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우디 K-콘텐츠, 수출보다 정착 전략

넷플릭스 순위와 행사 관람객을 넘어 후속 시청·유료 전환·현지 계약으로 성과를 재야

2026-07-31     전성진 기자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재설계. 사진= K trendy NEWS DB ⓒ케이 트렌디뉴스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KtN 전성진기자]사우디아라비아의 인터넷 이용률은 99.6%, 한국 드라마 이용 경험률은 82.1%다. 한국 영화 이용 경험률도 82.4%에 이른다. 콘텐츠가 현지 소비자에게 도달하지 못해 생기는 시장은 아니다. 한국 콘텐츠 산업이 확인해야 할 수치는 공개 첫 주 순위보다 한 작품을 본 이용자가 다음 한국 작품으로 이동한 비율이다.

사우디 진출 성과는 오랫동안 화려한 숫자로 제시됐다. 넷플릭스 국가별 순위, 공연 관람객, 소셜미디어 조회 수, 대형 행사 참가 횟수가 시장 확대의 근거로 쓰였다. 모두 의미 있는 지표다. 작품이 처음 알려지고 팬층이 모이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사업의 지속성은 공개 이후에 결정된다. 시청자가 구독을 유지했는지, 후속 작품을 선택했는지, 공연 뒤 음원과 상품을 구매했는지, 현지 플랫폼과 다음 계약이 체결됐는지가 매출의 시간을 늘린다.

2024년 사우디에서는 1810개의 엔터테인먼트 행사가 열렸고 총관람객은 7690만 명에 달했다. 2025년 영화관은 20개 도시 603개 스크린으로 늘었으며 연간 관객 1880만 명을 기록했다. 오프라인 접점이 빠르게 커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행사 방문객 수와 작품별 매출은 서로 다른 지표다. 무료 체험과 관광 방문, 반복 입장을 포함한 총인원만으로 개별 콘텐츠의 수익성을 판단할 수 없다. 행사 이후 스트리밍 증가와 신규 구독, 상품 구매, 재방문까지 집계해야 한국 콘텐츠가 남긴 사업 성과가 드러난다.

사우디 소비자는 한 플랫폼 안에 머물지 않는다. 평균 2.5개 이상의 구독서비스를 이용하며, 해외 영화와 드라마는 넷플릭스(Netflix), 아랍어 콘텐츠와 지역 방송은 샤히드(Shahid)나 stc TV에서 소비하는 조합이 일반적이다. 유튜브와 틱톡, 인스타그램은 작품을 처음 발견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통로다. 스트리밍과 소셜미디어, 통신 결합형 서비스가 작품 발견과 시청, 확산을 나눠 맡는다.

한국 기업의 유통도 한 플랫폼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넷플릭스는 세계 여러 국가에 신작을 동시에 노출하는 데 강하다. 샤히드는 아랍어 자막과 지역 편성, 현지 이용자 기반을 갖췄다. stc TV는 통신 가입자를 스트리밍 이용자로 연결한다. 넷플릭스에서 작품을 발견한 이용자가 샤히드의 한국 드라마 편성과 연관 작품을 통해 후속 시청을 이어가고, 유튜브와 틱톡에서 배우와 음악을 다시 접하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샤히드가 ‘김비서가 왜 그럴까’, ‘선재 업고 튀어’, ‘또 오해영’ 등 한국 드라마 20여 편을 별도 공간에 편성한 이유도 작품 한 편의 흥행보다 연속 소비에 있다. CJ ENM은 2025년 샤히드와 한국 드라마 20편의 중동·북아프리카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개별 작품 판매에서 콘텐츠 묶음 공급과 현지 플랫폼 협력으로 이동한 흐름이다.

아랍어 현지화는 자막 파일을 납품하는 마지막 공정이 아니다. 작품 제목과 인물 소개, 장르 분류, 검색어, 연령 등급이 첫 재생에 영향을 준다. 한국의 가족 호칭과 직장문화, 학교 제도, 군 복무, 명절과 음식은 대사만 번역해 전달하기 어려운 내용도 많다. 원작을 현지 취향에 맞춰 임의로 바꾸기보다 작품의 배경과 인물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는 정보가 함께 제공돼야 한다.

종교와 문화에 관한 검토는 번역보다 앞선다. 사우디 소비자는 언어뿐 아니라 지역과 국가, 인종, 음식, 성역할, 관습에 관한 표현을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킹더랜드’의 아랍 왕자 묘사와 ‘죽어야 사는 남자’의 이슬람 문화 표현, 꾸란 낭송이 들어간 음원 논란은 캐릭터 설정과 배경음 하나가 작품 전체의 신뢰를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남겼다.

문화 검토는 창작을 제한하는 검열 절차와 다르다. 시나리오와 캐릭터, 의상, 소품, 배경음, 포스터, 예고편을 공개 전에 살피는 제작 관리다. 문제가 공개 뒤 발견되면 장면 재편집과 음원 교체, 홍보 중단, 플랫폼 대응에 비용이 들어간다. 현지 문화 전문가와 아랍어 번역가, 플랫폼 편성 인력이 제작 초기부터 참여하면 표현의 정확성과 사업 안정성을 함께 높일 수 있다.

가족 공동 시청도 사우디 시장의 편성과 홍보를 바꾸는 요소다. 사우디 응답자의 79%는 가족과 영화를 함께 보고, 61%는 가족 구성원과 스트리밍 계정을 공유한다고 답했다. 스마트폰 보급과 개인화 추천이 확대돼도 실제 소비 단위에는 가족이 남아 있다. 가족관계와 세대 갈등, 우정, 성장과 화해를 다룬 한국 드라마가 현지에서 넓은 시청층을 확보한 배경도 공동 시청 문화와 맞닿아 있다.

가족 공동 시청을 가족극 선호로 단순화할 이유는 없다. 사우디의 한국 영상물 소비는 로맨스와 가족 서사에서 스릴러, 복수극, 메디컬, 학원 액션, 범죄물로 넓어졌다. 한 작품을 통해 한국식 서사와 배우, 제작 방식에 익숙해진 이용자가 다른 장르로 이동했다. 플랫폼이 확인해야 할 수치도 계정 수에 머물 수 없다. 가족 계정 안에서 어떤 장르가 이어졌는지, 한 작품 이후 다른 한국 작품이 재생됐는지, 완주와 재시청이 얼마나 발생했는지가 더 정확한 소비 정보다.

K-팝 팬덤은 현지 운영의 필요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사우디 팬들은 가사와 영상을 아랍어로 옮기고, 신곡과 공연 정보를 공유하며, 스트리밍과 차트 캠페인을 조직한다. 공연과 팬미팅, 팝업스토어, 굿즈 판매가 더해지면 온라인 관심은 실제 구매로 이동한다. 공식 아랍어 정보가 늦으면 팬 계정이 유통을 대신한다. 팬의 자발성에만 의존할수록 오역과 잘못된 일정도 함께 퍼질 수 있다. 정확한 공식 정보와 지속적인 커뮤니티 운영은 홍보 서비스가 아니라 현지 유통망의 일부다.

드라마와 K-팝은 사우디 소비자가 한국 콘텐츠에 들어오는 출발점이다. 매출의 폭은 게임과 웹툰, 애니메이션, 공연, 캐릭터, 상품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넓어진다. ‘배틀그라운드 모바일’이 블랙핑크와 베이비몬스터를 게임 안의 가상 공연과 전용 아이템으로 연결한 방식, 웹툰 원작이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로 확장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작품과 아티스트를 장르별 상품으로 나눠 공급하는 대신 하나의 지식재산권 안에서 소비 시간을 늘려야 한다.

라마단과 종교 행사, 가족 모임이 집중되는 시간대는 콘텐츠 공개와 홍보 일정에도 반영돼야 한다. 한국과 북미 기준으로 신작과 라이브 방송 시간을 일괄 결정하면 현지 이용자의 생활시간과 어긋날 수 있다. 라마단 기간의 공개 시점, 야간 이용, 가족 시청, 현지 크리에이터 협업을 편성 단계에서 함께 조정해야 한다. 현지화는 번역 언어를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사우디 이용자가 콘텐츠를 만나는 시간과 장소, 플랫폼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현지 파트너십도 단순 판매 계약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자막과 더빙의 제작 주체, 번역 검수 권한, 독점 범위, 공개 국가, 마케팅 비용, 이용 데이터, 상품화 권리를 계약서에 나눠 담아야 한다. CJ ENM이 리야드 현지 법인을 설립하고 샤히드, 사우디 문화부, 망가프로덕션(Manga Productions), 셀라(Sela)와 협력 관계를 넓힌 흐름은 수출 창구를 현지 운영 거점으로 바꾸는 움직임에 가깝다.

성과 지표도 달라져야 한다. 넷플릭스 순위와 영상 조회 수는 진입 속도를 알려준다. 완주율과 후속 작품 시청, 유료 전환, 구독 유지, 상품 구매, 행사 재방문, 라이선스 계약은 정착 수준을 알려준다. 플랫폼에 축적된 검색어와 이탈 회차, 자막·더빙 선택, 연관 작품 이동을 분석하면 다음 작품의 편성과 현지화를 더 정밀하게 설계할 수 있다.

사우디는 더 많은 한국 콘텐츠를 보내면 자연스럽게 커지는 수출시장이 아니다. 넷플릭스에서 작품을 발견한 이용자가 아랍어로 내용을 이해하고, 현지 플랫폼에서 후속작을 보고, 팬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나누며, 공연과 상품을 구매한 뒤 다음 작품까지 기다리게 만드는 운영시장이다.

한 번의 순위와 공연 흥행은 진입을 알린다. 후속 시청과 반복 구매, 현지 계약과 공동 제작은 정착을 만든다. 사우디 K-콘텐츠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진출 전략이 아니다. 이미 열린 시장 안에서 오래 소비되고 다시 계약되는 정착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