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브랜드 전략①] AI가 다시 쓰는 기업 정체성
최근 2년 기업 73% 브랜드 정비…2028년 80% 이상 미션·브랜드·문화 변화 전망
[KtN 최기형기자]2028년까지 기업 10곳 가운데 8곳 이상이 인공지능(AI)의 시장 확산에 맞춰 미션과 브랜드, 조직문화를 크게 바꿀 전망이다. 업무 자동화와 비용 절감에 집중했던 AI 투자가 제품과 서비스, 고객 관계, 조직 운영을 다시 짜는 단계로 넘어가면서 기업이 내세워 온 정체성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
가트너가 최고마케팅책임자(CMO)와 브랜드 업무에 관여하는 최고경영진 4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6 브랜드·비즈니스 전략 조사’에서 응답자의 82%는 AI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응하려면 기업 정체성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고 답했다. 중립 응답은 10%, 반대는 8%였다. 조사 기업의 73%는 최근 2년 동안 이미 브랜드를 정비했다.
조사에서 말하는 기업 정체성은 로고와 슬로건에 한정되지 않는다. 기업이 존재하는 목적을 담은 미션, 고객에게 내놓는 브랜드 약속, 임직원의 판단과 행동을 정하는 조직문화까지 포함한다. AI가 바꾸는 범위가 기업의 외형을 넘어 사업 목적과 운영 원칙으로 넓어졌다는 뜻이다.
로고보다 먼저 달라지는 사업의 경계
제품을 만든 뒤 이름과 디자인, 광고 문구를 정하던 기존 방식은 AI가 제품 개발과 고객 상담, 시장 조사, 유통, 가격 결정에 동시에 들어오면서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AI를 어디에 적용하는지에 따라 상품의 성격과 고객 접점, 수익 구조까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제품에 검색이나 추천 기능을 추가하는 정도라면 현재 브랜드 안에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AI를 토대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기존에 없던 고객층과 거래하기 시작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기업 이름이 같더라도 시장에서 맡는 역할과 고객에게 제공하는 가치는 이전과 달라진다.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이 제품에서 발생한 데이터를 분석해 관리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면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경계도 옅어진다. 직원이 맡던 상담과 심사, 분석 업무를 AI가 처리하면 고객은 처리 속도만이 아니라 판단 기준과 책임 소재까지 확인하게 된다. 사업의 범위가 달라질수록 기존 미션이 새 사업을 충분히 설명하는지도 다시 살펴야 한다.
미션 개편은 문구를 바꾸는 작업에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 늘릴 사업과 줄일 사업, 우선할 고객과 포기할 시장, 기술을 적용할 업무와 사람이 맡을 업무를 정하는 기준이 함께 달라져야 한다. AI를 활용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제품과 고객 접점에 자동화를 넣을 필요도 없다. 기존 고객이 기대해 온 가치와 충돌하는 기능이라면 도입하지 않는 판단도 브랜드 전략에 속한다.
비슷해진 기능, 더 무거워진 기업 이름
기업마다 사용하는 AI 기술과 개발 도구가 비슷해지면 제품과 서비스의 기능 차이도 빠르게 줄어든다. 한 기업이 검색과 추천, 자동 상담 기능을 선보인 뒤 경쟁사가 유사한 기능을 내놓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아졌다. 기술 자체만으로 우위를 오래 유지하기 어려운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다.
가트너는 AI가 제품과 서비스의 범용화를 앞당기고 허위·왜곡 정보의 확산 가능성을 높이면서 브랜드가 기업의 차별성과 신뢰를 지키는 주요 수단으로 남을 것으로 분석했다. 기능이 비슷해질수록 어느 기업이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기준으로 대응하는지가 고객 선택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다.
AI가 잘못된 답변이나 부정확한 추천을 내놓았을 때 고객이 책임을 묻는 대상은 기반 기술을 개발한 업체에 머물지 않는다. 서비스를 판매하고 고객 정보를 수집한 기업의 이름이 먼저 거론된다. AI를 도입한 기업은 성능뿐 아니라 데이터 활용 방식과 검증 절차, 오류가 발생한 뒤의 조치까지 브랜드 신뢰 안에서 관리해야 한다.
AI를 기업 이미지 전면에 배치할수록 설명해야 할 내용도 많아진다. 실제 제품과 서비스에 어떤 효용이 생겼는지, 어느 단계에서 사람이 판단하는지, 잘못된 결과를 어떻게 바로잡는지가 확인되지 않으면 AI는 사업의 변화보다 홍보 문구에 가까워진다.
기업이 먼저 정해야 할 내용은 ‘AI 기업처럼 보이는 방법’이 아니다. AI를 활용해 어떤 가치를 제공하고, 기존 고객과의 약속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가 앞서야 한다. 사업 내용보다 이름과 디자인을 먼저 바꾸면 브랜드 개편과 실제 고객 경험 사이의 간격만 커질 수 있다.
기업 정체성 변화 82%, 성장전략 반영은 40% 안팎
경영진의 인식과 실제 의사결정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격이 남아 있다. 기업 정체성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응답은 82%에 달했지만, 제품과 가격, 유통 등 성장전략을 세울 때 브랜드를 주요 판단 기준으로 삼은 비율은 대체로 40% 안팎에 머물렀다.
신제품과 서비스를 도입할 때 브랜드를 주요 전략 요소로 고려했다는 응답은 53%였다. 고객 경험 개선은 48%, 새로운 고객군 공략은 46%, 가격 변경은 42%, 기존 제품과 서비스 개선은 41%로 집계됐다. 판촉·유통 확대와 신규 지역 진출에서는 각각 39%까지 낮아졌다.
신제품과 서비스를 내놓을 때도 절반에 가까운 기업이 브랜드를 주요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은 셈이다. 가격과 유통, 해외시장 진출처럼 매출과 직결되는 결정에서는 브랜드가 더 뒤로 밀렸다.
제품 개발이 끝난 뒤 브랜드 조직이 이름과 광고만 맡는 구조에서는 사업전략과 브랜드 전략을 맞추기 어렵다. 고객에게 약속한 가치와 다른 제품이 출시되거나 단기 판매를 늘리기 위해 가격과 유통 방식을 자주 바꾸면 광고 문구만으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
AI가 기업에 요구하는 변화 속도와 내부 의사결정 구조가 움직이는 속도도 조사 수치에서 차이를 드러냈다. 미션과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은 널리 퍼졌지만 제품과 가격, 고객 경험을 정하는 과정에서 브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브랜드 전략이 강한 기업, 성장 목표 초과 가능성 2배
사업전략과 브랜드 전략을 긴밀하게 연결한 기업은 경영 성과에서도 차이를 나타냈다. 강한 브랜드 전략을 갖춘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매출 또는 수익 목표를 초과 달성할 가능성이 두 배 높았다. 마케팅 캠페인 목표를 넘어설 가능성은 3.3배, 마케팅 이외 조직이 목표를 초과 달성할 가능성은 1.6배 높았다. 성과 비교에는 CMO와 브랜드 관련 최고경영진 277명의 응답이 활용됐다.
조사에서 강한 브랜드 전략은 인지도와 선호도가 높은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사업전략과 충분히 맞물리고, 여러 조직에서 일관되게 실행되며, 경영진이 과거와 미래 성장에 중요한 요소로 인정하는지가 평가 기준에 포함됐다.
브랜드의 영향은 마케팅 조직에만 머물지 않았다. 제품 관리와 고객 서비스는 물론 인사와 정보기술 등 지원 조직의 목표 달성에서도 차이가 나타났다. 제품과 서비스, 채용, 고객 대응에서 같은 기준을 적용한 기업일수록 조직별 판단이 엇갈릴 가능성도 줄어든다.
다만 조사 결과만으로 브랜드 전략이 매출과 수익 증가를 직접 만들어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제품 경쟁력과 경영 역량, 시장 환경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강한 브랜드 전략을 갖춘 기업에서 성장 목표 초과 달성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는 연관성까지 확인된 조사로 읽는 편이 타당하다.
미션을 바꾸고 조직은 그대로 두는 기업
기업이 미션에 AI와 혁신을 추가하더라도 제품 개발 기준과 인사평가, 고객 대응 방식이 그대로라면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다. 데이터 중심 경영을 내세우면서 일부 조직만 고객 정보에 접근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요구하면서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평가제도를 유지하면 외부에 발표한 브랜드와 내부 운영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AI가 맡을 업무와 사람이 책임질 업무도 구분해야 한다. 자동화 범위만 넓히고 최종 판단과 오류 대응의 책임자를 정하지 않으면 직원과 고객 모두 혼란을 겪게 된다. 외부에는 책임 있는 AI를 약속하면서 내부에서는 속도와 비용 절감만 평가할 경우 브랜드 신뢰가 약해질 가능성도 커진다.
고객과 직원, 투자자에게 내놓는 설명도 하나의 방향으로 맞춰야 한다. 고객에게는 안전과 신뢰를 강조하고 투자자에게는 인력과 비용 절감만 내세우면 기업이 실제로 우선하는 가치가 불분명해진다. 직원에게 사람 중심의 문화를 약속하면서 평가를 자동화 처리량과 생산성 수치에만 맞추는 방식도 같은 충돌을 낳는다.
브랜드는 광고에서 만들어진 문구보다 제품 출시와 가격 결정, 고객 불만 처리, 인력 운용 과정에서 반복되는 선택을 통해 형성된다. 미션과 문화까지 바뀌어야 한다는 경영진의 응답은 브랜드 개편이 마케팅 조직만의 업무로 남기 어려워졌다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잦은 개편보다 중요한 실행의 일관성
최근 2년 동안 기업의 73%가 브랜드를 정비했다는 조사 결과는 브랜드 개편이 일회성 행사를 넘어 지속적인 경영 활동으로 들어왔음을 나타낸다. AI 확산이 이어지는 동안 추가 개편에 나서는 기업도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사명과 슬로건을 자주 바꾸면 비용도 커진다. 고객과 직원이 새로운 정체성을 이해하기 전에 또 다른 설명을 접할 수 있고, 기존 브랜드가 쌓아 온 인지도와 신뢰가 약해질 수 있다. 간판과 포장, 디지털 서비스, 내부 문서와 시스템을 교체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모든 기업이 AI를 이유로 사명과 미션을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다. AI가 기존 사업의 목적과 경쟁력을 강화하는 수단이라면 이름을 바꾸기보다 데이터 활용 원칙과 고객 보호 기준, 사람과 AI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기존 브랜드 자산이 강한 기업은 이름과 상징을 유지하면서 운영 방식을 바꿀 수 있다. AI 사업이 주력 상품과 고객층, 수익 구조까지 바꾼다면 기존 브랜드가 변화한 사업을 충분히 담을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개편 여부보다 중요한 판단 기준은 기업이 발표한 정체성과 실제 사업 운영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다.
이번 조사는 CMO와 브랜드 업무에 관여하는 최고경영진의 인식을 토대로 했다. 국가와 업종, 기업 규모별 세부 결과는 공개 자료만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조사 수치를 국내 기업 전체에 그대로 적용하려면 국내 기업의 브랜드 개편과 AI 투자, 조직 변화, 사업 성과에 대한 별도 확인이 필요하다.
2028년까지 기업들이 내놓을 중장기 전략에는 AI 사업 확대와 조직 개편이 잇따라 반영될 전망이다. 사명과 로고를 바꾸는 기업보다 제품과 가격, 고객 경험, 조직문화의 운영 기준을 함께 바꾸는 기업이 AI 시대의 새로운 정체성을 먼저 확보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