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K-콘텐츠⑥] 아랍어 자막 이후의 현지화, 종교·생활주기·파트너십

문화적 재현 검토부터 라마단 공개 일정까지…흥행을 장기 사업으로 바꾸는 사우디 운영 조건

2026-08-03     전성진 기자
사우디 K-콘텐츠. 사진=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전성진기자]사우디아라비아 소비자는 드라마와 영화, 예능, 애니메이션을 이용하면서 한국어의 생소함을 주요 불편 요인으로 꼽았다. 출판 분야에서는 번역 품질이 가장 큰 제약으로 지목됐다. 한국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은 늘었지만 작품의 의미와 문화적 맥락까지 현지 이용자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과정은 별도의 경쟁력으로 남아 있다.

아랍어 자막을 붙였다는 사실만으로 현지화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인물의 말투와 관계, 직장문화, 가족 호칭, 학교 제도, 음식과 예절처럼 한국 시청자에게 익숙한 설정은 아랍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설명이 빠지기 쉽다. 대사의 의미가 번역돼도 인물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우면 작품의 감정선과 갈등 구조가 약해진다.

사우디 시장에서 자막과 더빙은 작품에 들어가는 첫 통로다. 오역과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반복되면 작품 완성도와 별개로 시청을 중단할 가능성이 커진다. 드라마 제목과 인물 소개, 회차별 줄거리, 장르 분류, 검색어도 아랍어 이용자의 표현 방식에 맞춰야 한다. 이용자는 한국어 원제보다 아랍어 제목과 플랫폼의 작품 설명을 먼저 접한다.

문화적 배경을 보완하는 부가 콘텐츠도 활용 범위가 넓다. 시대극의 신분제도, 한국 학교와 입시문화, 군 복무, 명절, 음식, 직장 내 호칭을 짧은 영상이나 작품 소개, 소셜미디어 콘텐츠로 풀어낼 수 있다. 작품 자체를 바꾸기보다 서사를 이해할 자료를 함께 제공하는 방식이다.

번역 과정에서 원작의 표현을 현지 취향에 맞춰 임의로 고치면 인물과 사건의 인과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 보고서는 원작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언어와 문화적 맥락을 보완하고, 내용 변경보다 작품 이해를 지원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아랍어 자막과 더빙의 품질, 문화적 배경 설명을 하나의 유통 작업으로 묶는 접근이다.

사우디 소비자는 언어뿐 아니라 종교와 지역, 인종, 음식, 성역할, 관습에 대한 표현도 콘텐츠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 작품의 서사가 흥미롭더라도 아랍과 이슬람 문화를 왜곡하거나 희화화한 표현이 포함되면 작품 전체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23년 드라마 '킹더랜드(King the Land)'는 아랍 왕자를 여성 편력이 심한 인물로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중동 시청자와 현지 언론의 반발이 이어졌고 제작사는 해당 표현에 유감을 표했다. 캐릭터 한 명의 설정이 중동과 아랍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제작진의 시선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작품 밖의 논란으로 확대됐다.

2017년 방송된 '죽어야 사는 남자(Man Who Dies to Live)'도 가상의 중동 왕국과 이슬람 문화를 왜곡하고 희화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권에서는 종교·문화적 특성을 장식적인 배경으로만 사용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인물의 의상과 생활 방식, 종교 시설을 구체적으로 묘사할수록 사전 검토의 범위도 넓어진다.

K-팝에서도 종교적 표현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렀다. 씨엘(CL)의 'MTBD' 공연과 영상에서는 이슬람 경전인 꾸란(Quran)의 낭송 일부가 배경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종교적 신성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후 해당 음원을 삭제한 수정 버전이 공개됐다. 음악의 짧은 샘플도 이슬람권에서는 작품 평가와 아티스트 이미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문화 검토는 작품 완성 이후 자막을 제작하는 단계보다 앞서 진행돼야 한다. 시나리오와 캐릭터 설정, 의상, 소품, 배경음, 포스터, 예고편, 소셜미디어 홍보물까지 확인 범위에 들어간다. 제작이 끝난 뒤 문제가 발견되면 장면 수정과 음원 교체, 재편집, 홍보 일정 조정에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현지 문화 전문가와 아랍어 번역가, 플랫폼 편성 담당자가 제작 초기부터 참여하면 수정 범위를 줄일 수 있다. 한국 제작진이 중동 전체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 판단하지 않도록 국가별 차이를 확인하는 절차도 필요하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레바논 등은 언어권을 공유하지만 사회 제도와 미디어 규정, 대중문화 소비환경은 같지 않다.

사우디의 생활주기는 콘텐츠 공개와 마케팅 시점에도 영향을 준다. 라마단과 종교 행사, 기도 시간, 가족 모임이 집중되는 시기에는 영상 이용 시간과 선호 콘텐츠가 평소와 달라질 수 있다. 공개일과 예고편 배포, 라이브 방송, 팬 행사 시간을 한국이나 북미 기준으로 일괄 편성하면 현지 이용자의 실제 활동 시간과 어긋날 수 있다.

라마단은 단순한 마케팅 시즌이 아니다. 낮 시간의 금식과 해가 진 뒤의 식사, 가족·친지 모임이 일상 전반을 바꾸는 기간이다.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콘텐츠의 노출이 늘고, 야간 시간대의 미디어 이용도 달라진다. 같은 작품이라도 공개 시간과 홍보 방식에 따라 도달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

가족 공동 시청 비중이 높은 시장 특성도 편성에 반영된다. 사우디 응답자의 79%는 가족과 영화를 시청하고, 61%는 가족 구성원과 스트리밍 계정을 공유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개인 시청을 전제로 만든 광고와 추천만으로는 실제 이용 단위를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

가족용 콘텐츠만 공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별 연령 등급과 폭력·성적 표현, 종교적 소재에 관한 정보를 정확히 제공하고, 가족 계정 안에서 이용자가 콘텐츠를 구분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플랫폼의 장르 분류와 시청 등급, 작품 소개가 현지 소비자의 선택을 돕는 장치가 된다.

현지 크리에이터와 인플루언서는 작품의 문화적 맥락을 설명하고 이용자를 플랫폼으로 이동시키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단순한 홍보 영상보다 등장인물과 관계, 한국 사회의 배경, 관전 요소를 아랍어로 소개하는 콘텐츠가 작품 이해에 직접 도움이 된다. 광고성 협업 여부와 정보 출처를 명확히 밝히는 운영도 신뢰 형성에 필요하다.

유통은 글로벌 플랫폼과 현지 플랫폼을 병행하는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틱톡은 한국 콘텐츠의 초기 인지도와 신규 이용자 유입을 맡고, 샤히드(Shahid)와 stc TV는 아랍어 서비스와 지역 이용자 기반을 통해 후속 시청을 넓힌다. 글로벌 플랫폼에서 화제가 된 작품이 현지 플랫폼의 한국 콘텐츠 편성으로 이어지면 한 작품의 관심을 다른 작품으로 연결할 수 있다.

CJ ENM은 2025년 리야드에 'CJ ENM 미들이스트(CJ ENM Middle East LLC)'를 설립하고 샤히드와 한국 드라마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2022년 사우디 문화부, 2023년 망가프로덕션(Manga Productions), 2024년 셀라(Sela)와 협력 관계를 구축한 뒤 현지 법인으로 사업 거점을 확대한 흐름이다.

현지 법인은 콘텐츠 판매 창구보다 넓은 역할을 맡는다. 방송과 스트리밍 편성, 공동 제작, 행사, 라이선스, 정부·기업 협력, 문화 검토를 현지에서 상시 조율할 수 있다. 한국 본사에서 계약할 때보다 이용자 반응과 플랫폼 요구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고, 작품 공개 이후 발생하는 번역과 홍보 문제에도 대응하기 쉽다.

현지 파트너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계약 조건도 세밀하게 나눠야 한다. 아랍어 자막과 더빙의 제작 주체, 번역 검수 권한, 플랫폼별 독점 범위, 공개 국가, 마케팅 비용, 이용 데이터 제공, 2차 저작물과 상품화 권리를 계약 단계에서 구분해야 한다. 중동·북아프리카 전역을 하나의 권역으로 묶은 계약은 넓은 유통망을 확보할 수 있지만 국가별 반응과 매출을 세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

플랫폼에서 축적되는 데이터는 현지화의 다음 단계를 결정한다. 작품의 첫 재생과 완주율, 자막·더빙 선택, 검색어, 이탈 회차, 연관 작품 이동을 분석하면 어떤 요소가 시청을 방해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홍보 영상 조회 수보다 본편 재생과 후속 작품 이용으로 이어진 비율이 유통 성과에 가깝다.

종교·문화적 검토도 공개 이후 반응을 기다리는 방식에서 사전 운영체계로 옮겨가야 한다. 제작사와 배급사, 플랫폼, 현지 자문 인력이 시나리오와 마케팅 자료를 나눠 검토하고 수정 필요성과 근거를 기록하면 작품마다 같은 논의를 반복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보고서는 콘텐츠 공개와 홍보 과정에서 종교·문화적 민감성을 사전에 검토하는 체계가 사업 위험을 줄이고 시장 신뢰를 쌓는 데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현지화 수준은 작품을 얼마나 바꿨는지가 아니라 이용자가 원작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편리하게 소비했는지에서 확인된다. 자막과 더빙 오류율, 작품 검색량, 첫 회차 진입률, 완주율, 후속 작품 이동, 이용자 불만, 문화적 논란 발생 여부가 실제 운영 지표가 된다.

사우디에서 K-콘텐츠의 유통망은 넓어졌다. 넷플릭스의 글로벌 확산력과 샤히드·stc TV의 아랍어 이용 기반, 리야드 현지 법인과 기업 협력이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장기 사업의 성과는 아랍어 번역 품질과 문화 검토, 라마단 공개 일정, 가족 시청환경, 현지 계약과 데이터 운영에서 갈린다. 신규 공급 계약과 공동 제작, 현지 인력 채용, 다음 라마단 편성에 실제로 반영되는 운영 변화가 사우디 시장 안착의 후속 지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