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 산탄데르 개관전, 기업 컬렉션 개방과 겔만 소장품 논란

9월 8일 스페인 북부 옛 은행 본사에서 개관…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레오노라 캐링턴 앞세운 전시 편성, 소장품 이동의 투명성도 쟁점

2026-07-29     임민정 기자
스페인 산탄데르 해안 도심과 페레다 빌딩. 방코 산탄데르의 옛 본사가 파로 산탄데르로 바뀌었다.

[KtN 임민정기자]스페인 북부 산탄데르 해안에 자리한 방코 산탄데르의 옛 본사가 오는 9월 8일 문화시설로 문을 연다. 방코 산탄데르 재단은 페레다 빌딩을 개조한 파로 산탄데르(Faro Santander)의 개관 프로그램으로 은행 자체 컬렉션전과 멕시코 현대미술전,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전을 내놓는다.

티치아노와 엘 그레코, 프란시스코 데 고야부터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니키 드 생팔까지 작가 명단은 폭넓다. 1000점이 넘는 기업 소장품과 국제적으로 알려진 민간 컬렉션, 산탄데르 체류 경험을 지닌 작가의 연구 전시를 한 건물에 배치했다.

개관 프로그램에는 최근 미술관 운영에서 두드러지는 흐름이 함께 담겼다. 기업이 보유한 건축물과 미술품을 문화 콘텐츠로 재편하고,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 초반 관심을 확보하며, 지역의 역사와 연결된 전시로 기관의 정체성을 만드는 방식이다. 겔만 컬렉션의 소유 구조와 해외 이동을 둘러싼 반발까지 개관 전부터 불거지면서 작품의 가치뿐 아니라 수집과 대여, 반출 과정의 투명성도 전시 평가에서 비중이 커졌다.

옛 본사를 문화시설로 바꾼 방코 산탄데르

파로 산탄데르가 들어선 페레다 빌딩은 방코 산탄데르가 약 한 세기 동안 본사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의 역사는 17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방코 산탄데르는 2018년 본사 이전 계획을 발표하며 페레다 빌딩을 도시에 개방하겠다고 밝혔고, 2021년부터 개조 작업을 진행했다.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는 업무시설이던 내부를 10개 층, 약 1만㎡ 규모의 문화공간으로 바꿨다. 전시장과 기술 프로젝트 공간, 칸타브리아 지역 작가를 위한 구역, 옥상 전망대 등이 들어섰다.

은행 사옥의 문화시설 전환은 폐쇄적인 기업 공간에 시민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든다. 마드리드 외곽에 자리한 기존 전시 공간보다 산탄데르 도심과 해안에 접한 페레다 빌딩의 접근성도 높다.

공공 개방은 기업이 얻는 효과와 분리하기 어렵다. 방코 산탄데르는 역사적 건축물과 소장 미술품, 재단 사업을 파로 산탄데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묶었다. 시민은 건물과 작품을 이용하고, 은행은 옛 본사를 기업 문화사업의 중심 공간으로 다시 활용한다. 문화 환원과 기업 브랜드 재편이 같은 사업 안에서 진행되는 구조다.

방코 산탄데르 컬렉션은 단일한 수집 계획에 따라 형성되지 않았다. 은행이 1980년대 이후 여러 금융기관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각 기관이 보유하던 미술품과 문화재가 편입됐다. 회화와 조각, 장식미술뿐 아니라 기원전 2세기 화폐까지 포함한 1000점 이상의 소장품이 여러 시대와 장르에 걸쳐 있는 배경이다.

기존 컬렉션은 규모에 비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작품이 공개돼 온 전시장이 마드리드 외곽의 방코 산탄데르 시설 안에 자리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파로 산탄데르는 기업 내부에 머물렀던 소장품을 도심 문화 프로그램으로 옮기는 첫 대규모 무대가 된다.

고전과 현대를 섞은 자체 컬렉션전

개관전 ‘방코 산탄데르 컬렉션의 걸작’은 소장품을 연대순으로 나열하지 않는다. 스페인 미술사학자 마리아 돌로레스 히메네스블랑코(María Dolores Jiménez-Blanco)는 종교와 영성, 장소와 풍경, 사물과 정물, 초상과 인물 등 네 부문으로 작품을 나눴다.

티치아노와 엘 그레코의 종교화, 카날레토의 도시 풍경, 고야의 초상화가 소레다드 세비야(Soledad Sevilla)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의 근현대 작품과 함께 전시된다. 동일한 주제를 서로 다른 시대의 작가들이 다룬 방식을 비교하는 구성이다.

소레다드 세비야, ‘중동’(Medio Oriente, 1999), 캔버스에 유채, 방코 산탄데르 컬렉션.

소레다드 세비야의 ‘중동’은 녹색과 황색의 짧은 붓질을 겹쳐 식물과 수면, 빛을 추상적으로 구성한다. 구체적인 장소와 대상을 재현한 고전 풍경화 옆에 배치될 경우 시대와 양식의 차이보다 자연을 인식하고 회화로 옮기는 방식의 차이가 부각된다.

주제별 배열은 형성 배경이 서로 다른 기업 소장품을 하나의 전시로 엮는 데 유리하다. 인수와 합병을 통해 편입된 작품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고전 미술 중심의 컬렉션을 현대 관객의 관심에 맞춰 다시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컬렉션의 형성 과정은 상대적으로 희미해질 수 있다. 작품이 어느 금융기관에서 수집됐으며 어떤 인수·합병 과정을 거쳐 방코 산탄데르 소유가 됐는지는 작품의 시대와 주제만큼 중요한 기록이다.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미술사적 서사에 집중할수록 기업 자산의 이동을 통해 만들어진 컬렉션이라는 성격은 전시장 뒤로 밀릴 가능성이 있다.

파로 산탄데르가 소장품을 지속적으로 교체해 공개할 계획인 만큼 후속 전시에서는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와 함께 수집 주체와 편입 경로도 다룰 필요가 있다. 기업 컬렉션의 공공성은 전시장 문을 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소장품이 형성된 역사까지 어느 수준으로 공개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프리다 칼로를 앞세운 ‘현대 멕시코’

‘겔만 산탄데르 컬렉션의 현대 멕시코’는 개관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한 전시다. 겔만 컬렉션은 약 300점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 가운데 멕시코 현대미술 작품은 95점이다.

유럽에서 멕시코로 이주한 자크 겔만(Jacques Gelman)과 나타샤 겔만(Natasha Gelman)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비롯한 당대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칼로의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과 리베라의 ‘칼라꽃 판매상’ 등 1943년 작품도 컬렉션에 포함됐다.

산탄데르 전시는 멕시코시티 현대미술관에서 먼저 열린 전시와 상당 부분 겹칠 것으로 알려졌다. 멕시코에서는 겔만 컬렉션 가운데 68점이 약 20년 만에 공개됐다. 산탄데르에서도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가 전시 인지도를 높이는 중심 작가로 배치된다.

프리다 칼로, ‘원숭이들과 함께한 자화상’(Self-Portrait with Monkeys, 1943), 겔만 산탄데르 컬렉션.

‘원숭이들과 함께한 자화상’에는 흰색 의상을 입은 칼로와 네 마리 원숭이, 넓은 잎을 지닌 식물이 밀집해 있다. 인물의 얼굴과 눈썹, 원숭이와 열대 식물은 한 작품만으로도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다. 개관 미술관이 국제적인 관심을 확보하는 데 활용하기 쉬운 이미지이기도 하다.

전시 제목은 프리다 칼로가 아니라 ‘현대 멕시코’를 내세운다. 칼로와 리베라의 인지도를 입구로 삼고, 마리아 이스키에르도와 루피노 타마요,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등으로 범위를 넓히려는 구성이다.

유명 작가를 앞세운 전시는 관객의 접근성을 높이는 동시에 전시 전체를 소수의 이름에 종속시킬 수 있다. 홍보 이미지와 보도가 칼로의 자화상에 집중될수록 멕시코 현대미술은 다시 칼로와 리베라 중심으로 좁아질 가능성이 크다. 다른 작가의 작품이 독립적인 맥락을 확보하지 못하면 ‘현대 멕시코’라는 제목과 실제 관람 경험 사이에도 간격이 생긴다.

디에고 리베라, ‘나타샤 겔만의 초상’(Portrait of Natasha Gelman, 1943), 겔만 산탄데르 컬렉션.

리베라의 ‘나타샤 겔만의 초상’에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수집가가 어두운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뒤편을 채운 대형 칼라꽃과 길게 펼쳐진 드레스 자락이 인물을 강조한다.

초상화에는 작가와 수집가의 관계도 기록돼 있다. 겔만 부부는 이미 미술사적 평가가 끝난 작품을 후대에 사들인 수집가가 아니라 당대 작가들과 교류하며 작품을 구입했다. 나타샤 겔만의 초상은 멕시코 현대미술 작품인 동시에 수집가가 컬렉션 내부에서 차지한 위치를 드러내는 결과물이다.

민간 수집가가 선택한 작품군을 국가 미술사의 대표 서사로 제시할 때는 수집 범위도 함께 살펴야 한다. 겔만 컬렉션은 멕시코 현대미술 전체가 아니라 겔만 부부의 취향과 인적 관계, 활동 시기를 반영한다. 작가 명단의 규모만으로 한 국가의 미술사를 대신하기는 어렵다.

겔만 컬렉션의 소유와 반출 논쟁

겔만 컬렉션은 현재 멕시코 잠브라노 가문이 소유하고 있으며 방코 산탄데르 재단이 관리를 맡고 있다. 소유권과 관리 주체가 달라진 뒤 국제 순회가 추진되면서 멕시코 문화계에서는 반발이 나왔다.

비판은 크게 두 갈래다. 겔만 부부가 컬렉션을 멕시코에 남기려 했던 뜻과 해외 순회가 충돌한다는 주장, 멕시코의 문화재 수출 규정이 적용되는 과정이 충분히 공개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현재 공개된 자료만으로 해외 반출의 위법성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비판이 제기됐다는 사실과 법률 위반 여부는 구분해 다뤄야 한다.

다만 적법한 임시 반출 여부만으로 논쟁이 끝나지는 않는다. 개인이 소유한 작품이라도 국가 문화유산으로 관리되는 경우 대여 기간과 수출 허가, 보존 조건, 귀환 일정은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민간 컬렉션을 관리하고 국제 전시를 운영하는 방코 산탄데르 재단도 관련 내용을 설명할 책임을 함께 지게 됐다.

겔만 컬렉션은 파로 산탄데르에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라는 강력한 작가 이름을 제공한다. 반대편에서는 컬렉션이 어떤 계약과 허가에 따라 이동하는지, 해외 체류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멕시코 귀환이 어떤 방식으로 보장되는지를 밝혀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작품의 출처와 이동 경로를 둘러싼 검증은 최근 국제 전시에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작품의 진위와 미술사적 중요성이 전시 평가의 중심이었다면, 현재는 소유권과 대여 조건, 식민지기 유출과 강제 매각, 문화재 수출 절차까지 검토 범위가 넓어졌다.

파로 산탄데르의 겔만 컬렉션전은 2027년 1월 10일까지 열린다. 전시 기간이 명확하게 제시됐더라도 소장품 관리 계약과 이후 이동 일정이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다면 논란은 전시장 밖에서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

레오노라 캐링턴으로 연결한 산탄데르의 역사

‘증상적 초현실주의: 레오노라 캐링턴’은 런던 프로이트 박물관에서 지난 3월 개막한 전시의 스페인 전개다. 1938년부터 1941년 사이 캐링턴이 남긴 스케치북과 편지, 회화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캐링턴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산탄데르 인근 의료시설에 수용됐다. 파로 산탄데르 전시는 입원 시기에 제작한 두 점의 회화를 한자리에 모은다. 관련 자료와 작품을 제작지에서 다시 공개한다는 점에서 방코 산탄데르 컬렉션전이나 겔만 컬렉션전과 성격이 다르다.

대형 기업 컬렉션과 유명 민간 소장품만으로 개관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면 파로 산탄데르는 방코 산탄데르가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자산을 공개하는 공간에 머물 가능성이 컸다. 캐링턴전은 산탄데르라는 장소와 작가의 생애를 연결하며 조사와 연구의 성격을 더한다.

레오노라 캐링턴도 국제 미술계에서 인지도가 높은 작가다. 지역 연고를 갖춘 전시라고 해서 스타 작가 중심의 편성에서 벗어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전시의 연구 성과는 새로 공개되는 작품과 자료의 범위, 동반 출판물, 작가의 의료 경험을 다루는 방식에서 확인돼야 한다.

캐링턴의 정신적 고통과 시설 수용 경험을 초현실주의 작품의 극적인 배경으로만 소비할 위험도 있다. 질병과 치료 경험을 천재 작가의 신화로 단순화하지 않고 당시 의료 환경과 전쟁, 이동의 조건까지 다뤄야 산탄데르 체류기의 역사적 맥락이 살아난다.

화려한 개관전 뒤에 남은 운영 기준

파로 산탄데르는 전시장뿐 아니라 기술 공간과 지역 작가 구역, 옥상 전망대 등을 갖춘 복합문화시설로 출발한다. 작품 감상과 공연, 교육, 관광을 한 건물에 결합해 방문 목적과 체류 시간을 넓히는 방식이다.

복합문화시설의 규모가 커졌다고 미술관의 연구와 보존 기능까지 자동으로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 작가 공간의 선정 절차와 운영 기간, 전시 교체 주기, 연구 인력과 예산이 공개돼야 실제 기능을 판단할 수 있다. 옥상 전망대와 건축물이 작품보다 더 큰 방문 동기가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개관 프로그램 세 편은 서로 다른 필요를 나눠 맡는다. 방코 산탄데르 컬렉션전은 은행이 축적해 온 자산을 공개하고, 겔만 컬렉션전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로 국제적 관심을 모은다. 레오노라 캐링턴전은 산탄데르의 역사와 연결된 연구 전시를 보탠다.

화려한 작가 명단만으로 새 문화기관의 성격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방코 산탄데르 소장품의 편입 경로와 겔만 컬렉션의 관리 계약, 해외 이동 조건, 지역 작가 프로그램의 지속성이 개관 이후 파로 산탄데르를 평가하는 구체적인 기준이 된다.

파로 산탄데르는 9월 8일 개관한다. 겔만 컬렉션전과 레오노라 캐링턴전은 2027년 1월 10일까지 이어진다. 기업 자산의 공공 개방이라는 설명이 실제 운영으로 이어지는지는 이후의 전시 교체와 자료 공개, 소장품 이동 기록에서 확인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