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 AMIS]박한지 개인전 ‘시간의 가치를 묻다’, 겹쳐진 산맥에 남은 회화의 시간
7월 23일부터 원주 별별갤러리서 개최…파스텔 색층과 반복된 능선, 굵은 붓질로 풍경과 추상의 경계 확장
[KtN 박준식기자]짙은 청록색 능선이 캔버스 아래에서 솟아오른다. 뒤편에는 분홍색과 연보라색 산이 겹겹이 이어지고, 봉우리 사이에는 먼저 칠한 물감과 새로 더한 선이 함께 남아 있다. 산의 높이와 거리를 재현하기보다 수없이 반복한 붓질로 시간을 새긴 회화다.
박한지 개인전 ‘시간의 가치를 묻다’가 7월 23일부터 8월 2일까지 강원 원주시 원주교육문화관 1층 별별갤러리에서 열린다. 평일은 낮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월요일은 휴관하며 입장료는 무료다. 전시 기간에는 ‘캔버스에 아크릴 나만의 시간을 쌓기’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박한지의 산은 한 번 그은 윤곽선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색을 올리고, 앞선 색을 일부 덮고, 그 위에 다시 능선을 더하는 과정이 계속 이어진다. 캔버스에 남은 선과 물감의 두께는 산을 그린 결과이면서 작업에 들인 시간의 흔적이다. 전시 제목의 ‘시간’도 시계로 재는 길이보다 반복과 축적을 통해 형상을 얻는다.
겹쳐진 능선, 캔버스에 새긴 붓의 이동
짙은 푸른 산이 작품 아래쪽과 중앙을 가로지르고, 밝은 산맥이 뒤편을 빽빽하게 채운다. 앞쪽에는 청록색과 파란색이 집중돼 있고, 뒤로 갈수록 분홍색과 살구색, 연보라색이 넓게 퍼진다. 색의 밝기와 채도가 산 사이의 거리를 나누지만, 모든 봉우리에는 비슷한 밀도의 붓자국이 남아 있다.
산의 경사를 따라 밀어 올린 긴 붓질과 능선의 굴곡을 따라 짧게 끊은 선이 교차한다. 두껍게 올라온 물감 사이로 먼저 칠한 색이 드러나고, 그 위를 지나간 붓질이 또 다른 봉우리를 만든다. 색을 완전히 가리지 않고 일부를 남겨 두면서 산은 단일한 형태가 아니라 여러 시간대가 겹친 표면으로 나타난다.
하늘은 캔버스 위쪽에 좁게 남아 있다. 산맥이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멀리 떨어진 경치를 바라보는 구도보다 능선 사이에 들어선 듯한 밀도가 강해진다. 중앙의 짙은 봉우리가 시선을 붙잡지만 주변의 산들은 한 방향으로 정돈되지 않는다. 크기와 기울기가 다른 능선이 서로 포개지며 시선을 작품 곳곳으로 흩어 놓는다.
민트색과 분홍색, 연보라색으로 칠한 산은 현실의 자연색과 거리를 둔다. 실제 지형을 충실하게 옮기려는 풍경화보다 시간이 지난 뒤 기억 속에 남은 장소에 가깝다. 밝은 색조가 산의 물리적인 무게를 덜어내는 사이, 두껍게 굳은 물감과 거친 붓자국이 표면의 긴장을 붙든다.
색띠가 밀어 올린 추상적 풍경
굵은 색띠가 캔버스 전면을 채운 회화에서는 산의 깊이보다 붓의 방향과 속도가 먼저 들어온다. 청록색과 분홍색, 파란색과 녹색이 능선을 따라 이어지고, 금빛에 가까운 선이 봉우리의 가장자리를 끊어 가며 지나간다.
산과 하늘을 가르는 경계는 사라졌다. 삼각형에 가까운 봉우리와 굽은 선이 위에서 아래까지 이어지면서 앞과 뒤의 구분도 느슨해진다. 가까이 다가가면 물감의 두께와 붓이 지나간 자리가 도드라지고, 거리를 두면 흩어져 있던 색띠가 하나의 산맥으로 묶인다.
금빛 선은 모든 봉우리를 온전히 둘러싸지 않는다. 다른 색 아래로 들어가거나 중간에서 끊기고, 능선과 다른 방향으로 지나가는 부분도 있다. 산의 외곽을 정리하기 위한 선보다 작업 도중 남은 움직임에 가깝다.
봉우리의 형태는 비슷하게 반복되지만 높이와 기울기, 색의 조합은 조금씩 달라진다. 같은 모양을 복제하기보다 유사한 동작을 거듭하며 차이를 쌓았다. 산을 알아보는 시선과 색띠의 운동을 따라가는 시선이 한 작품 안에서 번갈아 이어진다.
짙은 파란색과 녹색은 아래쪽에 무게를 싣고, 밝은 분홍색과 살구색은 위쪽과 중앙으로 퍼진다. 자연의 높낮이와 계절을 따르지 않는 색 배열은 산을 실제 장소에서 떼어내 회화의 리듬으로 바꾼다. 작품을 오래 바라볼수록 전체 산맥보다 봉우리마다 다른 붓의 방향과 색의 순서가 드러난다.
작은 색점으로 이어 붙인 두 폭의 산맥
가로로 길게 연결된 두 폭 작업은 작은 색점과 촘촘한 무늬로 산맥을 구성한다. 밝은 윤곽선 안에는 청록색과 초록색, 붉은색과 보라색이 잘게 흩어져 있다. 색점이 밀집한 표면에서는 인쇄물의 망점과 직물의 조직,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을 떠올리게 하는 시각적 밀도가 생긴다.
위쪽에는 분홍색과 밝은 연두색 산이 이어지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남색과 짙은 초록색의 비중이 커진다. 산의 크기보다 명도와 채도가 공간을 나눈다. 밝은 산은 뒤로 물러나고 어두운 산은 앞으로 다가오며 가로로 긴 깊이를 만든다.
밝은 선은 봉우리를 구분하면서도 전체 산맥을 하나로 묶는다.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던 선은 옆 산과 만나거나 갈라지고, 다시 작품 양쪽으로 뻗는다. 하나의 정상을 향해 시선이 모이기보다 여러 층의 산을 따라 좌우로 이동한다.
두 캔버스가 맞닿는 중앙에는 수직의 접합부가 남아 있다. 능선은 경계를 넘어 이어지지만 양쪽의 색점과 무늬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로 이어지는 풍경 안에 중단과 재개의 흔적이 함께 놓인다.
굵은 붓자국을 드러낸 회화가 물감의 이동을 직접 남겼다면, 두 폭 작업은 작은 색 단위를 모아 넓은 산맥을 만들었다. 가까이에서는 흩어진 점과 무늬가 먼저 들어오고, 뒤로 물러나면 각각의 단위가 봉우리와 능선으로 합쳐진다. 작품을 보는 거리와 머무는 시간에 따라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달라진다.
야외에서 촬영한 기록사진에는 두 폭 작업의 가로 길이와 비례가 선명하게 담겼다. 도시 건물과 나무를 배경으로 놓인 산맥은 주변의 실제 풍경과 다른 색채 질서를 만든다. 현실의 나무와 하늘 사이에 분홍색과 청록색 봉우리가 펼쳐지면서 자연을 옮긴 그림과 색으로 다시 구성한 풍경의 차이가 드러난다.
반복과 축적으로 묶인 회화
민트색과 청록색, 분홍색과 연보라색은 전시 작품 전반에 되풀이된다. 능선의 모양도 일정한 연속성을 유지한다. 산은 개별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를 넘어 박한지의 회화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자리 잡는다.
물감을 여러 겹 올려 깊이를 만든 산맥, 굵은 색띠로 캔버스를 채운 구성, 작은 색점과 밝은 윤곽선으로 연결한 두 폭 작업은 같은 산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붓질의 두께와 색의 분포, 선이 움직이는 방향이 달라지면서 작품마다 다른 속도와 밀도가 생긴다.
반복되는 봉우리는 단순한 무늬에 머물지 않는다. 한두 번의 붓질이나 색점으로 작은 산이 만들어지고, 수많은 산이 모여 전체 풍경을 이룬다. 짧은 동작이 쌓여 큰 형상을 만드는 과정이 전시 제목과 맞닿는다.
물감이 두껍게 쌓인 회화에서는 손의 움직임이 직접 드러난다. 굵은 색띠가 이어진 작품에서는 산의 형태와 추상적인 선의 흐름이 맞선다. 촘촘한 색점으로 만든 산맥에는 손으로 그린 회화와 인쇄·디지털 이미지가 지닌 표면의 성격이 함께 겹친다.
산의 외형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남아 있다. 현실의 색과 원근에서 벗어난 구성은 산을 선과 색의 집합으로 바꾼다. 관람자는 봉우리를 본 뒤 붓자국을 살피고, 흩어진 색 사이에서 다시 산의 형태를 찾는다.
유사한 색과 산형이 이어질수록 전시 전체는 빠르게 하나의 연작으로 읽힌다. 개별 회화의 차이는 붓질의 크기와 물감의 두께, 점의 밀도, 가로와 세로의 흐름에서 갈린다. 같은 대상을 거듭 그리면서도 표면과 속도를 달리한 이유가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자연 재현에서 물감의 기록으로
풍경화는 오랫동안 산과 강, 들판의 모습을 옮기는 장르로 자리해 왔다. 박한지의 회화에서는 산이 특정 장소를 설명하는 대상에서 벗어난다. 색을 겹치고 선을 되풀이하는 과정이 앞에 놓이면서 풍경은 작업 시간과 손의 움직임을 담는 구조로 바뀐다.
산의 높이와 계절, 빛의 방향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지 않아도 풍경의 감각은 유지된다. 봉우리와 능선이 산이라는 형태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형상과 추상적인 색띠가 한 작품 안에서 맞물리며 풍경화와 추상화 사이의 경계를 넓힌다.
산을 반복해서 그리는 방식은 최근 회화에서 두드러지는 물성과 제작 과정에 대한 관심과도 닿아 있다. 완성된 이미지보다 물감을 올리고 선을 긋는 행위, 작은 단위를 거듭 쌓는 노동이 작품의 내용으로 들어온다. 빠르게 소비되는 디지털 이미지와 달리 캔버스에는 붓의 압력과 이동 방향, 색이 마른 순서가 물리적인 흔적으로 남는다.
두 폭 작업에 나타난 색점과 격자형 무늬도 회화의 범위를 넓힌다. 붓자국만으로 산을 만들지 않고 인쇄와 직물, 디지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조직을 끌어들였다. 서로 다른 표면을 한 전시에 배치하면서 박한지는 산이라는 소재를 유지한 채 제작 방식의 변화를 드러낸다.
전시 연계 체험 프로그램은 관람과 제작을 연결한다. 아크릴 물감을 캔버스에 쌓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도록 구성해 전시 제목에 담긴 시간을 감상의 언어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작품을 바라보는 시간과 물감을 올리는 시간이 하나의 전시 안에서 이어진다.
물감과 선으로 남긴 시간의 값
‘시간의 가치를 묻다’에서 시간은 지나간 삶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봉우리마다 겹쳐진 색, 중간에서 끊긴 선, 작은 색점이 모인 표면, 두 폭 사이의 접합부가 작업의 시간을 대신 전한다.
작품 앞에 가까이 다가가면 물감의 두께와 색점의 간격이 먼저 들어온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 흩어진 선과 점이 하나의 산맥으로 이어진다. 관람자는 거리를 바꾸며 부분과 전체를 되짚는다. 한눈에 내용을 파악하고 지나가기보다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한 구성이다.
처음에는 밝은 파스텔 색조와 반복된 산형이 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오래 둘수록 먼저 칠한 색과 그 위에 더한 선, 봉우리 사이의 미세한 차이가 드러난다. 박한지가 말하는 시간의 가치는 거창한 상징보다 캔버스에 실제로 남은 반복과 축적에서 형체를 얻는다.
박한지 개인전 ‘시간의 가치를 묻다’는 8월 2일까지 별별갤러리에서 이어진다. 산의 형태를 거듭 그리면서 붓질과 색띠, 작은 색점으로 표면을 달리한 작품들은 하나의 대상을 반복하는 시간이 어떻게 서로 다른 풍경을 만드는지 캔버스 위에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