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엔리코 엠브롤리 ‘Ocean Seas’, 푸른 색면 위의 작은 항해

단색 회화와 입체 오브제 사이 바다와 여행의 감각을 물성으로 구성한 혼합매체 회화

2026-07-16     박준식 기자
Enrico Embroli, Ocean Seas, Mixed Media, Oil on Canvas, 96.5×93.9×12cm, 2021..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박준식기자]엔리코 엠브롤리(Enrico Embroli)의 ‘Ocean Seas’는 푸른 색면 한가운데 작은 입체 오브제를 놓은 2021년작이다. 혼합매체와 유채로 제작된 96.5×93.9×12cm 규모의 작품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푸른 지지체를 벽면 앞으로 밀어내고, 중앙 하단의 작은 구조물을 통해 넓은 청색 공간 안에 항해의 단서를 남긴다.

전시장 벽면에서 작품은 먼저 푸른 단색 회화처럼 다가온다. 캔버스 대부분을 차지하는 청색은 파도나 하늘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위쪽으로 갈수록 밝아지고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깊어지는 농담은 바다의 수평선과 수심을 직접 그리지 않으면서도 물 앞에 선 감각을 만든다. 시선은 넓은 청색 안에 잠시 머문 뒤 중앙 하단의 작은 오브제로 이동한다.

중앙 하단의 오브제는 작품의 무게중심을 바꾼다. 작은 직사각형 구조물은 초록색 상단, 청록색 중간부, 짙은 청색 하단부로 나뉜다. 넓은 바다 같은 색면 안에 또 하나의 축소된 풍경이 놓인 형식이다. 초록색 띠는 먼 육지나 수평선을 떠올리게 하고, 청록색 표면은 물의 입자처럼 잘게 올라온 질감으로 단색 공간의 정적을 흔든다.

오브제 상단에는 작은 배의 형상이 낮게 들어가 있다. 배는 사실적 묘사로 전면에 나오지 않는다. 얕은 부조나 음각에 가까운 방식으로 표면에 남아, 작품 전체의 고요한 청색 안에 이동과 여행의 감각을 더한다. ‘Ocean Seas’라는 제목이 바다의 넓이를 열어놓는다면, 작은 배는 그 바다를 통과하는 인간적 척도로 놓인다.

상단 중앙의 가로 슬릿은 청색 색면의 평면성을 깨뜨린다. 캔버스가 안쪽으로 눌리거나 절개된 듯한 구조는 빛을 받아 얕은 그림자를 만든다. 멀리서 보면 단색 회화에 가까운 작품이 가까이에서는 부조와 오브제의 조건을 함께 드러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엠브롤리의 회화는 물감을 올린 평면에서 끝나지 않고, 지지체 자체를 공간 안으로 끌어낸다.

12cm의 깊이는 작품의 물성을 분명하게 만든다. 벽에 밀착된 얇은 회화가 아니라, 벽면에서 앞으로 나온 물리적 사물에 가깝다. 정면에서는 청색 색면이 먼저 읽히지만, 옆으로 조금 이동하면 두께와 그림자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 회화의 지지체는 단순한 바탕을 넘어 공간을 점유하는 구조로 바뀐다.

마티에르의 배치는 절제돼 있다. 넓은 푸른 색면은 비교적 매끄럽게 유지되고, 중앙 오브제에 거친 표면과 두꺼운 색층이 집중된다. 엠브롤리의 다른 혼합매체 작업에서 자주 확인되는 긁힘과 마모, 두꺼운 표면은 이 작품에서 부분적으로 조절돼 나타난다. 전체를 강한 질감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단색 공간의 침묵과 작은 오브제의 물성을 대비시키는 방식이다.

엔리코 엠브롤리, 표면과 물성의 회화/구띠 갤러리 전시로 읽는 혼합매체 회화, 마티에르, 탈평면성, 해외 작가 전시의 검증 구조. 사진=enricoembrolistudios,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푸른색은 풍경의 색이면서 감정의 속도다. 바다는 직접 그려지지 않지만, 청색의 넓이와 깊이가 바다 앞에 선 정서를 만든다. 파도, 항구, 구름 같은 구체적 요소는 거의 사라지고, 수평선에 가까운 감각만 남는다. 작품은 바다를 설명하지 않고, 바다를 바라볼 때 생기는 거리와 침묵을 구성한다.

작은 배는 여행의 상징으로 읽히지만, 서사를 완성하지는 않는다. 출발지와 목적지는 제시되지 않고 항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배는 푸른 공간 속에 놓인 가능성으로 남는다. ‘Ocean Seas’에서 여행은 어디론가 도착하는 사건이 아니라, 넓은 공간 안에서 자신과 세계의 거리를 새로 재는 상태에 가깝다.

동시대 회화의 흐름 안에서도 이 작품은 평면 이미지보다 물성과 경험 쪽에 놓인다. 최근 회화는 캔버스의 두께, 표면의 촉각성, 오브제성, 빛과 그림자, 관람자의 위치를 감상의 일부로 끌어들이고 있다. ‘Ocean Seas’ 역시 푸른 색면을 배경으로만 두지 않는다. 슬릿, 중앙 오브제, 지지체의 깊이가 회화를 공간 속 사물로 바꾼다.

엠브롤리가 강조해 온 “I MAKE THINGS”라는 문장도 작품 해석과 맞닿아 있다. ‘Ocean Seas’는 그린 바다라기보다 만들어진 바다에 가깝다. 푸른 색면은 회화적 공간을 만들고, 중앙 오브제는 손으로 제작된 작은 구조물로 남는다. 작가는 바다를 묘사하기보다 바다의 정서를 담을 수 있는 물리적 장치를 캔버스 위에 세운다.

작품의 힘은 단순한 구조에서 나온다. 넓은 청색, 중앙의 작은 오브제, 상단의 슬릿만으로도 충분한 거리와 정적이 생긴다. 복잡한 기호나 과도한 질감 없이 바다와 여행, 명상적 정서가 낮은 밀도로 이어진다. 다만 중앙 오브제의 배 형상이 지나치게 앞서면 작품은 ‘바다와 항해’라는 쉬운 은유로 닫힐 수 있다. 오래 남는 부분은 배의 상징보다 청색 색면과 오브제 사이의 거리다.

넓은 청색 공간은 관람자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작은 구조물은 다시 가까이 다가오게 한다. 멀리서 보는 단색 회화와 가까이서 확인하는 물성이 작품 안에서 반복적으로 교차한다. 감상은 한 번의 정면 응시로 끝나지 않는다. 시선은 색면과 오브제, 슬릿과 그림자, 매끈한 표면과 거친 질감 사이를 오간다.

‘Ocean Seas’는 바다를 재현한 그림이 아니다. 푸른 단색 공간, 작은 배의 기호, 돌출된 오브제, 슬릿 구조, 지지체의 깊이를 통해 바다와 여행의 감각을 물질로 구성한 회화다. 작품은 큰 소리로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다. 청색의 침묵과 작은 오브제의 존재감 사이에서 회화가 평면을 벗어나 공간과 사물의 감각으로 확장되는 방식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