작품과 고미스의 사진을 가까이 살핀 뒤 어두운 공간의 조각과 디지털 작업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원작을 먼저 보거나 다시 돌아볼 수 있는 동선을 남겨 디지털 작업이 시작된 근거를 함께 제시한다.

전시장 안쪽으로 갈수록 개별 작품의 정보보다 매체 사이의 관계가 앞에 나온다. 종이 작품과 사진은 액자 안에서 분리되고, 조각은 긴 전시대 위에서 하나의 집단이 되며, 빛과 음향은 전시장 전체로 퍼진다. 작품 한 점의 독립성은 줄어드는 대신 서로 다른 시대와 매체를 비교할 범위는 넓어진다.

‘가우디-미로-고미스: 디컨스트럭티드’는 모든 작품을 같은 조건에서 보게 하지 않는다. 미로의 그래픽 작품 앞에서는 선과 색, 종이의 여백을 읽게 하고, 고미스의 사진 사이에서는 건축의 세부를 조각과 겹쳐 보게 한다. 검은 전시장에서는 조각과 빛, 디지털 설치가 하나의 긴 축을 만든다. 감각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매체마다 관람 거리와 속도를 달리한 구성이 전시 전체를 지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