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산업, 권력의 이동⑥] 생성형 AI 이후, 제작보다 비싸진 발견과 신뢰
제작비·기간 낮아져 콘텐츠 공급 급증…IP·브랜드·추천·권리 관리로 옮겨간 경쟁축
[KtN 최기형기자]텍스트를 영상으로 바꾸고, 짧은 영상을 자동으로 제작하며, 실재 인물과 구분하기 어려운 가상 배우를 구현하는 도구가 콘텐츠 제작의 진입비용을 낮추고 있다. 아이디어 구상과 스토리보드, 촬영 준비, 편집과 후반 작업에 걸리던 시간도 줄어들 수 있다. 대규모 스튜디오가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영상물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 열리면서 제작 능력 자체가 갖던 희소성은 약해지고 있다.
딜로이트 인사이트가 2026년 5월 발간한 ‘글로벌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산업 동향 및 트렌드’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콘텐츠 창작 장벽을 낮추고 제작 전 과정의 속도와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초기에는 산업 전체를 한꺼번에 바꾸기보다 제작비 절감과 생산성 개선, 출시 기간 단축을 중심으로 현장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이다.
제작비가 낮아지면 시장에 나오는 콘텐츠 수는 늘어난다. 과거에는 제작 장비와 전문 인력, 유통망을 보유한 기업이 영상 공급을 주도했다. 생성형 AI를 활용하면 개인 크리에이터와 독립 제작사도 더 많은 기획을 동시에 진행하고, 여러 형태의 영상을 빠르게 시험할 수 있다. 작은 조직이 규모의 한계를 일정 부분 넘을 수 있게 되는 변화다.
생산량 증가가 곧바로 흥행 확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용자가 하루 동안 소비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다. 작품 수가 늘어날수록 각각의 콘텐츠가 확보할 수 있는 평균적인 관심은 줄어들 수 있다. 제작 비용을 낮추는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 경쟁은 영상을 만드는 단계보다 수많은 영상 가운데 특정 작품을 선택하게 만드는 단계에서 더 치열해진다.
콘텐츠 산업에서 비싸지는 자원도 달라진다. 촬영과 편집에 들어가는 비용이 줄어드는 대신 이용자의 주목, 추천 공간, 신뢰받는 브랜드, 검증된 지식재산(IP)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 제작 도구를 여러 기업과 창작자가 비슷하게 사용할수록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작품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가 차이를 만든다.
기존 미디어 기업은 생성형 AI가 바로 복제하기 어려운 자산을 갖고 있다. 축적된 IP와 창작 인력, 배우·작가·감독과의 관계, 브랜드 인지도, 유통 경험이 포함된다. 생성형 AI를 기존 자산의 대체 수단으로만 사용하기보다 기획과 제작을 보조하고 팬의 참여 범위를 넓히는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독립 제작사와 크리에이터에게는 다른 기회가 열린다. 많은 제작비를 확보하지 못해 실행하기 어려웠던 장르와 시각적 표현을 시험할 수 있고, 한 번에 여러 기획안을 영상으로 구현해 반응을 비교할 수도 있다. 제작 실패에 따른 비용 부담이 낮아지면 기존 스튜디오가 선택하지 않았던 소재와 형식이 시장에 나올 여지도 커진다.
도구 접근성이 높아질수록 기술 자체를 차별화 요소로 내세우기는 어려워진다. 비슷한 이미지와 영상, 음악이 빠르게 늘어나면 이용자는 제작 방식보다 이야기와 인물, 창작자의 관점, 작품이 쌓아온 신뢰를 기준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커진다. 기술을 사용했다는 사실보다 기술로 어떤 가치를 더했는지가 평가 대상이 된다.
생성형 AI는 반복 작업을 줄이는 데 먼저 쓰일 수 있다. 여러 언어의 자막과 더빙 초안, 영상 요약, 예고편의 다양한 편집본, 장면 분류, 자료 검색, 후반 작업 보조가 적용 가능한 영역이다. 제작사는 창작자의 최종 판단이 필요한 부분과 자동화가 가능한 부분을 나눠야 한다. 비용 절감 수치만 앞세우면 작품의 완성도와 노동 환경에서 발생한 변화를 놓칠 수 있다.
절감된 비용이 어디로 이동하는지도 중요하다. 후반 작업비가 줄어든 만큼 개발과 집필, 출연자 보상에 더 투자할 수 있다. 반대로 전체 예산과 인력을 함께 줄이는 방식으로 적용하면 제작 현장의 일자리와 전문성 축적이 약해질 수 있다. 생성형 AI 도입의 성과는 사용한 도구의 수보다 제작기간과 비용, 수정 횟수, 인력 구성, 최종 작품의 성과를 함께 비교해야 확인할 수 있다.
팬을 위한 파생 콘텐츠는 AI 활용이 빠르게 확장될 수 있는 분야다. 본편 전체를 다시 제작하지 않고도 특정 인물과 주제에 맞춘 요약 영상, 스포츠 하이라이트, 과거 IP의 편집본을 만들 수 있다. 보고서에 인용된 조사에서 팬의 약 30%는 선호하는 프로그램과 소셜 콘텐츠, 팟캐스트, 배우 관련 소식을 묶은 개인화 요약을 원한다고 답했다. 스포츠 팬의 32%는 선호 팀과 선수를 반영한 하이라이트와 해설을 희망했다.
팬이 원하는 콘텐츠를 자동으로 조합하는 서비스는 공개 공백기의 소비를 늘릴 수 있다. 새 시즌과 영화가 나오지 않는 기간에도 과거 영상과 인터뷰, 주요 대목을 다시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IP가 공식 공개 일정에 묶이지 않고 다양한 길이와 형식으로 재소비되는 구조다.
개인화가 확대되면 팬이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서로 다른 편집본과 추천을 받을 수 있다. 특정 배우를 선호하는 이용자에게는 해당 인물 중심의 영상이, 서사 분석을 원하는 이용자에게는 관련 해설과 인터뷰가 제시될 수 있다. 팬의 관심과 시청·구매 이력을 바탕으로 콘텐츠와 광고, 상품을 함께 추천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보고서 조사에서 팬의 22%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생성형 AI로 더 개인화된 추천을 제공하면 해당 서비스를 더 많이 이용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팬의 약 24%는 생성형 AI와 함께 드라마나 영화의 대체 결말을 만드는 형태의 공동 창작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공동 창작은 팬 참여를 늘리는 동시에 IP 관리의 범위를 넓힌다. 이용자가 작품 속 인물과 배경, 목소리를 활용해 영상을 만들 경우 창작 허용 범위와 상업적 이용 기준이 필요하다. 팬이 만든 결과물을 플랫폼이 광고와 유료 상품에 활용한다면 수익 배분과 권리 귀속도 정해야 한다.
배우와 가수, 성우의 얼굴과 목소리는 별도의 관리 대상이다. 생성형 AI가 특정 인물의 외모와 음성을 재현할 수 있게 되면 출연 계약이 촬영 기간과 완성된 작품에만 머물기 어렵다. 학습과 복제, 수정, 다른 언어 적용, 후속 콘텐츠 제작까지 허용 범위를 구체적으로 나눠야 한다.
창작자가 제공한 작품이 AI 학습에 사용됐는지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학습 데이터의 출처가 불명확하면 제작물의 권리관계도 불안정해진다. 기업이 생성형 AI를 제작 과정에 투입하려면 사용한 모델과 데이터, 결과물 검수, 제3자의 권리 침해 가능성을 기록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AI 제작 사실의 표시도 신뢰에 영향을 준다. 보고서 조사에서 팬의 약 40%는 AI가 만든 콘텐츠라는 사실이 명확히 표시된다면 스트리밍과 소셜미디어, 음악, 게임에서 수용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수용 의향의 전제가 명확한 고지였다는 점에서 기술 수준만큼 투명성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표시는 단순한 문구에 그치지 않는다. 전체 영상을 AI로 생성했는지, 일부 이미지와 음성만 사용했는지, 인간 창작자가 어느 단계에서 수정하고 승인했는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AI 활용’이라는 하나의 표기만으로는 제작 과정과 책임 범위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콘텐츠 공급이 급증하면 발견(discovery) 기능이 플랫폼 경쟁의 중심으로 올라온다. 이용자는 작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선택지가 너무 많아 원하는 콘텐츠를 찾지 못할 수 있다. 추천 시스템과 검색, 편집자의 큐레이션, 팬 커뮤니티의 평가가 제작물과 이용자를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플랫폼은 어떤 콘텐츠를 먼저 보여줄지 결정하면서 사실상 흥행의 초기 조건을 배분한다. 생성형 AI로 대량 생산한 영상이 추천 공간을 차지하면 상당한 제작비와 창작 기간을 들인 작품도 충분한 노출을 얻지 못할 수 있다. 반대로 플랫폼이 기존 인기 IP와 반응이 검증된 형식만 우선하면 새로운 창작자가 이용자에게 도달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보고서는 AI 생성 콘텐츠가 소셜피드와 플랫폼을 채우면서 이용자 피로가 쌓이고 고품질 콘텐츠가 묻힐 가능성을 미래상으로 제시했다. 콘텐츠 공급이 늘어날수록 원하는 작품을 찾아주는 발견 기능, 오디언스의 신뢰, 데이터 투명성이 플랫폼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전망도 포함됐다.
AI가 만든 콘텐츠의 품질을 일률적으로 낮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인간 창작자가 AI를 활용해 완성도를 높일 수 있고, 기존 방식으로는 제작하기 어려웠던 표현을 구현할 수도 있다. 이용자 피로는 AI 사용 여부보다 비슷한 형식의 반복과 낮은 검수 수준, 과도한 공급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창작물의 출처와 제작 주체를 확인하는 기능은 브랜드 신뢰와 연결된다. 플랫폼이 AI 생성물과 인간 창작물을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는지, 권리 침해 신고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허위 인물과 조작된 영상의 확산을 어떻게 제한하는지가 이용자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 추천 정확도가 높더라도 콘텐츠의 진위와 권리관계를 믿기 어렵다면 장기적인 서비스 이용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기업 전략도 한 방향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콘텐츠 제작과 IP를 중심에 두는 기업은 창작 인력과 프랜차이즈 구축, 고품질 영상 제작을 지원하는 기술에 투자할 수 있다. 외부 콘텐츠를 모아 제공하는 플랫폼은 이용자 인터페이스와 마케팅, 데이터 기반 추천 역량이 중요하다. 여러 사업자의 콘텐츠와 서비스를 연결하는 기업은 회원 관계와 정산, 권리 관리 능력이 필요하다.
모든 영역을 직접 운영하려는 전략은 높은 비용을 요구한다. 자체 제작과 유통, AI 기술, 데이터 인프라, 커머스, 광고를 동시에 갖추려면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콘텐츠 경쟁력을 가진 기업은 IP에 집중하고, 기술과 유통은 외부 파트너와 결합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생성형 AI를 일시적인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는 단계도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보고서는 AI가 일상 운영과 창작 업무, 오디언스 분석, 제작 파이프라인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효율성과 차별성을 함께 확보하려면 개인정보 보호와 IP 관리, 내부 승인 절차를 갖춰야 한다는 분석이다.
기업이 공개해야 할 성과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AI 도입 전후의 제작기간과 비용, 인력 변화, 작품별 수정 횟수, 시청 성과, 오류와 권리 분쟁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 제작비가 줄었다는 발표만으로는 절감이 기술 효율에서 나왔는지 인력 축소에서 발생했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독립 제작사와 대형 스튜디오의 격차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제작 도구의 가격은 낮아질 수 있지만 유통과 마케팅, 유명 IP, 데이터, 법률 대응 능력에는 여전히 차이가 남는다.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은 늘어도 대규모 이용자에게 안정적으로 도달하고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기업은 제한될 수 있다.
생성형 AI는 제작비와 제작기간을 낮추지만 작품을 발견시키고 신뢰를 유지하는 비용까지 없애지는 않는다. 콘텐츠 공급이 늘어날수록 검증된 IP와 창작자, 추천 공간, 투명한 권리 관리의 가치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미디어 기업의 경쟁은 AI를 사용했는지 여부보다 어느 제작 단계에서 활용했고, 절감된 비용을 어디에 다시 투자했으며, 결과물의 권리와 품질을 어떻게 책임지는지에 따라 갈리게 된다. 실제 비용 절감액과 서비스 출시 일정, AI 제작 표시 기준, 배우·창작자 계약, 개인정보와 학습 데이터 관리 체계가 이후 시장 재편의 속도를 결정할 변수로 남아 있다.