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문화산업①] 사우디 Vision 2030, 5.1% 문화소비의 손익계산서

가계 지출 2.9%에서 5.1%로…국가 자본이 연 시장, 일상 소비와 민간 수익성 확보 단계로 이동

2026-07-22     최기형 기자
석유 이후의 전략, 사우디와 UAE의 디지털 전환.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최기형기자]사우디아라비아 가계가 문화와 엔터테인먼트에 쓰는 지출 비중은 2025년 보고 주기 기준 5.1%까지 올라섰다. 사우디 Vision 2030이 본격화되기 전 2.9%에 머물렀던 비중이 2024년 4.4%를 거쳐 다시 0.7%포인트 높아졌다. 2030년 목표인 6.0%까지 남은 격차는 0.9%포인트다. 영화관과 공연장 이용이 제한됐던 국가에서 문화·엔터테인먼트 소비가 가계 지출의 주요 항목으로 들어오기까지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5.1%라는 수치는 사우디의 문화 개방이 행사와 시설 확충에 머물지 않고 실제 소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영화관, 공연, 축제, 스포츠, 전시, 테마파크가 빠르게 늘면서 해외로 빠져나가던 여가 지출도 국내로 이동했다. 주말마다 바레인 마나마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이집트 카이로 등으로 향하던 레저 소비를 사우디 안에 붙잡겠다는 정책이 가계 지출 변화로 나타난 셈이다.

공급 확대 속도는 소비 지표보다 더 가팔랐다. 과거 연간 약 200만명에 머물렀던 공공 문화시설 방문객은 2025년 2300만명을 넘어섰다. 2018년 영화 상영 금지 해제 이후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구축된 극장 시장은 52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국제 문화행사 개최 실적도 34건으로 늘어 최종 목표인 40건에 근접했다. 디리야 현대미술 비엔날레, 제다 이슬람 예술 비엔날레, 알울라 와디 알판(Wadi AlFann) 사막 조각 프로젝트 등 전시·시각예술 사업도 함께 확대됐다.

영화관 몇 곳과 국제행사만 늘어난 변화는 아니다. 문화부는 시각예술, 연극·공연예술, 음악, 영화, 패션, 건축·디자인, 음식예술, 문화유산, 박물관, 도서관, 문학·출판·번역을 맡는 11개 전문위원회를 구축했다. 각 위원회는 제작지원과 인력 양성, 공연·상영 허가, 레지던시, 스튜디오, 유통, 국제교류를 분야별로 담당한다. 해외 콘텐츠를 들여와 관객을 모으는 초기 개방에서 창작자와 제작사, 시설, 교육 체계를 함께 구축하는 산업정책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문화·엔터테인먼트 시장을 단기간에 키운 동력은 민간 투자보다 국가 재정이었다. 국부펀드(Public Investment Fund·PIF)가 대형 시설과 프로젝트에 자본을 투입했고, 엔터테인먼트종합청(General Entertainment Authority·GEA)은 공연과 축제, 해외 아티스트 유치, 라이선스 발급을 맡았다. 연간 행사 수는 과거 50회 미만에서 4200회 이상으로 늘었다. 민간 사업자가 수요를 확인한 뒤 공급을 늘리는 통상적인 순서와 달리, 국가가 먼저 시설과 콘텐츠를 공급하고 소비자를 시장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식이었다.

사우디의 인구 구조도 국가 주도 공급 확대와 맞물렸다. 디지털 콘텐츠와 새로운 문화 흐름에 빠르게 반응하는 35세 이하 인구가 전체의 63%를 차지한다. 영화관 재개방과 대형 음악축제, 국제 스포츠, 게임·e스포츠 행사는 오랫동안 제한됐던 청년층의 문화 수요를 빠르게 흡수했다. 새로운 시설과 해외 유명 콘텐츠를 처음 접하면서 나타난 소비 증가가 가계 지출을 단기간에 끌어올렸다.

2.9%에서 5.1%까지의 상승에는 문화시설 개방과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초기 수요가 크게 작용했다. 5.1%에서 6.0%로 가는 과정은 조건이 다르다. 한 번의 호기심과 희소성으로 구입한 공연 티켓이 반복 소비로 이어지려면 가격과 접근성, 콘텐츠 품질, 이동 거리, 가족 단위 이용 편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고가의 국제공연과 대형 스포츠 행사만으로는 다양한 소득 계층의 일상적인 지출을 유지하기 어렵다.

소득 수준에 따른 소비 편차도 확인된다. 가계 평균 지출 비중은 빠르게 상승했지만 문화·엔터테인먼트 소비가 모든 계층에 같은 속도로 확산된 것은 아니다. 고비용 메가 이벤트 중심의 티켓 소비를 넘어 중저가 공연, 지역 영화관, 가족·어린이 프로그램, 전시, 출판, 생활체육처럼 자주 이용할 수 있는 상품과 시설이 늘어야 6.0%에 안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스포츠 참여 확대는 문화·여가 소비가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흐름을 보여주는 지표다. 주 1회 이상 운동하는 생활 스포츠 참여율은 과거 13%에서 2025년 31%로 높아졌다. 공공 녹지와 걷기 트랙이 확충됐고 학교 체육과 여성 스포츠 참여도 확대됐다. 2022년에는 여성 축구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했다. 국제 스포츠 경기 유치와 별개로 국민이 일상에서 이용하는 시설과 프로그램이 증가하면서 문화·스포츠 정책이 생활 습관 변화로 이어졌다.

빠른 시장 확대에는 정부가 흥행 위험을 부담하는 방식도 사용됐다. 해외 아티스트나 대형 행사를 유치할 때 티켓 판매 부진과 재정 손실을 GEA가 보전하는 언더라이팅(underwriting) 구조다. 개방 초기 리야드 공연의 관객 규모와 사회적 수용성을 예상하기 어려웠던 해외 에이전시에는 손실 위험을 낮추는 장치가 됐다. 사우디 정부는 시장 검증에 필요한 시간을 줄이는 대신 국가 예산으로 초기 위험을 떠안았다.

국가가 손실을 보전한 공연과 행사는 관객 수만으로 수익성을 평가하기 어렵다. 출연료와 제작비, 시설 운영비, 마케팅비 가운데 상당 부분이 공공 재정으로 충당됐다면 같은 사업을 민간기업이 독자적으로 반복하기 힘들다. 해외 아티스트와 스포츠 라이선스에 지급한 자금이 사우디 제작사와 기획자, 창작자, 기술 인력의 매출로 이어지지 않으면 문화 지출이 증가해도 산업 내부에 남는 부가가치는 제한된다.

가계 문화·엔터테인먼트 지출이 5.1%까지 높아지면서 정부가 계속 수입 공연과 대형 행사의 손실을 메워야 하는지에 대한 부담도 커졌다. 국가 예산을 투입해 시장을 여는 초기 단계에서는 흥행 위험 보전이 빠른 공급 확대를 가능하게 했다. 관객과 시설이 확보된 뒤에도 같은 방식이 계속되면 민간 사업자가 스스로 수요를 분석하고 비용을 관리할 유인이 약해질 수 있다. 해외 콘텐츠를 구매하는 데 사용된 재정이 로컬 제작과 지식재산권 축적으로 이어지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영화산업에서는 소비 확대가 로컬 제작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2025년 기준 전국 60개 이상의 멀티플렉스에서 520개 이상의 스크린이 운영됐고, 사우디 제작 영화의 자국 박스오피스 매출 점유율은 23%를 넘어섰다. 할리우드와 이집트 수입 영화가 시장 대부분을 차지했던 구조에서 사우디 영화가 유료 관객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극장 수 증가보다 현지 제작 영화가 실제 매출을 올렸다는 사실이 산업 전환을 판단하는 지표에 가깝다.

계절에 따른 수요 편차는 안정적인 수익을 가로막는 변수다. 공연과 축제 일정은 기온이 낮아지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집중된다. 여름 폭염기에는 야외 행사가 줄고 시설 활용도도 낮아진다. 특정 시즌에 매출이 몰리면 공연장과 장비, 인력의 연간 가동률이 떨어지고 민간 사업자의 현금흐름도 불안정해진다. 영화관과 박물관, 게임시설, 실내 체험공간처럼 계절 영향을 적게 받는 상설 시설의 비중이 커져야 연중 소비가 유지될 수 있다.

2030년 목표까지 남은 0.9%포인트는 대형 행사를 추가하는 방식만으로 채우기 어렵다. 다양한 소득 계층이 반복해서 구매할 수 있는 콘텐츠, 수도권 밖에서 이용할 수 있는 상설 시설, 정부의 손실 보전 없이 운영되는 민간기업, 해외 라이선스에 의존하지 않는 로컬 지식재산권의 매출이 뒤따라야 한다.

가계 지출 비중과 방문객 수는 시장이 열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지표였다. Vision 2030 후반부에는 유료 재방문율, 민간 투자 비중, 지역별 소비 격차, 계절별 시설 가동률, 로컬 콘텐츠 매출, 보조금 축소 뒤의 기업 생존율이 더 중요해진다. 사우디 문화산업은 국가가 소비 기회를 공급한 단계를 지나 소비자와 민간기업이 시장을 유지하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