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④] 피카소 스크랩북, 인체 드로잉에 남은 방향과 무게
앉은 자세와 기대는 몸, 겹친 인물의 간격까지… 해부학보다 방향·무게·화면 배치가 먼저 선 인체 드로잉
[KtN 박준식기자][KtN 박준식 기자] 팔은 짧게 꺾이고 다리는 길게 밀린다. 어깨와 골반의 비례는 실제 몸에서 한 번 떨어져 나와 페이지 안에서 다시 정리된다. 피카소 스크랩북의 인체 드로잉은 몸을 정확히 옮기는 데 머물지 않는다. 자세가 기울어지는 방향, 힘이 실리는 자리, 두 몸이 맞물리는 간격을 먼저 세운 뒤 인체를 그 위에 얹는다. 얼굴 드로잉이 정면과 측면을 겹쳐 다른 초상을 만들었다면, 인체 드로잉은 팔과 다리, 몸통과 골반의 길이와 각도를 바꾸며 다른 몸의 질서를 만든다.
몸을 한쪽으로 접은 드로잉에서는 중심이 안쪽으로 몰린다. 머리와 어깨, 팔과 다리가 흩어지지 않고 한 덩어리 안으로 감긴다. 몸통은 짧고 단단하게 잡히고, 무릎과 팔꿈치는 부드럽게 이어지기보다 중간에서 꺾인다. 팔과 다리를 끝까지 설명하는 대신 접힌 방향만 남겨 자세를 세운다. 앉아 있는지, 기대고 있는지, 몸이 안쪽으로 모이는지 같은 핵심은 선 몇 개로 바로 읽힌다. 인체의 형태보다 자세의 압력이 먼저 보이는 페이지다.
세로로 길게 선 인체 드로잉에서는 비례의 이동이 더 도드라진다. 머리와 목, 몸통과 하체가 실제 길이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상체는 줄고 하체는 길게 뻗는다. 어깨와 가슴은 몇 개의 선으로만 남는데, 골반과 다리는 페이지의 세로 방향을 끌고 가는 쪽으로 더 강하게 처리된다. 몸의 설명보다 서 있는 자세의 균형이 앞선다. 어디에 힘이 실리고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가 비례를 대신한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들어온 장면에서는 몸의 관계가 먼저 드러난다. 각 인물의 정확한 비례보다 어느 몸이 앞에 놓이고 어느 몸이 뒤로 물러나는지, 팔과 다리가 어디에서 겹치고 시선이 어디로 모이는지가 먼저 정리된다. 한 사람의 팔은 다른 사람의 몸을 끌어당기고, 다리의 방향은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을 조절한다. 인체가 따로 떨어진 개별 형상으로 남지 않고 장면의 질서를 만드는 요소로 움직인다는 점이 이 페이지에서 분명하다.
몸을 기대고 받치는 장면에서는 무게의 이동이 더 선명하다. 두 사람의 몸은 나뉘어 서 있지 않고 하나의 큰 덩어리처럼 얽힌다. 머리와 어깨, 팔과 다리의 경계는 또렷하게 갈라지지 않지만, 어느 쪽이 기대고 어느 쪽이 버티는지는 분명하다. 근육과 관절의 설명보다 기울어지는 방향과 지탱하는 힘이 앞선다. 포옹과 기대기, 안기기와 받치기가 선의 방향만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회전한 인체 드로잉에서는 몸의 축이 더 과감하게 틀어진다. 상체와 하체가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고, 어깨와 골반도 하나의 축에 고정되지 않는다. 팔과 다리는 길게 뻗었다가 중간에서 꺾이고, 몸통은 그 사이를 잇는 덩어리로 남는다. 반듯하게 선 몸보다 돌아가는 몸, 멈춘 자세보다 움직임이 남긴 흔적이 더 먼저 들어온다. 이 드로잉에서 인체는 완성된 자세가 아니라 방향의 기록에 가깝다.
스크랩북 안의 인체 드로잉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점이 뚜렷하다. 머리와 몸통, 팔과 다리가 해부학적 비례대로 정렬되지 않고, 관절은 부드럽게 연결되기보다 꺾이는 지점으로 처리된다. 몸의 앞뒤와 좌우도 실제 공간보다 페이지 안의 배치에 따라 다시 정리된다. 넓어진 골반, 길어진 다리, 줄어든 몸통, 접힌 어깨 같은 변화는 우연한 흔들림이 아니라 선택된 배열에 가깝다. 피카소가 인체를 다루는 방식은 정확한 재현보다 선별과 재배치에 더 가까웠다는 점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얼굴 드로잉이 눈과 코, 턱과 머리선으로 구조를 세웠다면, 인체 드로잉은 어깨와 골반, 팔과 다리의 방향으로 화면을 세운다. 가슴은 줄고 골반은 커지며, 다리는 길어지고 몸통은 짧아진다. 어깨는 펴지지 않고 안쪽으로 접히고, 무릎은 해부학의 연결점보다 자세가 꺾이는 지점으로 남는다. 실제 몸의 비례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몸의 긴장과 기울기, 기대는 힘과 버티는 힘이 더 선명해진다.
작은 페이지라는 조건도 이런 구성을 더 날카롭게 만든다. 넓은 화면이라면 더 많은 세부를 넣을 수 있지만, 스크랩북 안에서는 남길 선과 버릴 선을 빨리 가려야 한다.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어디까지 그릴지보다 몸의 축을 어느 방향으로 둘지가 더 중요해진다. 그 선택이 반복되면서 인체는 장식적 누드나 사실적 인체묘사와 다른 쪽으로 간다. 보기 좋은 몸보다 화면 안에서 힘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먼저 잡는 몸이다.
피카소 스크랩북의 인체 드로잉은 한 가지를 분명하게 남긴다. 인체는 맞춰 그릴 대상이 아니라 다시 배열할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팔과 다리, 어깨와 골반, 기대는 몸과 버티는 몸, 안긴 자세와 돌아선 자세는 모두 같은 원리 안에서 움직인다. 해부학의 정확성보다 선의 질서가 앞서고, 묘사의 충실성보다 몸의 방향과 무게가 앞선다. 이 작은 페이지들은 피카소가 인체를 어떻게 줄이고 꺾고 겹치며 새로운 구조로 세웠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