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lier]최혜정 ‘액체정원’, 검은 원형 군집에 응고된 개화의 시간

에폭시 수지와 안료로 구축한 2021년작…유동과 경화, 자연과 인공 사이에서 달라지는 검은 정원

2026-07-29     박준식 기자
액체정원 최혜정 2021 • Epoxy resin and pigments on panel

[KtN 박준식기자]크기와 형태가 다른 꽃들이 검은 패널 중앙에서 거대한 원형 군집을 이룬다. 짙은 검정에 잠긴 꽃과 회색빛으로 떠오른 꽃, 투명한 가장자리에 빛을 머금은 꽃이 빈틈을 좁히며 이어진다. 멀리서는 하나의 둥근 덩어리가 먼저 들어오지만 가까이에서는 꽃잎의 겹침과 표면의 광택, 높낮이의 차이가 차례로 드러난다.

최혜정(CHOI HyuJung)의 2021년작 ‘액체정원’은 패널에 에폭시 수지와 안료를 사용한 작업이다. 흐르는 액체였던 수지는 일정한 시간 뒤 단단한 물질로 굳는다. 작품명은 완성된 정원의 외형보다 유동적인 재료가 수많은 꽃의 형태로 응고되는 제작 과정에 닿아 있다.

꽃 형상들은 식물도감처럼 종류별로 구분되지 않는다. 장미를 연상시키는 겹꽃과 가느다란 꽃잎이 방사형으로 퍼진 형태, 작은 단위가 촘촘하게 모인 형태가 뒤섞여 있다. 자연의 꽃을 정확하게 재현하기보다 개화한 식물에서 추출한 곡선과 주름, 반복 구조를 변주한 군집에 가깝다.

원형 군집의 중앙에는 크고 짙은 꽃들이 집중됐다. 깊게 겹친 꽃잎과 검은 안료가 패널의 바탕과 맞물리면서 개별 형상의 경계를 흐린다. 외곽으로 갈수록 작은 꽃과 투명도가 높은 형태가 늘어나고, 둥근 윤곽도 비교적 가볍게 풀린다. 중심의 응축된 밀도가 가장자리에서 점차 분산되는 구성이다.

꽃 사이를 채운 작은 입자와 점 형태도 원의 밀도를 높인다. 큰 꽃이 만든 틈을 미세한 단위들이 메우면서 군집은 느슨한 꽃다발보다 독립된 하나의 물질처럼 결속된다. 개별 꽃을 감상하던 시선도 점차 원 전체의 농도와 표면으로 이동한다.

검정은 꽃의 색을 제거하는 동시에 형태를 새롭게 분류한다. 붉은 장미나 흰 국화처럼 식물의 종류를 알아보게 하는 색채가 사라지고, 꽃잎의 두께와 굴곡, 광택과 투명도가 앞에 놓인다. 색을 줄인 자리에서 수지의 물성과 빛의 반응이 더 선명해진다.

같은 검정도 하나의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빛을 흡수하며 바탕 속으로 가라앉는 검정이 있고, 유리나 광물처럼 반사광을 내는 검정도 있다. 반투명한 꽃잎 가장자리에서는 회백색의 윤곽이 살아나고, 깊은 꽃술과 주름은 다시 어둠 속으로 물러난다.

광택을 띤 에폭시 표면은 조명의 위치와 관람 각도에 따라 가시성을 바꾼다. 한순간 선명했던 꽃은 빛이 비껴가면 바탕과 섞이고, 거의 보이지 않던 윤곽은 반사광이 닿는 순간 앞으로 떠오른다. 형태는 굳어 있지만 관람 경험은 고정되지 않는다.

‘액체정원’의 검은색을 죽음이나 애도의 기호로 곧바로 제한하면 재료가 만드는 변화가 가려진다. 꽃들은 어둡지만 표면은 지속적으로 빛을 받아낸다. 짙은 형상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과정은 정지와 소멸보다 잠김과 출현의 반복에 가깝다.

자연의 꽃은 개화한 뒤 시들고, 형태를 잃으며, 다시 다른 생명의 조건으로 돌아간다. 수지로 굳힌 꽃은 생물학적 변화를 멈춘 채 만개한 외형을 유지한다. 성장과 쇠퇴가 제거된 정원에는 자연을 보존하려는 욕망과 자연의 시간을 인공적으로 중단한 상태가 함께 남는다.

보존된 꽃은 살아 있는 식물을 대신하지 않는다. 향기와 수분, 계절의 변화가 사라진 자리에 단단한 표면과 반사광이 들어섰다. 꽃의 외관을 유지하면서 생명의 조건은 다른 물질로 교체됐다. 유기적 형태와 합성수지의 인공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지점이다.

에폭시 수지는 작품 안에서 재료인 동시에 시간의 단서가 된다. 액체 상태에서는 흘러내리고 섞이지만 경화가 시작되면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꽃잎의 굴곡과 표면에 남은 투명한 층은 수지가 움직일 수 있었던 마지막 상태를 고정한다.

‘액체’와 ‘정원’의 결합도 이러한 시간 차이에서 성립한다. 정원은 계절과 성장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공간이지만, 에폭시로 만든 정원은 변화 직전의 순간을 붙잡는다. 제목은 흐르는 재료와 고정된 결과, 생장하는 자연과 멈춘 인공물 사이의 간극을 압축한다.

원형 구성은 군집을 하나의 폐쇄된 영역으로 묶는다. 꽃들은 검은 패널 전체로 번지지 않고 둥근 경계 안에 모여 있다. 넓게 남은 바깥의 검정은 정원을 둘러싼 어둠이면서 꽃의 군집을 독립된 표본처럼 떼어 놓는 공간이다.

둥근 외곽은 완벽한 기하학적 원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작은 꽃들이 가장자리에서 조금씩 돌출되고 물러나며 유기적인 진동을 만든다. 전체 형태는 원을 유지하지만 세부 윤곽은 식물이 번식하듯 불규칙하게 흔들린다.

꽃의 반복이 장식적인 풍성함으로 기울 수 있는 구도에서 검은 단색은 시선의 속도를 늦춘다. 모든 형상이 즉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관람자는 밝은 꽃에서 짙은 꽃으로, 매끄러운 표면에서 거친 표면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장식성은 한눈에 소비되는 화려함보다 천천히 분별해야 하는 물질적 밀도로 바뀐다.

크기와 높이가 다른 형상들은 패널 표면에 실제 그림자를 만든다. 안료로 조절한 명암과 돌출된 수지가 만드는 음영이 겹치면서 회화적인 깊이와 부조적인 깊이가 동시에 생긴다. 꽃은 그려진 이미지이면서 빛을 막고 반사하는 물체로 존재한다.

검은 패널 위에 구축된 원형 군집은 정원의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흙이나 줄기, 잎과 주변 공간은 사라지고 개화한 형태만 밀집해 있다. 자연환경을 재현한 정원보다 꽃이라는 단위를 수집하고 배열한 인공적 생태계에 가깝다.

‘액체정원’의 조형적 성취는 많은 꽃을 한곳에 모은 규모보다 서로 다른 검정을 조직한 방식에서 나온다. 불투명과 반투명, 흡광과 반사, 매끄러움과 거친 입자가 같은 원 안에서 미세한 차이를 만든다. 제한된 색채 안에서 형태와 표면의 변주가 작품의 깊이를 넓힌다.

최혜정의 정원에는 바람도 계절도 없다. 액체였던 수지는 꽃의 형태로 굳었고, 개화는 끝나지 않는 상태로 보존됐다. 생물학적 시간은 멈췄지만 검은 표면을 스치는 빛은 꽃을 계속 나타나게 하고 다시 잠기게 한다. ‘액체정원’은 영원히 피어 있는 꽃밭보다 유동성과 고정성,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교대하는 물질의 정원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